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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업이란 진정한 나 자신을 알아가고 찾아가는 길

    섬유공학과 91 김성민 동문

    사업이란 진정한 나 자신을 알아가고 찾아가는 길

    지금은 ‘화장품 홍수 시대’. 매일매일 다양한 품질과 기능을 가진 제품들이 앞다투어 출시돼 매대를 빼곡히 채우고 있다. 피부에 닿는 화장품이니만큼 나에게 맞는 신뢰성 있는 제품을 고르기란 매우 어려운 법. 그 중, 아베르데는 제품 하나하나에 온 정성을 담아 가성비와 품질을 동시에 잡은 비건 뷰티 브랜드다. 비건 프렌들리 더마 브랜드로서 K-뷰티의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서고 있는 루베데카콘의 김성민 대표(섬유공학과 91)를 만나보았다. Q. 본인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91학번 섬유공학과 김성민입니다. 반갑습니다. 현재 아베르데(ABEREDE) 라는 K-뷰티 브랜드를 운영하는 ㈜루베데카콘 대표입니다. Q. 루베데카콘은 어떤 회사이고 아베르데는 어떤 브랜드인가요? 루베데카콘(Lubedecacorn)은 빛이라는 뜻이 있는 Lucia와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Beauty, 그리고 전설속에 등장하는 동물인 Decacorn의 합성어로, ‘피부에 찬란한 빛을 더하는 코스메틱 브랜드로서 최고의 가치가 있는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지난 15년간 뷰티 제품 수출업무를 하였으며 2021년에는 ABEREDE 아베르데라는 비건 프렌들리 더마 브랜드를 런칭했습니다. 아베르데(ABEREDE)는 BETTER SKIN, BETTER NEW LIFE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단순히 특정 성분을 제외한 ‘클린’이 아닌 LESS BUT BETTER (덜어낼수록 좋은)을 모토로 피부에 깊은 휴식을 제공하며, 자연ㆍ사회와 소통하는 적극적인 비건 프렌들리 더마 브랜드입니다. 섬세한 차이가 경이로움을 만들어 낸다는 믿음으로 까다로운 성분 원칙을 적용하여 동물 원료를 사용하지 않는 100% 비건 레시피 적용 제품을 늘려나가고 있으며, 핵심 성분 한두가지를 더마톨러지와 바이오 테크놀러지에 기반한 성분을 사용하여 가성비와 효과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컨셉의 브랜드입니다. Q.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학졸업 후, 미국 의류브랜드 그룹사의 한국지사에서 10여년간 근무하면서 의류업계의 흐름에 맞추어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던 중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제가 근무하던 회사에서 BRAND PROTECTION의 일환으로 국내 파트너를 찾고 있었고, 당시 시장 상황에서 제가 담당했던 미국 의류브랜드가 한국의 소비자에게 어필될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회사에서는 직원에 대해 파트너로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근무하던 회사를 퇴사하는 동시에 브랜드의 국내 파트너로서 의류유통사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자그마하게 시작한 브랜드의 숍이 이후 부단한 노력 끝에 다수 백화점에도 입점 하는 등 사업의 규모를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따라 더 이상은 미래 산업으로서 의류산업의 확장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했고, 새로운 아이템을 모색하던 중 뷰티산업의 발전 가능성에 주목하여 과감히 뷰티 분야로 사업을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Q. 아베르데의 대표적인 제품은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많은 분들이 본인 피부 타입에 맞는 화장품이 어떤 화장품인지, 어떤 브랜드를 사용해야 좋은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역시 예전에는 그러했기에 고가의 유명 브랜드 화장품을 사용했었습니다. 그러나 얼굴 피부 트러블이 많이 생겨 피부과 진료를 받고 약을 복용하여 나은 경험이 있습니다. 아무리 광고를 많이 하고 인지도가 높은 화장품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피부와 맞지 않으면 좋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뷰티 수출을 하면서 중동 바이어의 피부 개선을 위한 요청이 있어 연구개발 하던 중에 다양한 피부타입 (건성피부, 지성피부, 여드름피부, 민감성피부 등)에 적합한 성분지식을 연구하여 보기에만 좋은 브랜드가 아닌 진정 피부 케어의 정석으로서 원리원칙에 충실한 데일리 스킨케어 제품 ‘프린서플 3종 라인’을 출시했습니다. ▲ 아베르데 프린서플 내추럴 리치 하이드레이티드 3종 세트 1년여 동안 연구개발에 집중해 완성된 ‘아베르데 프린서플 내추럴 리치 하이드레이티드’ 3종 세트는 극건성 및 민감성 피부를 위한 물광 토너·세럼·크림 제품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겨울에도 촉촉한 피부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 제품은 피부과학 안심 처방으로 제작된 포뮬러 사용과 동물성 실험을 하지 않고 자체 특허 받은 원료의 사용으로 제작된 무색, 무알콜의 비건프렌들리 더마코스메틱 제품입니다. 특히 히아루로닉 분자구조를 감각적인 색감과 디자인으로 형상화한 제품 패키지도 주목받으며 함께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Q. 최근 비건 코스메틱의 인기가 엄청난데요. 비건 코스메틱이 일반 화장품과 다른 점, 최근 인기의 요인은 무엇인가요? 비건 화장품은 화장품 제조 가공 단계에서 동물성 원료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화장품을 말합니다. 비건 화장품을 천연 화장품, 유기농 화장품과 비슷한 맥락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엄연히 다릅니다. ‘천연 화장품’은 화학적 합성 원료가 아닌 동식물 및 그 유래 원료 등을 95% 이상 함유한 화장품을 의미합니다. ‘유기농 화장품’은 동식물성을 포함한 유기농 원료를 10% 이상 함유한 화장품을 말하는데요. 이 두 가지는 비건 화장품과 달리 동물성 원료 혹은 동물 유래 원료를 함유할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동물성 성분이 단 1%도 함유되지 않은 제품을 ‘비건 화장품’이라고 칭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19 이후 환경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이에 따른 윤리소비가 확산되면서, 동물 실험을 거치지 않고 천연 원료를 사용하는 비건 제품이 주목받게 된 영향 때문으로 보입니다. 특히 MZ세대를 중심으로 가치소비 트렌드가 확산되고 비건인구가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Q. 제품을 만들고 회사를 설립하기까지의 시행착오는 없었나요? 저에게는 개인 의류사업을 통해 사업 경험을 한 것이 뷰티 경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사업 초기에 국내 유명 백화점과 국내 미입점 해외브랜드를 발굴하여 브랜드를 키우자는 취지로 미국 매직쇼 등에 출장을 가서 참신한 미국과 프랑스 의류브랜드를 발굴했고 국내 마켓에 test order를 했는데 소비자의 반응이 좋아 완판되었습니다. 이후, 캐나다 본사와 국내 독점 판매에 대한 구두계약을 하게 되었는데 같은 시기에 국내 대기업에서도 캐나다 본사와 컨택을 했고 설득 끝에 캐나다 측으로부터 확답을 받았으나, 결국 독점 판매권은 국내 대기업에게 돌아갔습니다. 당시 국내의 기업환경은 중소기업이 살아 남기에 현재보다 더욱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어려웠던 상황과 시련이 현재 회사를 운영하는데 많은 교훈을 안겨준 것 같습니다 화장품과 관련해서는 초창기 제품 개발 과정에서 피부자극 없는 천연원료, 비건제품, 클린뷰티로 개발의 방향을 잡고 부단한 연구개발 끝에 시제품을 개발했고, 피부트러블이 있는 지인들에게 사용해보라고 권했습니다. 테스트 시간을 세분화하고 효과를 볼 수 있게 사진을 찍는 등 피드백을 받았는데 피부가 개선되고 좋아졌다는 반응에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다른 회사에서 출시한 화장품과 비교 테스트도 진행했을 때 저희 제품이 두드러진 개선 효과를 보였습니다. 정말 보람차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스럽고 힘이 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2달 정도 지나니 천연 원료의 문제점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색이 갈색으로 변하고 향에도 고약한 냄새가 발생하였습니다. 자연성분을 포함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이런 문제를 개선하고자 효과, 발림성, 향 등의 여러 변수를 고려하여 무려 1년이라는 시간을 샘플링에 투자했습니다. 이러한 시행착오 끝에 소비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지금의 아베르데 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습니다. Q. ‘화장품 홍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대표님의 전략과 아베르데의 강점은 무엇인가요? 브랜드간, 업체간 경쟁이 심화되는 현실 속에서 ABEREDE 브랜드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동력으로 3가지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니즈를 반영하여 아베르데를 비건 프렌들리 더마 뷰티 브랜드로 위치를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젊어지고자 하는 욕구와 피부노화를 늦추고자 하는 바람을 충족시키기 위해 원료개발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자연유래 원료의 개발 및 성분처방연구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피부를 위한 가장 좋은 효과를 지니는 제품을 개발하여 소비자에게 선보이는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라 생각하기에 새로운 성분 개발을 통한 피부개선을 언제나 제일 먼저 생각합니다 또 하나의 전략은 가성비 있는 제품 개발입니다. 좋은 재료와 성분을 사용함에도 소비자의 접근이 용이할 수 있도록 가격 경쟁력을 가지되 가장 효과적인 처방을 유지하여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이 오래 기업을 지속하기위한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가성비를 제품 개발의 중심으로 삼고 있습니다. 끝으로 아베르데만의 컬러를 잘 나타내는 독창적인 디자인은 저희 브랜드만의 강점입니다. 제품의 디자인은 제품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소비자의 선택을 이끌어 내기 위한 첫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유명제품과 유사한 개성 없는 디자인으로는 소비자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품이 갖는 정보를 충실히 담으면서도 첫눈에 아베르데의 제품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담는 디자인의 개발에 노력하고 있습니다. ▲ 아베르데 히아루론 비타민E 안티옥시 앰플 Q. 최근 스킨케어에 대한 소비자들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그에 비례해 코스메틱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다양한 기능과 성분을 가진 화장품들을 출시하고 있는데요, 나에게 맞는 화장품을 고르는 똑똑한 방법이 있다면? 화장품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연구한 결과는 비싸다고 좋은 화장품이 아니고, 여러 가지 많이 사용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렴하고, 사용하는 화장품의 수를 줄이더라도 나에게 맞는 성분과 청결한 관리가 우선입니다. 좋은 화장품을 고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를 따져 봐야 합니다. 특히 내가 사용하는 화장품이 얼마나 좋은 원료로 만들어졌는지, 어느 정도의 함량으로 사용하며 어떤 연구와 기술력을 반영해 개발됐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킨케어 제품이라면 더욱 꼼꼼히 전성분을 확인하고 식약처가 인증한 기능성 효과가 있는지도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성, 복합성, 건성 등 피부특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초의 모든 단계에서, 이마 끝에서 턱 끝까지, 한가지 타입의 제품만 사용해야 하는 것 역시 아닙니다. 이마는 지성인데 볼은 건성민감피부일 수도 있고, 여름엔 지성이 심하다가 겨울엔 건조하고 민감한 경우도 있습니다. 비교적 늘 일정한 피부의 경우는 계절에 따라 보습 제품의 단계나 사용 횟수만 조절하는 정도로 관리해도 됩니다. 그러나 계절에 따라 변화가 많은 경우는 기본적으로 보습을 기준으로 시기별 피부의 특성에 맞게 지성, 건성 조절 제품을 1-2단계 선택하여 사용하고 트러블 부분에 대해 대체 또는 추가하여 조절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새로운 화장품은 몸 컨디션이 좋을 때 시도하는 것을 권합니다. 피부가 민감할 때, 몸이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는 새로운 화장품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신체 기능이 떨어지고 면역 반응이 흔들릴 때는 제품에 대한 피부의 선별력도 부족해져 화장품으로 인한 트러블이 생기기 쉽기 때문입니다. Q. 루베데카콘 대표이사 이전의 대표님의 경력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성균관대학교 학부졸업후 Mast industries (미국의류 liaison office)에서 MR로 근무하면서 사회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회사 내에서 경력의 발전 가능성을 확대하기 위해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고, 영국 런던 LCF ( London college of fashion )에서 fashion marketing 공부를 했으며 한국에 귀국할 당시 이전 회사의 동료와의 식사자리에서 Mast industries의 총괄매니저 직책을 지점장님으로부터 직접 제안받아 총괄매니저로서의 캐리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패션마케팅 관련 업무를 수행하던 중 제가 담당하던 미국 브랜드의 국내 파트너로서의 일을 위해 10여년에 걸친 직장인으로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스스로의 사업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국내 백화점에 대한 영업과 브랜드 숍의 운영 등 의류마케팅 사업을 7년간 진행해오다 경기의 흐름에 따라 사업분야를 전환하여 뷰티 화장품의 수출을 주력으로 7년여간 수출업무를 진행했습니다. 이후 피부 본연의 자생력 있는 피부개선제품 연구를 하며 제품을 만들어 2021년에 ABEREDE 아베르데라는 K-뷰티 브랜드를 런칭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회사에서 근무 시 당시의 한국 기업과는 달리 기본 원리원칙에 입각하여 새로운 시스템을 개발하고, 이를 정교하게 매뉴얼화하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경험하고 체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경험은 지금의 사업을 근본 원리에 기반하여 체계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도록 이끌어가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Q. 성균관대학교 섬유 공학과를 졸업하셨어요. 학창 시절은 대표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기억을 거슬러보면, 학창시절은 사실 다른 동문들과 마찬가지로 도서관, 학교, 집을 오가던 기억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학업에 가장 중점을 두면서도 학과생활과 동기들과의 추억을 만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소중한 기억을 많이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 모두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생활을 했기에 대학생활의 충실함이 제가 지금까지 스스로를 변화하고 세상의 흐름에 적응하고, 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섬유공학과에서 배우는 화학식이 섬유의 고분자 공학과 맞물리기에 지금의 뷰티를 연구하기에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그 시절 인연을 맺은 동기들, 선 후배들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20살 초에 만난 보물 같은 친구들은 3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만났음에도 바로 어제 만난 듯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아마 이런 인연들이 120살 수명의, 앞으로의 30년을 더 지탱해 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든든하고 고마운 마음입니다. Q. 본인의 인생목표, 비전은 무엇인가요? “사업이란 진정한 나 자신을 알아가고 찾아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수년동안 여러 장애물과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알아가고, 하나하나 단계적으로 이루어 내는 성과가 자아를 완성해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사업을 통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인생 목표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베르데의 제품 하나하나는 저의 자식과도 같습니다. 인생목표를 이루기 위한 비전으로 ABEREDE 아베르데를 진정성 있는, 믿을 수 있는 브랜드로 성장시키고자 합니다. BETTER SKIN, BETTER NEW LIFE를 모토로, 품질에서 패키지 디자인까지 모든 과정 하나하나에 정성과 혼이 담긴 제품을 개발하여 소비자의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K 뷰티의 대표주자라고 생각하고 해외 바이어들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은 물론 더욱 수출에 기여하고 한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저는 작은 실천이 우리의 세상에 가져올 기적을 믿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아름다운 가치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미처 시선이 닿지 못한 곳은 없는지 적극적으로 주위를 살피며 마음을 쏟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매일 조금씩 더 아름다워질 수 있도록 작지만 정직한 걸음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Q. 마지막으로 성균인들에게 한 마디 대학생활은 인생에 있어서 선물 같은 시간입니다. 보물 같은 친구들과 선후배들, 교수님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여러분들이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또 과거 저의 모습이 떠올라 한편으로는 미소 짓게 됩니다. 지금 이 시간이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자아를 탐색하고 멋진 어른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선후배, 동기님들 모두들 좋은 일만 가득한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 세계인의 이목을 주목시킨 한류스타

    연기예술 16 차은우

    세계인의 이목을 주목시킨 한류스타

    2022년 파리 패션위크에 세계인의 이목을 주목시킨 한국인이 있다. 프랑스 튈르리 정원에서 개최된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디올(Dior)의 패션쇼 포토월에 선 배우 차은우(연기예술 16) 동문이 바로 그 주인공. 그의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는 듯 쉴새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세례와 몰려드는 인파로 쇼장 입구는 북새통을 이뤘다. 저명한 명품 브랜드의 홍보대사로 활동한다는 것은 현재 인기와 화제성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미터로 활용된다. 디올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대세 중의 대세, 차은우 배우를 서면으로 만나보았다. Q. 디올 홍보대사로 활동하는 등 광고계 브랜드를 섭렵하며 MZ세대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인기의 비결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바쁘게 보낼 수 있는 일상이 정말 행복하다. 사실 활동을 하면서 성장하고 달라진 내 모습이 신기하다는 이야기를 주변 분들과 웃으면서 많이 하는 것 같다. 동시에 책임감도 느낀다. Q. 가수라는 본업을 뛰어넘어 호평받는 차세대 연기자로 활동하고 있는데, 배우로서의 도전에 있어 어려운 점은 없었는가? 역할마다 어려운 점도 있었는데, 특히 여러 활동을 병행해야 할 때 일정을 정리하는 부분이 쉽지 않았던 것 같았다. 지금은 모두 잘 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중이다. Q. 지금까지의 연기했던 작품 중 특별히 애착가는 작품은? 여러 작품이 다 기억에 남지만, 12월 방영 예정인 '아일랜드'라는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Q. 연기에 몰입하기 위한 본인만의 방법이 있다면? 촬영 전 일상에서부터 조금씩 스스로에게 캐릭터의 모습들을 주입을 시킨다. Q. 배우로서의 삶을 이어 나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 계속 배우고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인 것 같다. 다양한 캐릭터을 도전해보고 경험해보고, 책이나 영화도 많이 보고 싶다. Q. 연기예술학과 16학번 차은우의 모습은 어떠한가. 경험해 보고픈 마음과 자세를 가진 학생인 것 같다. Q. 광고모델 수익금을 ‘후배사랑 학식지원기금’에 쾌척하는 등 젊은 동문들의 기부문화 확산에도 앞장서고 있다. 차 동문에게 모교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릴 때부터 대학교는 어떤 곳일까에 대한 호기심도 컸었는데, 데뷔 전에 입학해서 더 애착이 가고 든든한 느낌이 든다. Q. 어떠한 모습으로 대중들의 기억에 남고 싶은가? 믿음을 주는 사람으로 기억에 남고 싶다. Q. 25만 성균인들에게 한마디.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게 나아가길 바란다. 어디서든 만나면 즐겁게 인사하면 좋겠다. 성균관대 파이팅!! 총동창회 장서현 기자

  • 김현희 교수가 말하는 공연예술의 가치

    연기예술학과 부교수 김현희 부교수

    김현희 교수가 말하는 공연예술의 가치

    어른들은 꿈은 아이들이나 꾸는 거라고 하지만, 인생의 2막, 중년기. 어떤 꿈을 꾸는지가 어떤 나를 만드는지를 결정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2막이 있고, 김현희 교수는 그런 인생의 2막을 즐기는 꿈꾸는 어른이다. Q.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기예술학과 학과장이자, 연기를 가르치고 있는 김현희입니다. 현재 배우, 연출가, 안무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Q. 최근 한국 메세나협회 선정작 <린다와 조이>에 출연하셨어요. <린다와 조이>, 어떤 연극인가요? 이 작품은 전직 잘나가던 작가이자 연출가인 조이, 그의 대학동기 후배인 린다, 두 중년의 해프닝을 다룬 연극이에요. 사고로 인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린다가 자신의 못다 이룬 배우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동아리 선배인 조이를 찾아가면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돼요. 이 이야기는 중년의 두 배우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이야기, 인생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 시간의 유한성과 도전, 꿈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요. 린다와 조이는 중년의 못 다 이룬 꿈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요. 전직 잘나가는 작가였던 조이는, 화려했던 과거와는 달리 중년이 된 자신의 삶에 회의감과 허무감을 느끼고 다시 새로운 성취감을 얻고 싶어하죠. 린다는 딸을 가진 어머니로, 자신의 꿈을 잊은 채 살다가 못다 이룬 배우에 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열정을 갖고 있답니다. 삶과 죽음, 꿈과 시간의 유한성, 도전이라는 심오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를 코미디로 재밌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Q. <린다와 조이>에 출연하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이 작품은 배우를 두고 쓴 창작극이예요. 보통은 연극의 내용이 정해져 있고, 알맞은 배역을 캐스팅하는 식인데, <린다와 조이>는 작품의 작가이자 연출가 선생님과 함께 작품 창작과정에 직접 참여했다는 점에서 저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죠. 마치 배우를 위한 맞춤형 공연처럼 ‘린다’를 통해 배우로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 작품에서 린다는 꿈에 대한 간절한 욕망과 이를 이루기 위한 도전이 엄청나거든요. (웃음) 이 작품을 보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명확했어요. 중년으로 접어들게 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꿈은 사라져요. 꿈은 어린아이들이나 꾸는 거라고 생각하죠. 이러한 생각 때문에 하고 싶은 게 있어도 주저하고 꿈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저는 린다를 통해서 중년들에게도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어요. 젊은 학생들에게는 꿈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을 전해주고 싶었어요. 우리나라는 꿈을 꼭 직업과 연결시키잖아요. 꿈은 직업이 아니에요. 꿈은 내가 하고 싶은 게 꿈이 되어야하죠. 직업을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위축되어 있는 젊은이들에게 마음껏 꿈꾸고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Q. 나에게 ‘린다’란? 린다는 저와 닮아 있는 구석이 많아요. 극중에서 린다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라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요. 이러한 린다의 연기와 연극에 대한 열정은 저와 매우 닮아 있어요. 지금껏 배우가 되기 위해 걸어온 과정이 저를 교수의 길로 이끌었고,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어요. 어느덧 중년기에 들어서니, 배우로서 더 늦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됐고, 제자들에게도 말로만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닌 실전에서 뛰는 선생님의 모습과 열정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언제든지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걸요. 실제로 제자들이 공연을 보러 많이 왔는데, 이 연극을 보고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이런 반응을 보면서 힘을 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런 의미에서 린다는 저에게 정말 큰 행복을 주었어요. 린다를 연기하면서 가장 무서운 관객이자, 가장 힘이 되어 주는 관객인 제자들에게 힘을 주고, 린다처럼 저도 연기나 연극에 대한 열정을 끊임없이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린다를 통해서 배우로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주변에서도 이번 작품이 ‘인생캐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배우로서 매우 특별한 경험을 했죠. 린다에게도 고맙지만, 저의 꿈을 맘껏 펼칠 수 있게 극을 써주신 작가님께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네요. Q. 함께 출연하신 전노민 배우님이 본교 연기예술학과 대학원생이라고 들었어요, 캐스팅 비화나 공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공연 때 재밌었던 일화가 하나 있죠. 이번 공연이 더블 캐스팅이라 페어가 정해져 있었어요. 전노민 선생님과 저, 태항호 배우와 문현정 배우님이 같은 페어인데, 전노민 선생님이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루 공연을 못하게 되면서 태항호 배우와 당일 공연을 하게 된 거예요. 서로 바빠서 합을 맞추지도 않고 하물며 서로 연습을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공연을 진행하게 되었죠. 처음에는 전석 매진 공연에다 상대배우와 어떤 자극을 주고받을지 예상할 수조차 없어 많이 걱정됐어요. 그런데 오히려 이때 정말 ‘살아있는’ 연기를 했었고, 너무 재밌는 공연이 되었어요. 제가 항상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게 ‘무대에서 살아있어라, 직접 듣고 보고 반응해라,’ 인데, 이 날 공연은 말그대로 “살아 있는” 공연이었어요. 상대배우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오는 떨림과 예상치 못한 극적인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두 배우가 사전에 전혀 합을 맞추지 않은 상황에서도 살아있다면, 이 감정이 더욱 증폭돼서 연극을 더 살릴 수 있구나 생각했죠. 공연이 끝나고 그 여운이 가시질 않아서 혼자 집에서 회상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있네요. (웃음) Q. 예술가로서 어떤 길을 걸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20살 때부터 배우 생활을 시작했어요. 저도 연극 영화과를 나왔거든요. 요즘은 입시학원을 통해 배우를 준비하는 친구들이 많은데, 저는 학원은 못 다녔어요. 대신 고등학생 때, 극단에서 청소년 연기자 모집 글을 보고, 극단에 가입해 고 3때 배우로서 첫 공연에 섰죠. 그 전에는 교회에서 어릴 적부터 성극 등 공연을 자주 했었고, 고등학교에서도 응원단장, 사회자로 대중 앞에 자주 섰어요. 고등학교에서는 유명인사였죠. 이런 경험들 덕분에 자연스럽게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어요. 이후,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연극 공연에 많이 서게 되었고, 그 첫 무대가 아르코 대극장에서 열린 ‘휘가로의 결혼’ 이었어요. 당시 20살이었던 저에게는 매우 큰 무대였기에 기억에 남아요. 무용과 움직임 쪽에 재능도 있고 관심도 있어서 98년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최된 ‘제주 세계섬문화제’의 안무를 맞게 되었고, 배우뿐만 아니라 안무가, 연출가로서의 다양한 경험을 했어요. 러시아로 유학을 갔다 온 이후, 강단에 서게 되었고, 지금도 지도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Q. 배우, 안무가, 연출가 등 다양한 연기예술분야에서 활동하고 계신데요,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다면? 연출가로서는 피지컬 드라마 <로미오와 줄리엣>이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에요. 이 극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대사를 가져가는 동시에 일부 각색하여 피지컬의 움직임을 극대화한 극이에요. 외부 중견 배우들, 우리 학교 연기예술학과 학생들이 출연했고, 졸업생인 문가영, 김남주 학생이 줄리엣 역을 맡아 공연했어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두 남녀 주인공의 비극을 다룬 작품으로 모두가 아는 이야기죠. 하지만 저는 이 흔한 이야기를 ‘운명’이라는 인물을 투입해 비극적인 사랑을 바라보는 ‘운명’의 시각을 제시하고자 했어요. 작품 연출 당시 세월호의 아픔이 채 아물지 않은 상태였는데, 이때 어른으로서, 예술하는 사람으로서 ‘어른들의 잘못으로 무고한 희생을 당한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그러한 메시지를 연극에 담고 싶었죠. 로미오와 줄리엣을 주제로 한 예술작품들은 많지만, 왜 남녀의 집안이 원수 지간인지를 다룬 작품은 없었어요. 저는 이 의문점에서부터 출발하여 부모 세대에서 해결하지 못한 어른들의 문제 때문에 사랑한 죄밖에 없는 아이들이 희생당하는 상황을 극에 녹여냈어요. 아직도 등장인물 영주의 대사를 떠올리면 눈시울이 붉어지곤 해요. 외부 중견 배우들, 우리학교 연기예술학과 1학년부터 졸업생까지.. 스케일도 크고 각색, 연출에서 상연까지 많은 노력을 했기에 힘들었지만, 연출로는 저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에요. ▲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2017) 배우로서는 이번 작품, <린다와 조이> 의 ‘린다’ 역할이 가장 애착이 가요. 쉬지 않고 춤추고 노래하고 랩하고 연기하고 셰익스피어의 독백들을 외우고, 암전 없이 의상만 7벌을 갈아입으면서 솔직히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도 이런 다양한 모습의 린다를 연기하면서 너무 재미있었고, 배우로서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서 행복했던 연기였어요. 예전에는 무겁고 비극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코미디는 이번이 처음이라 망가지는 연기가 민망하더라구요. 배우로서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제자들 앞에서도 망가져야 했으니까요. (웃음) 우리는 누구나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잖아요. 저는 ‘카리스마’가 제 가면이었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귀엽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어요. 평소 제자들에게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얘기하는데, 그 망가짐의 재미를 몸소 보여준 경험이어서 저에게는 더 특별하답니다. ▲ 연극 ‘린다와 조이’의 ‘린다’ 역을 연기하는 모습 Q. 피지컬 드라마는 조금 생소한데요, 설명 부탁드려요. 피지컬 드라마는 신체적 자극을 통해서 배우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신체적 접근법과 개연성 있는 서사를 접목시킨 극 장르예요. 신체적 접근법은 감정이 아닌 신체로 접근을 해서 감정이 억지로 불러일으킬 필요 없이, 신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 감정을 느끼게 되는 방식이예요. 저는 러시아 유학을 통해 피지컬을 이용한 동작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을 배웠고, 현재 이를 우리학교에서 강연하고 있어요. 교내에서는 햄릿, 맥베스, 한여름밤의 꿈 등 대작들을 피지컬로만 공연화했어요. 그리고 이러한 피지컬 장르가 대중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가 매우 궁금했어요. 외부에서 공연 할 때 피지컬로만 가면 많은 대중들이 외면할 수 있겠다 해서, 피지컬 드라마를 만들게 되었죠. 이야기는 스토리라인 그대로 따라가고 대사도 가져가면서 배우의 심리적인 상황이나 극중에 없는 전사 상황, 대본에 있는 움직임 장면들을 피지컬화해서 공연을 올렸어요. 움직임과 음악이 굉장히 풍부해서 판타지 영화를 본 것 같다, 뮤지컬을 본 것 같다는 평을 받았어요. 이렇듯, 피지컬 드라마는 대사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시각화된 현장의 움직임을 통해서 주인공의 감정과 서사를 파악할 수 있어서 관객들을 동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Q. 앞으로 작품 활동 생각이 있으신지? 네. 저는 꾸준히 도전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도전할 계획이에요. 올해 2월에는 국립극장에서 <피에타> 라는 작품으로 모노드라마에 첫 도전을 했었고, 작년 12월 에는 2인극 페스티벌에서 상대역인 태항호 배우와 함께 연기상을 수상했어요. <린다와 조이> 이후 내년 초쯤 작품제의가 들어와서 출연할 계획이고요. 학기 중에는 학생들 가르치는 일에 집중해야 하니, 배우 생활은 매 방학때마다 틈틈이 하고 있어요. 덕분에 하루하루 쉴 틈없이 바쁘게 보내고 있지만, 저에게는 제 꿈을 이루고 있는 순간이라 너무 소중하고 즐거워요. Q. 아직 현장에 대한 부담감 등으로 인해 공연 예술에 대해 장벽을 느끼고 있는 학생들이 몇몇 있는데요.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공연 예술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최근 과학기술의 발달로 사람들이 끝도 없이 더 좋은 것들, 더 멋있는 것들을 찾기 마련이잖아요. 하다못해 요즘 메타버스까지 등장하면서 가상세계로 우리가 모든 것들을 체험하게 된 이때, 가장 마음을 건드려줄 수 있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교감이지 않나 싶어요.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과의 단절에서 오는 공허함과 외로움, 우울은 이 “교감”을 통해서 극복해낼 수 있거든요. 공연예술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 바로 현장성인데, 내가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우와 함께 호흡한다는 거예요. 관객이 단순히 시청자로서 가만히 보고 있는 게 아니라 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예술작품이 완성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공연예술의 가치라고 생각해요. 무대 위 살아 움직이는 배우들과 교감하는 그 짧은 순간이 가져오는 감동은 매우 크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자들에게 “단 한 순간이라도 살아있어라” 라고 말하곤 해요. 배우는 살아있는 한 순간을 위해서 수많은 열악한 상황과 고난을 이겨내야 하지만, 그 찰나의 한 순간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거든요.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여 많은 것들이 우리를 변화시키더라도, ‘공감’이라는 것은 꼭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연예술은 그 공감을 가장 잘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고요. 이 글을 보는 여러분들도 이러한 공연예술의 가치를 몸소 체험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 과학수사, 보이지 않는 진실을 목도하다

    과학수사학과 석좌교수 정희선 석좌교수

    과학수사, 보이지 않는 진실을 목도하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정희선입니다. 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초대 원장이었고, 국제법독성학회 13대 회장과, 국제법과학학회 22대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모두 ‘여성 최초’ 였고요.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과학수사학과에 석좌교수로 있습니다. - 앨런커리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수상소감을 여쭙고 싶어요. 국제법독성학회는 상당히 권위 있고 규모가 큰 학회입니다. 전 세계 119개국의 회원들과 함께 벌써 60년이 넘도록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지요. 앨런 커리상은 그런 국제법독성학회에서 수여하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이에요. 저는 아시아인 최초이자 여성 최초로 이 상을 수상하게 되었는데,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이런 큰 상을 받을 수 있어 참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 최근 콘텐츠 시장에서 <소년심판>, <비밀의 숲> 등 법정 수사물이 큰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과학수사와 실제 과학수사, 큰 차이가 있을까요?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아무래도 드라마는 한시간 남짓의 러닝타임 안에 하나의 사건이 해결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니 수사의 전개가 매우 빠릅니다. 그런데 이것부터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 드라마 속의 박진감 넘치는 수사와는 달리, 실제의 과학수사는 상당한 인내와 끈기가 필요한 일이랍니다.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 범죄현장에도 가고, 실험도 직접하고, 수사도 하는 장면이 구성되곤 합니다. 한사람이 세 명의 역할을 도맡아 하는 거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절대로 그런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하지 않는데요. 사건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범죄 수사의 단계는 잘게 세분화 되어 있고, 그 안에 또 다양한 역할들이 있어요. 이 때 각 역할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공정한 수사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랍니다. - 과학수사학은 범죄수사학이라는 큰 틀에 속하는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범죄수사와 비교했을 때 과학수사가 지니는 매력 혹은 특징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과학수사는 말 그대로 ‘과학’을 기초로 합니다. 그리고 과학은 매우 확실한 진리입니다. 일반적인 범죄수사에서는 주로 인간의 심리를 기반으로 사건의 정황을 파고 들지요. 그러한 형태의 범죄 수사가 엉터리라는 것은 아니지만, 증언으로 유추되는 정황 같은 것들이 범죄사실에 대한 완벽한 증명이 될 수는 없겠죠? 하지만 과학수사는 분명한 인과관계를 포착하고, 확실한 증명을 해냄으로써 사건을 풀어갑니다. 이 얼마나 매력적입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과학을 공부해온 사람이기 때문에 과학수사의 똑 부러지는 면모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내가 이 인과를 포착하고 설명하는 데에 열중하면, 억울한 사람이 누명을 벗고, 세상이 좀 더 안전해집니다. 어떤가요 이 정도면 충분히 매력적이지요? - 학부에서는 약학을 공부하신 것으로 압니다. 약대 졸업 후 국과수 입소, 당시로서는 다소 특별한 행보였을 것 같은데요. 과학수사와는 어떠한 계기로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대학생 때, 우연한 계기로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장님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날 강연을 들으면서 운명처럼, ‘나도 이 일을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장님의 입을 통해 들은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정말 매력적으로 다가왔거든요. 몇 십년이 지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날의 강연을 기억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더라고요. 나에게는 내 인생을 바꾼 시간이었는데 말이에요. 그러니 이 일이 저에게 운명이겠지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크게 각광받지 못하는 직장이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국과수는 시신만 부검하는 곳이라고 생각하던 때니까요. 그래서 국과수에서 일하겠다고 주변에 선포했을 때, 모두가 나를 말렸어요. 그래도 저는 확고했습니다. 그날 강연이 저에게는 임팩트가 상당했으니까요. 제가 지금 강연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 이유도 이것에 있어요. 내가 이 길을 걷게 된 것처럼, 누군가도 제 강연을 통해 새로운 꿈을 꾸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며 진심을 다하고 있답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원장 시절과 엘리자베스 여왕이 수여하는 훈장을 받고 있는 모습 -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초대 원장을 지내셨는데요.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떠셨나요? 지금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초대 여성 원장 타이틀을 가지게 된 저이지만, 저 또한 입사 초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듯 실재하는 성차별의 대상이었답니다. 그때는 여성이 결혼을 하면 직장을 그만두던 때였으니 말 다했지요. 남들 못지않은 성과를 올렸지만 두 번이나 승진에 실패했을 때는 정말이지 절망적이었어요. 그래서 늘 사표를 마음속에 품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창 퇴사를 고민하던 때가 마약 소변검사법을 연구개발 하던 때거든요. 하루 종일 쥐에게 약을 주사하고, 그 소변을 받아 들여다봤지요.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글쎄 그때는 소변 실험이 내가 더 해야할 일 같았어요. 그렇게 일에 치여 퇴사는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결국 사표는 못 썼네요(웃음). - 마약 범죄를 밝혀내는 시스템이 부족했던 대한민국에 법과학 선진국의 소변검사법과 모발검사법을 들여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80년대의 한국에는 마약을 투약한 사람의 몸에서 마약을 검출하는 기술이 전무했습니다. 성분 분석을 통해 마약의 종류를 구분하는 기술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마약 범죄를 밝혀내는 기술은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앞서 잠시 언급했던 쥐 소변과의 사투를 통해 소변검사법을 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소변검사법에 문제점이 있다면 마약 투약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소변에서 마약이 검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모발검사법을 새로 개발하게 되었지요. 마약을 투약하면 그 흔적이 우리 체모에 남습니다. 모발검사법을 통하면 마약 투약 여부 뿐만 아니라 언제 마약을 투약했는지도 알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실제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마약 범죄자들이 모발검사법을 피해가기 위해 머리카락을 짧게 밀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검사가 상대적으로 어려워지긴 하겠지만 투약의 흔적은 온몸의 체모에 남기 때문에 보이는 털만 민다고 해서 마약이 검출되지 않는 것은 아니에요. - 인간 정희선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의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수사’ 를 우리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이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스스로를 잘 소개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딱히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저 주어진 일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이 분야가 더욱 가파르게 성장할 것이고, 그래야 더 나은 세상이 올 테니까요. 그래서 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널리 알리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지요. 이것이 저에게는 일종의 사명감이고, 그 사명감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 것 같아요. ▲ 국제법과학학회 회장으로 취임한 모습 - 마지막으로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잔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전공분야의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항상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강조하곤 하는데, 여러분의 현재는 지금 학생으로서 학교에서 듣고 있는 수업이 아닐까요. 지금 배우는 이 내용들이 당장은 쓸모없어 보여도, 훗날 요긴하게 쓰이는 경우가 분명히 있답니다. 만약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무언가에 몰입하고 열중해본 경험은 어디 가지 않으니 억울해하지 않아도 되고요. 그리고 한가지 더 덧붙이자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이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지요. 어학 능력과 더불어 국제적인 감각을 키워 두면 여러분의 가치를 인정받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학생 때 해외에 나가 다양한 사람들도 사귀고, 공부도 열심히 해보세요. 끝으로, 학생 때 꼭 배워야 하는 것은 ‘어울려 사는 법’ 입니다. 학교는 작은 사회입니다. 일단 작은 사회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며 어울려 살아 보세요. 그리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훗날 멋진 리더가 되기를 바랍니다. [ExCampus 시즌5] 수사는 과학이다 (유튜브 영상: 클릭하시면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 UN마약범죄사무소 국제과학수사 전문가 자문위원으로 위촉된 모습

  • 인문학을 위한 AI

    문과대학 조교수 가야트리나다라잔 조교수

    인문학을 위한 AI

    Q1.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성균관대학교에서 3년 넘게 근무한 말레이시아에서 온 가야 나다라잔입니다. 저는 에든버러 대학에서 인공지능을 공부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했어요. 더블린 트리니티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공부했고, 유럽과 아시아 전역의 다양한 학술 및 산업 기관에서 일했어요. Q2. 교수님의 고향은 어떤 곳인가요? 저는 여러 나라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학자로서 드문 일은 아니죠. 저는 말레이시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에 대해 말할 수 있어요. 모두 제 마음과 가까운 곳이에요. 만약 누군가 말레이시아에 온다면, 저는 모든 맛있는 음식을 맛보라고 말할 거예요. 나시르막, 락사, 로티카나이 같은 음식이요. 말레이시아는 멋진 해변과 섬, 그리고 멋진 환대를 선사해요. 말레이시아는 다문화여서 다양한 사람들과 언어 그리고 전통을 발견할 수 있어요. 이것이 말레이시아만의 하이라이트랍니다. 저는 말레이시아의 수도에서 자랐고, 어른이 되기 전에 떠나서 쿠알라룸푸르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말할 순 없어요. 아마도 여러분은 바투 동굴을 방문하거나 쇼핑몰에서 놀거나 혹은 쌍둥이 빌딩이 있는 KLCC 공원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말레이시아와 마찬가지로 아일랜드도 매우 아름답고 푸른 곳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아일랜드의 모습은 사람들의 따뜻함과 느긋함이에요. 만약 여러분이 어떻게 파티하는지 모르거나 아일랜드에서 흔히 말하는 좋은 ‘재미(craic)’를 갖고 있지 않다면, 아일랜드에서 살 수 없을 거예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세인트 스티븐스 그린이에요. 더블린에 온 첫해부터 그곳에 자주 가서 놀았어요. 공원에 들어서면 평온함이 감돌고, 공원에는 앉을 벤치와 먹을 거리, 읽을 시가 있어요. 공원 바로 옆에 있는 그래프턴 거리를 거닐며, 쇼핑하고, 먹고, 거리 공연을 즐기고, 심지어 연예인을 발견할 수도 있어요. 저는 아일랜드에서 문학과 사랑에 빠졌답니다. 조이스, 예이츠, 와일드 그리고 다른 많은 작가의 작품에 노출시킨 선생님들을 통해서요. 비록 제가 있던 90년대 당시에 아일랜드는 단일 문화적이었지만, 타지역과 타국에서 온 친구들, 특히 유럽 대륙에서 온 친구들을 사귀었어요. 반면에 에든버러에서의 경험은 가장 국제적인 경험이었어요. 화산 꼭대기에 지어진 에든버러 성과 아서스 시트. 에든버러 대학은 이 도시를 대표해요. 이곳에서의 연구와 박사과정을 통해 많은 놀라운 연구원과 친구들을 만났어요. 아일랜드와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도 녹색이고 습하며 바람이 많이 불어요. 겨울에는 더 춥고 여름에는 덜 습해요. 한 가지 두드러진 점은 우리에게 많은 호수(‘lochs(로치)’)와 산(‘munros(문로스)’)이 있다는 거예요. 에든버러는 동화에서 나올 만한 곳처럼 느껴져요. 도시이지만, 신고전주의 건물들 사이에 끼워진 골목길과 자갈로 포장된 구불구불한 거리가 가득하기 때문이에요. 연구자들, 특히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들을 위한 용광로임이 분명해요. 문화적으로 즐길 거리가 많은데, 특히 음식, 자연, 예술, 연극에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넘쳐요. 에든버러에서 몇 시간밖에 못 보낸다면, 로얄 마일을 따라 산책하는 것을 추천해요. 그곳에서 해기스와 위스키 한잔 그리고 튀긴 마스 바를 맛보며 달콤한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어요. Q3. 어떤 계기로 한국에 오게 되었나요? 제가 에든버러에서 연구원으로 있는 동안, 프로젝트 파트너를 방문하기 위해 아시아에 왔어요. 출장이 끝난 후 관광도 하고 태권도도 하기 위해 서울에 왔죠. 그 당시 저는 몇십 년 동안 태권도를 연습했지만 한국에 방문할 기회가 없었어요. 한국에 머물던 중, 몇 년 동안 연락을 주고받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프로젝트를 끝낸 후 이곳으로 이사 왔어요. 저는 현재 8년 넘게 한국에 사는 중이에요. Q4. 한국에 대한 첫인상이 궁금해요. 살아본 한국은 첫인상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이곳에 오기 전 겪었던 작은 도시들과는 달리, 거대한 서울이라는 도시에 깜짝 놀랐어요. 돌아다니기 편하고, 음식도 싸고 맛있었어요. 제가 처음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땐, 은행에 방문하거나 한국 앱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간단한 일들을 원어민에게 의지해야 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외국인들을 위한 온라인 거래와 다른 서비스 등 많은 것들이 개선됐어요. 제 한국어 실력도 늘었고요. 게다가 더 많은 제 친구들이 저를 보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에 매료되어 한국으로 오고 있어요. Q5. 우리 대학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는 무엇인가요? 저는 우리 대학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저의 모든 수업 속 학생들과의 교류가 기억에 남아요. 처음부터 저를 지지해주고 편안하게 해준 놀라운 동료들이 있어 행운이었어요. Q6. 현재 교수님이 담당하고 있는 수업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저는 인공지능개론, 데이터 사이언스와 R, 데이터베이스 관리와 두 개의 딥러닝 강의 등 데이터 사이언스를 가르쳐요. 이들 중 대부분은 프로그래밍을 포함해요. 저는 본질적으로 기술적인 것이 아닌 일반 AI 강좌를 가르쳐요. 이는 인문계 학생들에게 약간의 배경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해요. 그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지식을 적용하기를 원할 때, 그 과목을 더 깊이 파고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 해당 강의는 AI를 둘러싼 기술과 응용 프로그램 및 윤리에 대해 논의해요.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해 올가을부터 “인문학을 위한 AI 소개”로 찾아간답니다. Q7. 본인만의 교육철학은 무엇인가요? 저는 모든 사람이 그리고 이 맥락에선 제 모든 학생이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능력을 탐색하도록 허용하고, 때로는 도전적인 일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제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프로그래밍 기술은 연습이 필요해요. 더 많이 하면 할수록, 자신감을 느끼게 되죠. 이 과정에서 그들이 많은 것을 성취할 때, 저는 큰 만족감을 느낀답니다. Q8. 인공지능 관련 연구가 있다면 간단히 소개해주세요. 저의 초기 연구는 컴퓨터 비전에 대한 기술적 노하우를 갖지 않고도 도메인 전문가들이 비디오 분석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어요. 최첨단 방법을 사용해 해양 생물학자들을 위한 수중 물고기 비디오를 분석하는 프로젝트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죠. 이는 동영상의 화질과 사용자 선호도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적합한 동영상 분석 도구를 골라 혼합할 수 있는 지능형 시스템에 의해 이뤄졌습니다. 고성능 컴퓨팅 기능을 활용해 대용량 비디오 데이터를 처리했어요. 후에 제가 서울대 연구원으로 있을 때, 이 틀을 의학 분야에 적용하려고 했어요. 그 후, 저는 AI 기술, 특히 약물 발견을 위해 딥 러닝 기술을 사용하려는 몇몇 한국 스타트업과 함께했어요. 약물 개발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들어요. 이의 매력적인 해결책은 약물 용도 변경인데, 비용 절감, 높은 성공률, 개발 시간 단축 등 다양한 이점을 제공해요. 약물 용도 변경에서 중요한 작업은 약물과 인체의 단백질 표적 사이의 상호작용을 예측하는 거예요. 저는 주요 약물 데이터베이스의 데이터 통합에 관여했죠. 약물-표적 상호작용을 위한 딥 러닝 사용에 대해 조언했답니다. Q9.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저는 딥 러닝과 같은 현대적인 AI 접근법으로 직관적이고 상식적인 추론을 제공하는 문제 해결에 고전적인 접근 방식을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딥 러닝 모델의 해석 불가능성은 연구 커뮤니티 내에서 파문을 일으켰어요. 생태학, 약한, 석유, 가스 등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함께 일한 사람으로서, 저는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많은 산업이 AI 기술을 신뢰하고 받아들일지 알 수 있답니다. Q10. 마지막으로 우리 대학의 학생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요. 젊음을 즐기고 능력을 믿으세요. 대학을 성인기로 가는 다리라고 생각하세요. 만약 여러분이 편안한 지역 밖으로 가게 되더라도, 이것은 여러분이 성장할 기회랍니다!

  •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법학과 92 조순열 동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홈커밍데이(homecoming Day). 학교의 졸업생들이 졸업한지 30년이 되는 해에 모교를 방문하는 행사를 뜻한다. 우리 대학에도 홈커밍의 전통이 있다. 성균관대학교의 졸업생들은 입학 30주년이 되는 해에 모교를 찾는다. 올해는 2022년이니 올해 홈커밍의 주인공은 1992년, 쌀쌀한 봄바람을 맞으며 성균관에 입학한 92학번들이다. 그리고 30년만에 모교를 다시 찾는 92학번들에게 즐겁고 의미 있는 홈커밍데이를 선물하기 위해 ‘홈커밍준비위원회’ 가 꾸려졌다. 홈커밍준비위원장을 맡은 조순열 동문을 인터뷰했다. Q1.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조순열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모교 법학과 92학번이고, 사법연수원 33기 수료 후, 현재 법무법인 문무 대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Q2. 만나서 반갑습니다. 최근의 일상을 좀 여쭤보고 싶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요? 찾아주셔서 반갑고 감사드립니다. 저는 서울 서초동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로펌 운영, 법원 재판, 검찰 및 경찰수사 참여, 기업 자문, 국가기관 각종 위원회 회의 참여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어요. 또한 전국 변호사 숫자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부회장을 맡고 있고, 사단법인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이사장, 경찰청 인가법인 한국청소년육성회 서초지구 회장, 대한중재인협회 부협회장을 역임하며 공익 분야의 사회활동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Q3. 올해 있을 92학번 홈커밍 준비위원장을 맡으셨어요. 홈커밍, 어떻게 준비되고 있나요? 우리 대학은 전통적으로 대학 입학을 기준으로 30년이 되는 해에 홈커밍데이 행사를 하고 있는데요. 제가 저희 학번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은 후 사회활동이 위축되어 행사준비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동기들의 성원에 힘입어 철저히 준비 중이랍니다. 현재 준비위원회 집행부를 꾸리고, 각 학과의 대표들이 모여서 학우들의 참여를 적극 독려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적극적인 후원과 사회 곳곳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동기들의 활발한 참여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남은 기간 동안 더욱 열심히 준비해 부족함 없이 기분 좋은 행사를 만들고자 합니다. Q4. 곧 있을 홈커밍에서 가장 기대되는 것이 있다면? 역시 성균관대학교 92학번의 저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날이 발전해 온 성균관대학교의 위상과 성균인으로서의 자부심, 그리고 애교심을 거침없이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최고의 인싸 공개를 포함한 깜짝 행사들은 공개하면 스포가 되어 본 행사가 재미 없을 수 있으니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것입니다. Q5. 92학번의 홈커밍을 기념하며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1992년의 성균관대학교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92년도의 성균관대학교에는 근대 유물로 남을만한 건물들이 즐비하였습니다. 오래된 건물이 많아서 그런지 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정문에서 들어가면 왼쪽에 하마비, 용 모양의 동상이 있었고, 오른쪽에는 공자를 위시한 성현들을 모신 대성전이 있었습니다. 가파른 대성로와 잔디밭 캠퍼스에는 항상 활기찬 성균인들이 가득했습니다. 민주화운동의 산실답게 학생운동이 활발했고,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많아 고등학교별로 동문회를 한다는 현수막이 줄지어 걸려있었습니다. 동아리 활동이나 농촌활동체험을 모집하는 문구들도 많았고, 각종 고시, 공무원시험, 대기업 합격 축하 현수막도 가득했습니다. 강의실과 도서관에는 학업 열기가 뜨거웠습니다. 성균관대학교는 전통적으로 학생수는 적지만 합격률이 최고인 대학이었습니다. 현재 있는 건물은 대부분 신축되어 92년도에는 없었습니다. 있던 자리에 신축한 건물로 교수회관이 있고, 학생회관 건물 자리에는 대학본부 건물이 있었고, 국제관에는 법대와 사회대가 있었고, 600주년 기념관 자리에는 대학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경영관에는 여전히 경영대가 있었고, 그 뒤에 있는 퇴계인문관은 신축되었습니다. 법학관은 당시 테니스장이었고,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선관은 당시에도 높은 건물로 상징적인 건물이었습니다. 경영대 앞 금잔디광장에는 소라모양의 공연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져 참 아쉽습니다. 학교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맞이해 주는 건물인 비천당은 옛날에도 그 모습 그대로였던 것 같아요. 비천당 글자를 읽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고, 불탄당, 비탄당 등등 잘못 붙인 이름들로 명명되기도 했답니다(웃음). Q6. 성균관대학교에 다니던 ‘학생 조순열’ 의 모습도 궁금해지는데요. 재미난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졸업 후 알게 된 동문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겠지만, 학창시절 저는 지독하게 공부만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입학 직후 고교 동문모임에 가서 선배님들을 잘못 만났어요. 1학년 때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그 선배님 말에 속아 제대로 된 대학생활을 즐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강의실, 도서관과 하숙집을 오가는 찌질이 모범생이었지요. 이런 꼴을 보기 싫어하는 좋은 선배님의 영도 하에 가끔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술을 마신 추억과 친구들과 창경궁 돌담을 넘어 나무 밑에 숨어 소주를 마시다 들켜 혼이 났던 기억이 선합니다. 당시 함께 했던 친구는 현재 부장판사, 삼겹살집 사장님을 하고 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하루는 일요일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농활을 같이 가자고 해서 도서관에 책을 그대로 놔두고 강원도 봉평으로 농촌활동을 갔습니다. 하루면 되는 줄 알았는데 1박 2일이었습니다. 저는 농촌 출신이라 도시 출신인 친구들에 비해 농삿일이라면 감히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습니다. 거의 농부 수준이지요(웃음). 경운기 운전, 삽질, 괭이질, 낫질 등등 모두 잘하거든요. 당시 봉평마을 주민들께서 제가 농삿일을 하는 것을 보고 며칠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동안 제 법서는 도서관에 1박 2일간 방치되어 있었답니다. Q7. 성균관대학교에서 공부 말고 배워간 것이 있다면? 당연히 ‘인의예지’의 덕목이지요. 다른 대학에서는 결코 접할 수 없는 최고의 덕목을 배워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잘 다졌고, 지금은 그 덕목이 제 삶의 기둥이 되었습니다. ‘인의’라는 덕목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 라는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 인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후에 깨닫게 되었지요. ‘예지’라는 덕목에는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랑을 표현하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헌법상 기본권도 서로간 충돌을 야기할 수 있지만 상호 양보하는 미덕이 있어야 지켜질 수 있습니다. 성균인들은 법과 철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이미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Q8. 졸업 후 변호사로 일하고 계세요. 왜 변호사가 되기로 하셨나요? 변호사로 일한다는 것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어렸을 때부터 법조인이 꿈이었고, 그래서 법대에 들어왔고 사법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 후 변호사를 하게 된 솔직한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사법연수원에서의 성적에 따라 법원, 검찰, 변호사가 나뉘는데, 제 성적이 임관 성적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변호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변호사라는 직업이 참 좋은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변호사 업무를 통해 경제적 수익을 얻는 것도 있겠지만, 약자를 위한 변호, 공익을 위한 변론, 사회악을 추방하기 위한 역할 등 공익 보호와 법치주의 실현이라는 나름의 철학을 실현할 수 있다는 점이 저에게는 참으로 뜻깊은 것 같습니다. Q9. 인간 조순열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저를 움직이는 동력은 ‘사람에 대한 애정’입니다. 저는 사람을 참 좋아합니다. 사람에 따라 사회적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저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것이 누구든 인간의 아름다운 본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강합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만나든, 사회적으로 비난 받고 있는 사람을 만나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존엄과 가치를 지켜주고 싶고, 어떤 사람이 가진 장점을 살려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삶이든 직업적인 삶이든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는 일에는 어디든 달려가고 싶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싶은 마음입니다. 저를 움직이는 동력은 ‘인간 존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10. 끝으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우리 성균관대학교는 국내 대학과의 비교를 넘어 세계 유수의 대학과 경쟁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성균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학업에 충실하고 사회에 진출하여 세계를 향해 포부를 실현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사회 곳곳, 세계 곳곳에서 일등을 달리고 있는 선배님들이 후배님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랑스런 성균인으로 성장해 나가시기를 기원합니다.

  • 도전하는 과거는 아름다운 현재를 만든다

    영문학과 96, 윤희정 동문

    도전하는 과거는 아름다운 현재를 만든다

    “아나운서는 백조예요.” 윤희정 아나운서는 말한다. 신뢰감 있는 차분한 목소리, 깔끔한 외모, 뿜어져 나오는 우아함. 윤희정 아나운서를 처음 봤을 때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우아함 속에는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흔적들이 가득했다.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96학번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윤희정입니다. 현재 23년차 아나운서예요. 저희 회사 직원들이 연차 말하지 말라고들 하는데. (웃음) 현재는 행사나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는 하지만 방송국을 나와 소속이 없는 상태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아나운서라기보다는 방송인이죠. 또, (주)YA의 대표이기도 합니다. Q. 아나운서의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떻게 보면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한 게 저를 아나운서의 길로 이끈 터닝포인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 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에 대한 애착이 없었어요. 그러던 와중, 학교에서 홍보대사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게 되었고, 학교에 대한 애착을 가져보자며 학교의 홍보대사인 ‘알리미’에 가입하게 되었어요. 알리미로 활동하던 도중, 학교 홍보 모델에 지원해 좋은 기회를 얻어서 방송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홍보 모델로서 버스 광고에도 붙고 여기저기에 얼굴이 보이니까 CF 감독에게 연락이 오더라구요. 그 때부터 광고, 드라마, 영화,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면서 여러 방송 출연을 경험했어요. 저는 처음부터 방송인이 되고 싶다는 꿈은 없었지만, 대학교 2학년 때부터 방송을 시작하면서 방송인이 참 매력적인 직업이라는 것을 느꼈어요. 3학년 때는 리포터를 하게 됐는데, 당시 친하던 선배가 졸업 후 아나운서가 되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해서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대해서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고요. 제 성격이 엄청 적극적이고 일단 도전해보는 성격이에요. 바로 주변 친척 중에 아나운서로 활동 중이신 당숙아저씨께 연락드려 도움을 청했죠. 당숙아저씨께서 KBS로 오라고 하셔서 방송국 구경도 하고 회의하고 수다떠는 것도 보고 옆에서 일하시는 모습도 봤어요. 밥을 먹고 7시 뉴스를 하러 들어가시는데 저한테 스튜디오로 들어와서 옆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황정민, 김진수 앵커가 진행하는 7시 뉴스 현장 분위기를 느껴보라고. 당시에는 너무 떨렸었죠. 그때의 떨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방송국을 나오고 나서 저는 바로 “그래, 이 직업이다” 라는 확신이 들었고, 그때부터 아나운서가 되기로 마음먹었죠. 결국엔 학교에 애착을 갖기 위해 했던 행동들이 좋은 계기로 작용해서 제 현재를 만들었네요. Q. ‘행사의 여왕’ 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아나운서를 넘어 MC 로도 활약하고 계신데요. 23년차 아나운서로서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제가 후배들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은 누구나 아나운서가 될 수 있다는 점이예요. 저도 처음부터 아나운서의 신뢰감 있는 목소리를 갖고 있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학원을 다녔죠. 하지만, 저는 학원을 다닐 때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느낌보다는 아나운서처럼 말하고, 아나운서처럼 행동하는 것에 집중했어요. 어떻게 좋은 목소리를 내는지 공부한다고 해서 모두 좋은 목소리를 낼 수는 없어요. 머리로 이해하고 몸으로 체득하는 게 더 중요하죠. ‘나는 이미 아나운서다’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일상에서도 늘 아나운서의 언행을 갖추는 게 가장 중요해요. 당시 이렇게 연습한 이유는 허수경 MC라고 당시 유명한 선배님이 계시는데, 그 분이 늘 버스에서도 지나치는 간판들의 문구를 아나운서처럼 읽고, 길을 걸으면서 현장을 중계하는 아나운서처럼 말하기 연습을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아나운서의 모습을 체득한 선배님의 말씀을 듣고 저도 이를 따라하게 되었어요. 저는 굉장히 내향적이고 발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학생이었어요. 교수님이 발표를 시키셨는데 발표하기 싫어서 덩치 큰 애 뒤에서 숨고 그랬으니까요. (웃음) 그렇게 소심하고 부끄럼 많이 타는 애가 아나운서로 변신하기 위해서 평상시에도 아나운서처럼 행동하는 것을 많이 연습하고 노력했죠. Q. 20년이 넘는 아나운서 경력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프로그램, 행사가 있다면? 뉴스 진행을 한 지 10년이 넘던 어느 날, 스튜디오에서 생방송 대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공허감을 느꼈어요. 항상 보도하는 내용은 정치분쟁, 살인사건, 갈등, 경제 불황 등 부정적이고 심각한 소식들이었고, 이에 저 스스로도 지치고 나태해졌어요. 그런 상황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시작한 게 바로 행사 진행이었어요. 행사진행은 뉴스보도와 다르게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즐거운 소식을 전해주니 저도 즐겁더라고요. 그렇게 꾸준히 행사진행을 하다 보니 좋은 기회들을 잡을 수 있었어요. 일례로, 이명박 대통령 때부터 윤석열 현 대통령까지 대통령 초청행사를 도맡아 진행하고 있어요. 국가원수를 모시고 행사를 진행한다는 게 저에게는 많은 자신감을 주고, 책임감을 주기도 한답니다. 많은 행사 중 특히 기억에 남는 행사를 꼽아보자면 6.25참전용사 초청 행사인데요. 자기 나라도 아닌데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전쟁에 참전하는 건 어려운 일이고 값진 일이거든요. 어린 나이에 죽을 각오로 싸우면서 지켜낸 우리나라의 현재모습을 보여드리면서 그들의 희생이 가치 있었음을 직접 보여드리는 행사기에 의미있고, 그 행사를 10년 넘게 진행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껴요. 희생에 대한 보은을 할 수 있는 뜻깊은 행사이고, 이를 제가 진행한다는 것도 굉장한 영광이고 자랑스러운 일이니까요. Q. 아나운서의 길을 꾸준히 걸어 나가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가요? 새로운 사람들 만나고 도전을 좋아하는 성향이 저에게 원동력이 돼요. 새로운 도전이 새로운 인연, 새로운 길을 만들어 주는 경우가 많거든요. 에피소드를 하나 예로 들자면, 제가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결심하게 된 이후, 학교에서 언론계 진출한 선배님들을 수소문했거든요.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저의 지금 남편인 왕종명 기자예요. 앞서 말했듯, 아나운서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도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제 성격 덕이기도 해요. 주변 친척들에게 수소문하고 도움을 청해서 아나운서의 삶을 간접 경험해보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된 거니까요. 도전이 가져올 결과보다는 도전하는 과정을 중시하게 되면, 도전 자체를 즐기게 돼요. 그리고 그 도전이 저에게 새로운 인연, 새로운 길을 맞게 하는 것 같아요. Q. 아나운서이기도 하지만 (주) YA의 경영자시죠, 어떤 회사인가요? YA는 아나운서 에이전시예요. 예전에 아나운서란 직업에 대해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어요. 아나운서는 백조와 같아요. 백조처럼 겉모습은 아름답지만, 그 품위있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엄청난 발버둥치기가 필요한 것처럼 많은 한계에 부딪히곤 해요. 아나운서도 결국은 직장인이고, 월급도 높지 않은 게 현실이예요. 이러한 아나운서의 실상에 한계를 느끼게 되고, 나의 3,40대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뭘 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후배들을 위한 스피치, 커뮤니케이션 강의를 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회사를 차리게 되었고, 후배들을 제자로 양성했어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아나운서라는 직업은 그 수명이 매우 짧아서 방송 출연 하나하나가 소중해요. 제자들이 좀더 방송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만들어 주고자 고민 한 끝에, 아나운서 에이전시까지 도맡아서 하게 되었어요. 아들을 낳고 3주만에 바로 회사를 차리게 되었죠. 현재 15년째 회사를 경영해오고 있습니다. YA는 스타트업이기도 해요. 대면 강의, 행사가 전면 취소되면서, 이 코로나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까 고민하던 찰나에 성균관대학교와 창업진흥원이 만든 초기창업패키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후, 법인을 세워서 AI 보이스 진단 플랫폼을 만들었어요. 목소리를 진단하고 음색, 발음, 성량을 객관적인 지표에 따라 정량평가해주는 서비스로, 곧 출시 예정이예요. 커뮤니케이션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목소리인데, 좋은 목소리를 평가하는 것도 대부분 주관적인 평가잖아요. 이 서비스를 통해서 자신의 목소리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개선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입니다. Q. 영어영문학과 96학번 윤희정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저는 모범생에 속하는 편은 아니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공부를 1도 안 했어요. 홍보모델 일 하면서 학교를 잘 안 나왔으니까요. (웃음) 그나마 학교에 왔던 때는 중어중문학과 다니던 제 가장 친한 친구를 보러 중앙도서관 입구에서 기다리던 때였네요. 방송활동을 2학년 때부터 시작하니까 학교 생활을 소홀히 했어요. 3학년 2학기가 되던 어느 날 학교에서 전화가 오더라고요. 3학기밖에 안 남았는데 졸업하려면 60학점이 넘게 모자라다는 연락이었어요. 그 때 마침 제가 출연하던 아침 프로그램이 폐지가 되고, 졸업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로 돌아왔죠. 다른 친구들은 졸업학기에 6학점 들을 때 한학기에 26학점씩 계절학기까지 다 들어가면서 학점 채우기에 열중했어요. 그렇게 1년 반을 열심히 공부해서 143학점을 다 채웠죠. 졸업할 때 모든 교수님들이 기립박수를 치시더라구요. (웃음) 하지만 저는 제가 이렇게 대학시절을 보낸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비록 학점에 열중한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 대신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제 진로와 적성을 찾아내고 제가 앞으로 살아갈 길의 방향을 정했거든요. 그래서, 후배들에게는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해주고 싶어요. 알리미 활동으로 시작해, 홍보모델, 방송출연까지 새로운 것에 계속 도전해보니까 나 자신을 알아가게 되었어요. 진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20대들이 많을 거라 생각해요. 저는 이 친구들에게 학점보다는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게 중요하고, 그럴 수 있는 시간이 20대가 유일하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Q. 20대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 인생의 가치 “다양한 경험을 최대한 많이 해라.” 이렇게 말해주고 싶네요. 저도 학교에 애착을 갖기 위해 시작했던 알리미가 제 인생에 큰 터닝포인트가 될지 몰랐어요. 하지만 새로운 기회에 계속해서 도전하다 보니 저에게 맞는 적성을 찾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학점에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도 애기해주고 싶어요. 학점보다는 많은 경험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하고, 내 인생에 있어서 그럴 수 있는 시간이 20대 밖에 없어요. 그러니 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만끽하는 멋진 20대를 보내세요. 응원합니다!

  • 세상을 보는 문의 문지기, 기자의 삶

    행정학과 85 이용문 동문

    세상을 보는 문의 문지기, 기자의 삶

    Q.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CBS 정치부장으로 일하고 있는 이용문입니다. 행정학과 85학번입니다. 졸업 후 CBS에 입사해 경찰기자, 금융기자, 검찰기자, 정부부처 출입기자를 거쳐 경찰캡, 청와대 팀장, 여당팀장, 국회팀장, 재계팀장에 이어 정치부장과 산업부장, 경제부 선임기자로 일했고, 올봄부터 다시 정치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Q. 성균관대 언론인 동문회는 뭔가요. ‘성균관대 언론인 동문회’는 언론계에 종사하고 있는 성균관대 동문들의 모임입니다. 경향신문과 국민일보 등 중앙일간지, 매일경제와 머니투데이 등 경제지, 연합뉴스와 뉴스1 등 통신사, KBS와 MBC 등 방송사에 재직중인 기자와 PD, 아나운서 등 500여명이 회원으로 있습니다. Q. 행정학과 85학번 이용문은 어떤 학생이었나요? 저는 아주 평범한 행정학과 학생이었지요. 입학 후 2학년까지 마친 뒤 현역으로 입대해 병장으로 제대했고 3학년과 4학년 시절을 주로 도서관에서 보낸 전형적인 행정학과 학생이었어요. 물론 모든 행정학과 학생들이 도서관에서 보내진 않았을 거지만요. (웃음) Q.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동기는 무엇인가요? CBS에 입사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를 방문해 중앙도서관 앞에서 학과 후배 J 씨를 비롯해 선후배 몇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자리에서 그 후배의 말은 이랬습니다. “형이 기자 될 줄 저는 알았습니다”. 아마도 학창시절 제 말과 행동, 성향에서 그런 예감을 가졌던 모양입니다. J씨의 예감과 같은 제 속에 있는 어떤 속성이 기자가 된 동기일 수 있습니다. 행정학은 영어명칭이 public administration이죠. 공공의 영역에 대한 공부를 주로 한다고 생각하는데 기자라는 직업은 공직이나 교직을 제외하고 가장 공공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기자가 된 동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오랫동안 기자를 할 수 있는 원동력, 기자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초년병 시절인 1996년 우리 사회에는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공권력 앞에서 일주일을 굶으며 버텼다는 ‘연세대 한총련사태’나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2006년에서 2007년 사이에 진행됐던 ‘한미 FTA협상’ 등 역사적인 현장을 직접 보고 기사를 쓸 수 있는 것이 기자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도되는 것이 아니라 ‘날 것’으로서의 현장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기자의 가장 큰 장점이고 그런 현장을 보는 것을 좋아하는 제 성격이 27년 기자생활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Q. 기자라는 직업이 가지는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제 딸 아이가 2018학번으로 올해 대학 졸업반인데 중학교 시절 “저는 기자 안 할래요. 엄마랑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라는 말을 한적이 있습니다.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가족의 여가생활을 돌보지 못했다는 반성 때문이었죠. 모든 출입처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경찰이나 검찰, 정당 출입기자들에게는 언제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 불규칙한 생활이 본인이나 가족들이 겪는 큰 어려움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맡는 일에 대한 책임감이 중요합니다. 또 휴일을 지키지 못하는 데 대해 가족의 이해를 구하고 평소에는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Q. 기자님의 관심분야는 무엇이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는 ‘에너지’입니다. 주된 에너지는 시대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하지만 기본적으로 현대인이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에너지고 이런 에너지의 확보가 정치와 경제적 분쟁의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Q. 오랜 기자 생활을 통해서 느낀 기자라는 직업이 갖는 가치는? 기자 개인이 갖는 가치라기 보다는 기자들이 하는 보도행위의 총합, 그것을 통해 형성되는 언론이라는 기능이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의 작은 한 부분을 저도 담당하고 있다는 자존감과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보도행위라도 그것이 모이면 큰 작용을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Q. 기자가 되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나요? 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언론사에 입사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겠지요. 모든 입사시험이 마찬가지지만 그 시험의 단계별로 요구하는 능력, 예를 들면 어학능력, 상식, 글쓰는 능력, 발표하고 토론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각 단계를 통과하지 못하면 그다음 관문으로 갈 수 없기 때문이죠. 또 기자라는 직업을 목표로 세웠다면 평소에도 신문과 방송 보도를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보통의 시청자나 독자보다는 더 깊은 관심 말이지요. 많이 보고 읽어야겠지요. 특히 사회와 국가, 세계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갖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Q. 언론계에 먼저 진출하신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는 것이 최고”라고 하지요. 인터뷰 전반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공적인 영역을 다루는 ‘행정학’을 공부했고 공직에 입문하지는 않았지만, 언론은 나머지 직업 영역 가운데 ‘가장 공적인 업무’라는 관점에서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라는 말이 요즘 시대와 잘 안 어울려 보일 수 있지만 무엇인가에 ‘열심히 몰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심히 몰두해 보시기 바랍니다.

  •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공학도의 이야기

    화학공학/고분자공학부 교수 김진웅 교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공학도의 이야기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화학공학/고분자공학부 김진웅입니다. 저는 한양대학교 공업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아모레퍼시픽 기술연구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아모레퍼시픽 재직 중에 하버드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박사후 연구원 과정을 밟았습니다. 2011년부터 한양대학교 응용화학과에 임용되어 재직하다가 2019년 9월에 우리 대학으로 이직했습니다. 현재 콜로이드 및 계면공학연구를 수행하는 바이오헬스소재연구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2022 과학기술진흥유공자 대통령표창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간단한 소감을 여쭙고 싶어요. 저는 지난 20여 년간 피부조직공학 및 생리활성 강화를 위한 기술개발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마이크로플루딕스 (microfluidics) 상용화 (Hera Aquabolic 제품 적용, 2009년)와 단분산성 거대 액적 대량생산 기술 개발(Chanel Hydra Beauty 제품 적용, 2015년)과 같은 사업화 성공 사례들을 얻게 되었고 이러한 부분을 인정받아 과학기술진흥유공자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축적한 연구개발 경력을 바탕으로 앞으로 국가 바이오의료분야 기술경쟁력 강화를 위해 더욱 힘써 달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1학기가 끝이 났습니다. 연구자이자 교수자로서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수업이 없어서 시간적 여유가 생긴 만큼 연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어 좋습니다. 저는 기초연구와 동등한 연구비 수주 수준에서 기업들과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피부를 타겟으로 연구를 하고 있어서 화장품 기업들과의 연구교류가 특히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화장품산업은 늘 새로운 마케팅 트렌드를 추구하거든요. 기술도 트렌드가 있어서 요즘 이슈가 되는 기술을 피부과학의 관점에서 조속히 검증하고 실제 제품에 적용하고자 하는 연구를 최근 심도 있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도전적이지만 기업들과 실질적인 개발업무를 하는 것은 정말 즐길 만 합니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산업융합촉진 옴부즈맨을 역임하셨다고 들었어요. 옴부즈맨 활동은 어떠셨나요? 우리 정부는 소관부처보다 상위기관으로서 규제개혁을 탑다운 방식으로 추진하는 국가 옴부즈만조직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 옴부즈만, 외국인투자 옴부즈만, 산업융합촉진 옴부즈만이 바로 3대 국가 옴부즈만입니다. 저는 산업융합촉진 옴부즈만으로서 2018년부터 2021년까지 3년 동안 국가 신산업의 규제개혁을 주도하였습니다. 기업들이 개발한 혁신 신기술들이 낡은 법과 규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장되는 안타까운 일이 다수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하고자 직접 기업의 애로를 듣고 규제를 선제적으로 개혁하여 신산업이 시장에서 제대로 자리 잡고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저의 지식과 경험이 옴부즈만으로서 국가 신산업에 도움을 줄 수 있었기에 힘든 직책과 업무였지만 큰 보람을 느낀 활동이었습니다. 과거 아모레퍼시픽의 연구원으로 재직하셨습니다. 기업에서의 ‘연구원 생활’ 은 어떠셨나요? 건강과 미를 위한 연구를 제대로 하려면 아름다운 마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고 당시 기술연구원장님께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로부터 화장품을 개발하는 사람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소비자들이 항상 찾는 명품 화장품들은 가격으로 가늠할 수 없는 큰 가치를 품고 있습니다. 그 가치를 조금 더 향상시키기 위해 피부생리활성과 피부보호에 효과적인 신기술을 개발하고, 수백 번 처방을 만들어 하나의 히트상품이 나옵니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개발을 직접 경험하며 진정 고객을 위한 연구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이오 헬스’ 분야에서 활발한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계신데요. 진행하셨던 연구 한 가지만 소개해 주세요. 제 연구 중에 가장 큰 성과는 “단분산성 거대 액적 대량생산 기술 개발”입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1 mm 정도의 직경을 갖고 모두 동일한 크기를 갖는 에멀젼(emulsion)을 대량으로 제조하는 기술입니다 (그림 참조).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유일하게 하버드에서 특허를 갖고 샤넬에서 상품화한 기술입니다. 이 기술이 어려운 이유는 에멀젼 액적은 클수록 서로 붙어서 하나가 되려는 거동을 하기 때문에 쉽게 상분리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 현상은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열운동을 할 수 있는 크기 수준으로 액적을 충분히 작게 만들면 이 현상을 막을 수 있지만 계면활성제를 이용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한계를 지극히 물리적인 접근으로 해결하여 계면활성제 사용없이 안정한 거대 액적을 제조했습니다. 또한 다채널 마이크로플루딕스 (muti-channel microfluidics)를 이용하여 대량생산까지 성공했습니다. 하버드대(미)-ESPCI(프)-Capsum(프)이 산학연계하여 연구개발 상용화를 5년에 걸쳐 진행했고 현재 샤넬 이드라 뷰티 (Chanel Hydra Beauty) 라인으로 판매되고 있습니다. 기초연구-원료양산기술-제품화기술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 기술개발까지 성공한 사례입니다. 원천 특허 보유자로서 면세점이나 백화점에서 제가 개발한 제품이 판매되는 것을 볼 때마다 참 뿌듯합니다. ▲ 에멀젼 제조 기술로 제작된 샤넬 이드라 뷰티 라인 제품 (출처: 샤넬 공식 홈페이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한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삶의 원동력, 인간 ‘김진웅’ 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하버드대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하는 동안 연구 욕심이 많아 지도교수님과 늦은 시간에도 미팅을 자주 했습니다. 논문 교정을 하시던 교수님께서 갑자기 “너는 연구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우주평화를 위해서라고 웃으면 대답 했지만 솔직히 깊이 있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인류를 위해서다” 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시는데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연구에 대한 아무런 철학없이 실험하고 논문만 쓰려고 했구나’ 하는 생각에 창피한 마음도 들었고요. 그때부터 저는 ‘나의 연구가 어떤 식으로든 사람과 이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자’ 라는 다짐으로 살아가고 있고, 늘 진정성 있고 실용적인 연구결과를 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저희 연구실 학생들에게도 자주 하는 이야기에요. 지금껏 큰 성과들을 많이 일구어 오셨는데요. 앞으로의 계획이 듣고 싶어요. 요즘 생활환경이 악화되면서 피부 기능이 점점 저하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좀 더 건강한 피부조직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최근 출시되는 피부외용제품들이 피부의 근원적 기능을 회복하는 성능을 소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연구실에서도 피부조직 재생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바이오소재 개발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생물에서 직접 얻은 천연소재를 이용하기 때문에 기술성능과 안전성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박테리아 유래 천연 나노섬유를 이용한 계면활성제 및 피부접착제 개발, 미세조류 유래 천연엑소좀 (exosome, 그림 참조)을 이용한 피부상처치유 기술개발이 해당됩니다. 앞으로 피부조직재생에 대한 심화된 연구개발을 통해 보다 건강한 피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예정입니다. 마지막으로 화학공학/고분자공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전하는 한마디. 공학도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취업과 진학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우리 학생들이 공학도 본연의 역할을 염두에 두고 공부를 한다면 삶에 대한 목표가 분명해지며 적극적이지 않을까 합니다.

  • ‘동사’의 꿈을 찾으세요

    사학과 90 최태성 동문

    ‘동사’의 꿈을 찾으세요

    Q.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성균관대학교 90학번 사학과 최태성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Q.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90학번 최태성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제 학창시절 별명이 사문난적이었어요. 이건 흑역사인데, 저희 과 친구들이 저를 이렇게 불렀어요. 우리 사학과와는 색깔이 다른 이질적인 친구라는 뜻으로 이 별명이 붙었는데요. (웃음) 저는 대학생활 중 취업, 학업 관련 불안감이 커서 새벽부터 중앙도서관에서 토익이나 토플 같은 영어공부를 많이 하고, 학교 생활보다는 학점관리에 열중했었죠. 제가 성대를 다니던 시절은 80년 항쟁의 끝자락에 있어서 여전히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남아있을 시기였고, 제 동기들은 광장으로 나섰어요. 하지만, 저는 그렇지 못하고 도서관에 박혀 있어서 친구들이 ‘사문난적’이라고 별명을 붙여주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마음의 빚이 있어요. 친구들과도 함께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의논하고 고민하지 못하는 대학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나중에 내가 성공하면 과거 못했던 것들에 동참해야겠다고 다짐했었어요. 물론 비겁한 변명처럼 들리긴 하지만, 그 생각을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하고 있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이 살다보면, 제가 그 무리와 함께 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양상이 크게 두 가지가 나타나는데, 하나는 자기합리화를 위해서 완전히 등을 돌려버리는 거예요. 또 다른 하나는 상대방을 영원히 지지하는 모습으로 남는 거죠. 저는 그래도 전자보다는 후자 쪽에 속해요. 그 당시 저와 같이 대학을 다녔던 동기, 선후배분들이 우리 사회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그들의 시간을 내어주었던 것을 저는 아직 잊지 않고, 그들을 영원히 지지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Q. ‘별별한국사 연구소’를 통해서 많은 기부 및 선행을 실천해오고 계신데요, ‘별별한국사 연구소’를 소개해주세요. 이름의 유래는 정말 간단한데요. 제가 큰 별쌤이니까. 중의적 의미로, 모든 별의별 역사를 다 공부하고. 큰 별과 별님들이 함께 하는 한국사. 이런 뜻으로 ‘별별한국사연구소’라고 이름지었어요. 요즘 한국사 능력검정 시험을 응시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잖아요. 그 시험을 준비하는 분들께 공부할 수 있는 영상을 무료로 공유하는 일종의 공장이죠. 제가 공유교육에 관심이 있는지라, 누구나 다 같은 양질의 교육 컨텐츠를 공부할 수 있도록 공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도 작가로서 책도 쓰고, 방송 출연도 하고, 강연도 하고 있는데, 한마디로 한국사 컨텐츠 공장이라고 설명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Q. 성균관대학교 모교 기부, 사랑의 열매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유튜브 활동을 통해 얻은 수익금 기부 등 선행을 꾸준히 이어오시고 계신데요, 나만의 기부 철학이 있다면? 전 사실 가장 평범하고 계산적이고 어찌 보면 이기적인 사람인 것 같아요. 제가 초, 중, 고, 대학생활을 너무 가난하게 살아오다 보니까 본능적으로 계산이 돼요. 저도 그게 싫은데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나한테 유리한건지 아닌지를 계산하게 되는 본능이 있어요. 어린시절부터 생존을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기에, ‘기부’가 이기적인 본성을 가진 저에게는 결코 익숙한 것은 아니에요. 저에게 있어서 기부는 천성이 아닌 노력의 결실이죠. 어떻게 보면 자연스럽고 익숙하지는 않지만, 저는 이렇게라도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기부가 삶에 자연스레 녹아있는 존경스러운 분들이 많은데, 저는 이게 잘 안돼요. 그래서 저는 ‘기부’라는 약속을 할 때 저를 내세우지 않고 저와 함께하는 수험생들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야 강제성이 생기기 때문이죠. 약속을 하면 그건 누군가와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고, 이를 통해서 계산적인 저의 본성은 사라지게 되고 저를 움직이는 연습을 하는 거예요. 혹시나 연습을 꾸준히 하다 보면 저도 언젠가는 기부가 자연스러운 행동이 되진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갖고 꾸준히 기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Q. 왜 역사를 배워야한다고 생각하시나요? 본질적으로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살면서 막연하고 불안할 때 흔들리지 않고 한발한발 전진할 힘이 무엇인지와도 관련이 있죠. 우리의 삶의 여정이 힘든 이유는 끊임없이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는 과정때문이거든요. 우리는 ‘나는 왜 저걸 할 수 없을까’, ‘나는 왜 저곳에 갈 수 없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자꾸 줘요. 타인과 비교하게 되는 순간부터 불행은 찾아오는 거거든요.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비교는 오로지 자신과 하는 거예요.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나아졌는지, 내일의 나가 오늘의 나보다 나아질 수 있는지를 비교하는 거랍니다. 근데 우리는 이걸 잘 못하고 있어요. 이렇게 되면 자존감이 무너지고, 자괴감마저 생기게 되어버려요. 그렇다면 거기에 흔들리지 않는 법, 혹은 나를 보호하고 나를 아껴줄 방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과거 나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거예요. 선조들의 고민과 선택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자신의 고민과 선택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습하는 거죠. 따라서, 저는 역사를 배우는 본질적인 목적은 나만의 색깔을 찾고 뚜벅뚜벅 걸어 나갈 힘을 가짐으로써 행복해지기 위함이라고 생각해요. Q. 대립과 갈등이 만연한 현대사회, 역사가 그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죠. 각 시대마다 그 시대가 해결해야할 과제가 있어요. 개항기 시대 때는 신분제로부터의 해방, 일제강점기때는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 그리고 현대사회에는 가난과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가 있어왔죠. 이에 이어서, 저는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할 과제는 바로 증오, 혐오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이대남, 이대녀 이런 수식어들이 붙으면서 갈등과 혐오를 조장하는 정치문화가 형성됐어요. 원래 정치라고 하는 것은 갈등과 대립의 요소를 하나로 치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이것을 악용해서 표심만을 얻으려고 하는 모습을 통해서 사회가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그렇기에 우리 시대의 과제는 바로 이 증오와 혐오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역사는 이 과제에 어떤 해답을 제시해줄 수 있을까요?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면 300년 전의 예송논쟁 당시, 상복을 입는 기간에 대한 문제로 격하게 대립하고 심지어 정권교체까지 이뤄져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갈등하고 대립하는 모습이 300년 전의 예송논쟁과 매우 비슷하죠. ‘굳이 이런 것 가지고 싸운다고?’ 이러잖아요. 그렇다면 300년 이후 우리의 미래 후손들에게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까요? 우리는 여기서 과거를 직시하게 돼요. 역사적 관점은 우리사회의 뜨거운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서,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과 시선을 갖게 해주고, 이를 통해 우리 시대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에도 도움을 줘요. 이게 바로 역사의 쓸모죠. Q. “꿈이란 명사가 아니라 동사여야한다. 그리고 그 롤모델을 역사에서 찾으십시오.” 본인의 저서에서 이런 문구를 쓰셨어요. 최태성 동문의 역사 속 롤모델은 누구인가요? 제가 항상 롤모델로 꼽는 분이 있는데, 우당 이회영 선생이에요. 당시 한말,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땅값이 제일 비쌌던 명동은 이회영 형제의 소유였어요. 그들은 일제강점기에 엄청난 값의 명동 땅을 모두 다 팔아서 만주로 넘어가 3년만에 독립운동기지를 세웁니다. 3년 뒤 그들이 남긴 일기에는 너무 배가 고파서 옆집의 옥수수를 뜯어가는 장면이 등장해요. 저는 그 장면을 보면서 가슴이 먹먹하더라고요. 그리고 질문을 하게 됐어요. ‘그냥 시대에 조금만 타협하고 불의를 눈감았다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분들은 이런 인생을 사셨을까?’ 라고 말이죠. 그 답은 이회영 선생이 60년 평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있었어요.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이요. 우리는 인생이 한순간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것들을 인지하고 사는 삶과 그냥 사는 삶은 그 마지막이 전혀 다르다는 거예요. 우당 이회영 선생은 항상 선택의 순간에 스스로 자신에게 항상 질문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일생’으로 답하신 분이에요. 제가 감히 그분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저도 그 질문을 심장에 가지고 살면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이 있을 때 매일 다짐해요. 저 역시 이회영 선생의 따라쟁이라도 되고 싶으니까요. (웃음) 그래서 의사, 검사, 교사라는 ‘명사’의 꿈보다, 그 직업을 가지고 우리사회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동사’의 꿈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어요. Q. 최태성 동문이 소망하는 ‘동사’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이 10년에서 15년 정도 남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그 시간동안 내가 할 수 있는 ‘동사’는 무엇일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아요. 저는 살아갈 삶보다 죽음을 맞이하는 쪽에 더 가까워지고 있어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을지 고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예전에 세계사 학회에서 강연 할 때, 제일 안타까웠던 점이 학생들에게 사료로서 보여줄 영상이 별로 없다는 거였어요. 물론 지금은 역사를 다루는 유튜브나 여러 방송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들은 학생들의 교과과정에 맞는 영상은 아니더라고요. 그렇다고 직접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도 불가능하죠. 모든 학생들이 세계 곳곳의 유적지를 갈 수 있는 형편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학생들을 위한 역사 유적지의 생생함을 담은 영상이 있으면 좋겠다는 동사의 꿈이 생기게 되었어요. 바로 ‘세계사 교과서에 있는 고대 유적지들을 모두 방문하고 누구나 볼 수 있는 영상을 만들고 역사를 공유하는 것’. 이것이 제 마지막 동사의 꿈이에요. 덕분에 저도 세계 여행도 하고 그 결과물을 모두 함께 공유할 수 있고, 재밌을 것 같지 않나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공과 사가 합치되는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해요. 저는 이 동사의 꿈이 저에게 가장 행복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성균관대학교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응원의 메시지 성대에서 보낸 4년이라는 시간은 저를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원동력이었어요. 성대에 오고나서 비로소 저는 제 자신에게 “너는 누구야?” 라는 질문을 하게 됐어요. 제가 정말 사랑하는 동기, 선후배들과 술도 마시고 과방에서 이야기하면서, 세미나를 하면서, 그들과의 긍정적인 관계를 통해 제가 갖고 있던 껍질을 깨고 비로소 세상밖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생각을 통해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고, 성균관에서의 경험을 통해서 저의 가치관과 신념이 되었어요. 여러분들에게 성대는 어떤 존재인지, 여러분들이 성대를 다니는 이 시간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세요. 시간이 지났을 때, 여러분이 한 번씩 성균인으로서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성균관의 역사는 조선의 성균관부터 시작됐죠. 조선 성균관 유생들과 성대 학생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그들은 항상 사회가 정의롭지 않을 때 그에 대해 ‘아니야’라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우리 사회에 따듯한 시선을 가지고 본인들이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고민했던 그 성균관 600년의 역사를 지금의 여러분도 공유하고 있다고 확신해요. 그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에 여러분들이 지금 다니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그 600년의 역사를 이어서 쓰고 있는 자랑스러운 인재들이란 말이죠. 여러분들도 앞으로 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계속해서 써 나갔으면 좋겠네요. 응원합니다!

  • 정도(正道)를 걷는 삶

    상학과 58, 박영수 동문

    정도(正道)를 걷는 삶

    Q1.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상학과 58학번 박영수입니다. 효성물산, 선경 등을 거쳐 96년까지 진로그룹의 회장으로 재직했습니다. 2019년까지 본사가 스위스에 있는 은행에서 자문을 맡았으며, 현재는 은퇴하여 영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장학금을 전달하기 위해 이렇게 일년에 한번씩 모교를 찾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Q2. 요즘 어떨 때 가장 행복하신가요? 회장님의 취미가 궁금해요. 정도를 걸으며 사회에서 큰 몫을 하고 있는 후배들이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정말 흐뭇합니다. 그 친구들에게 선배님 소리를 들으며 근황을 나눌 때 행복하지요. 글쎄요 취미는 별 게 없는 것 같네요. 독서와 명상을 즐기고, 책은 주로 역사책을 많이 읽습니다. Q3. 모교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것 같아요. 해마다 학교에 장학금을 기탁하시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4·19 혁명 이후 부정 축재자를 처벌하는 과정에서 시멘트 회사인 대한양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장학재단인 삼일장학재단을 만들었고, 전국 대학을 상대로 많은 장학금을 주었습니다. 한달에 30만원. 등록금 내고, 하숙비도 내고, 책도 사서 볼 수 있는 큰돈이었지요. 서울대학교에는 모든 단과대학에 이 장학금이 주어졌고, 타 대학에는 3개에서 5개정도 배당되었고, 우리 성균관대학교에는 딱 두 명에게 이 장학금이 배당되었습니다. 문과에서 한 명, 이과에서 한 명 총 두명의 학생이 이 삼일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어요. 운이 좋게 그 혜택을 내가 문과 대표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학년 말부터는 특대생 혜택을 반납하고, 이 삼일 장학금을 받아 학교를 다녔습니다. 삼일 장학 재단에서 학부 졸업 후에도 2년 더 나를 지원해준 덕에 대학원까지 장학금으로 졸업할 수 있었어요. 총 6년간 장학금을 받아 졸업까지 하고 나니, 언젠가 내가 받은 것을 반드시 모교와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짐을 지금도 찬찬히 이뤄나가는 중입니다. 나는 성균관대학의 덕을 참 많이 봤으니까요. Q4. 대학 재학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학부 3학년 때, 4.19 혁명이 있었습니다. 우리 대학에서도 학생 시위의 움직임이 있었지요. 그런데 정부에 협조하는 운영위원회 녀석들이 학생들에게 공포심을 주면서 교문을 막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때는 돈 많고 힘이 세면 학생회장 시켜주던 때니까요. 그 광경을 보고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반드시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때 대의원회 의장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학생회가 행정부라면 대의원회는 입법부의 역할을 하는 기구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한 끝에 ‘학점 평점이 B학점 이상인 자만이 학생회장에 출마할 수 있다’ 라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인데, 적어도 그런 면에서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학생 대표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 법때문에 몇명이 사퇴를 했는지 모릅니다. 숙소에 찾아와 나를 때려죽이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당시 4개 단과대학의 장들이 모두 사퇴하고 단 한 명의 운영위원장이 남았어요. 그게 바로 지금 총동문회장을 하고 있는 류덕희에요(웃음). 내가 학교를 떠나고 나서는 이 법이 어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후배를 위해 학교를 위해 이거 하나는 만들고 갔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Q5.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막 나왔을 때 회장님은 무엇을 목표하고 계셨나요? 나는 원래 법대에 진학하고 싶었어요. 근데 내 형님께서 대학 원서를 쓰기 직전에 강력하게 상과 진학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라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나도 그런 형님의 말에 동의했고, 결국 상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지요. 이러한 배경이 있어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소명 의식이 있었습니다. 처음 사회에 나와서는 은행에 잠시 있었습니다. 그때는 은행이 가장 좋은 직장으로 손꼽히던 시대여서 내 뜻보다는 주변의 뜻으로 은행에 입사를 했어요. 하지만 내 길이 아니다 싶어 두 달 가량을 다니다 은행에 사표를 내고 효성물산에 입사시험을 봤습니다. 그때가 효성이 막 삼성으로부터 분리되어 첫번쨰 공개채용을 하던 때입니다. 61년에 졸업해 군대를 다녀왔고 63년 가을에 시험을 본 뒤 64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Q6. 뉴욕에서 일을 하셨고, 지금은 영국에 살고 계세요. 한국을 떠나 사는 것은 어떠신가요? 지금의 삶을 살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해외에 나가게 된 것은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랍니다. 뉴욕과 영국 모두 일 때문에 부름을 받아 간 것이지, 계획된 바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뉴욕에는 초대 뉴욕지사장으로 파견되어 5년간 근무하고 1976년 귀국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유공인수 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회사로부터 영국에 직접 가서 유공 원유 공급을 원활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고민이 무척 되었지만, 십 몇 년을 근무한 회사에서 도움이 간절하다고 하니 이를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잘 갖춰진 환경에서 아이들 교육에 신경 써보고 싶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고심 끝에 1981년 2월 영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러나 저러나 영국에 정착해 아들 둘을 잘 키워 결혼까지 시켰으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영국에 가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 중 하나가 어린 우리 아이들이었는데, 형제 둘이 모두 영국 최고의 명문 중등학교인 이튼 스쿨에 입학해주었어요. 작은 아들은 수석 입학, 큰 아들은 수석 졸업을 했지요. 생각해보면 아직도 기특하고 신기할 따름입니다. Q7. 우리에게 친숙한 맥주, '카스' 를 만드셨다고 들었어요. 제품 개발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처음에 진로에서 맥주 합작 추진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진로에는 오직 소주와 고량주 뿐이라 진로그룹의 수뇌부에서 사세 확장을 위해 나를 찾은 것 입니다. 후발 메이커인 진로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나 유럽의 맥주보다 질이 좋고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지는 브랜드와의 합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확실한 품질의 ‘쿠어스’ 맥주를 선택하게 되었지요. 처음엔 쿠어스를 설득하기 위해 직원을 보내 봤습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어요. 한국의 작은 소주 회사인 진로를 그들이 알리가 없으니 말이지요. 마침 위스키 브랜드 조니 워커의 회장이 내 옥스포드 경영학부 동창이에요. 그래서 주류 업계 거물인 그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내가 직접 찾아가 쿠어스와 함께 일하고 싶은 이유를 솔직하게 전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실제로 쿠어스에 찾아가 쿠어스가 제일 좋은 맥주라고 생각한 이유를 직접 전했습니다. 진심이 통했는지, 긍정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긍정적인 답변이라 함은, ‘좋은 물을 찾아라. 일단 좋은 물을 찾아오면 다음은 생각해보겠다’ 였습니다. 한번은 대차게 거절을 당했으니 이만하면 긍정적인 답변이지요. 미션을 받았으니, 그때부터는 질 좋은 물을 양껏 확보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런데 질 좋은 물을 양껏 확보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어요. 물의 양은 알 수 있다 해도 물의 질을 판단하는 기술력이 당시 한국에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조니 워커 회장에게 전화를 했지요. 상황을 설명하니 그 친구가 그럴 줄 알았다며 내게 힌트를 주었습니다. 그가 밝힌 비책은, 바로 소련의 과학자들을 찾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곧바로 소련으로 향했고, 그들에게 수원지 탐색을 부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곳을 찾아냈고, 그곳에서 카스가 탄생하게 됩니다. 카스Cass 라는 네이밍도 내가 직접 한 것이에요. C는 쿠어스의 C이고, 뒤에 오는 글자는 맥주를 개발한 사람의 이니셜을 따줬습니다. Q8. 오랫동안 리더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직접 그 자리에서 경험하며 깨달은 리더의 자질은 무엇인가요? 리더의 자질은 아주 간단합니다. 성실하고, 자신감은 충만하되, 상식이 통하는 인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일단 출발은 저자세에서 겸손해야 하지요. 그래야 성실할 수 있으니까요. 또한, 자신감을 기반에 둔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확신이 드는 때에 밀어 부칠 수 있는 사람만이 리더입니다. 또한 상식이 통한다는 것은 곧 정도를 걷는다는 것입니다. 정의롭지 못한 길에 미혹된다면 그것은 진정한 리더가 아니지요. 정리하자면 평소에는 저자세를 유지하되, 결단의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어야하며, 지속적으로 공부하고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Q9. 마지막으로 학교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한마디 제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있다면, 좀 더 일찍 귀국하여 국가를 바른 길로 이끌지 못한 것입니다. 비이성적인 판단이 난무하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감정과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를 바로잡고 희망찬 정도(正道)의 미래로 나라와 국민을 인도할 후배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인공위성 데이터와 인공지능 기법의 적용을 통한▼가뭄관측지도 제작 기법 개발

    건설환경공학부 교수 최민하 교수

    인공위성 데이터와 인공지능 기법의 적용을 통한가뭄관측지도 제작 기법 개발

    건설환경공학부 최민하 교수가 EBS 젊은 우주과학자 기획에 소개되어, 위성 관측과 가뭄 지도 제작 기술을 소개하였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가뭄에 의한 피해가 급증함에 따라, 기후변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기존의 기상 관측방법은 국지적인 기상 상황만을 파악할 수 있어, 넓은 지역에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가뭄을 관측하기에 많은 한계가 있었다. 이에 인공위성을 활용하여 수자원을 관측하고자 하는 다양한 연구가 수행되고 있다. 최민하 교수 연구팀은 오랫동안 인공위성을 활용한 다양한 수자원 관측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고, 특허 “인공위성 영상 자료를 이용한 동북아시아 가뭄지도 제작 시스템”을 등록하는가 하면, 세계적인 학술지를 통해 수자원과 관련된 지구 에너지 흐름, 환경 등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인터뷰 전문- 안녕하세요. 저는 성균관대학교 건설환경공학부 수자원전문대학원 그리고 수자원원격탐사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는 최민하입니다. 저희 연구실은 위성 영상을 주로 활용해서 전 지구적인 관점 특히 동북아시아 지점에서 물의 순환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EBS 2022. 06. 17. 젊은 우주과학자 기획 4편 – 건설환경공학부 최민하 교수 Q. 인공위성으로 어떻게 물의 순환을 관측하나요 위성 영상이 많이 발전이 되고 그런 인공위성들에 탑재된 센서들이 실제로 지표면, 그리고 여러 가지 인자들을 탐지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을 저희들이 데이터를 받아와서 우리들이 활용할 수 있는 그런 인자들을 개발하고 그런 것들을 또 활용해서 필요한 데에 해석하게 되는 거죠. Q. 위성 데이터를 토대로 '한반도 가뭄지도'를 만들었는데요 지구관측위성에서 나오는 자료들을 활용해서 2차원적 또는 3차원적으로 광역적인 동북아시아 전체에서의 가뭄 현상이라든지 그런 현상들을 조금 더 정확하게 예측하고 분석하는 그런 프로그래밍을 저희들이 특허를 냈었습니다. 그런 가뭄 현상들을 예측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되면, 실제로는 가뭄에 대응하기 위한 물의 양들을, 예를 들어서 저수지에 있는 물의 양들을 준비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실제로 조금 물을 아껴 쓴다든지 여러 가지 정책들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민하 교수 연구팀이 제작한 위성기반 한반도 가뭄지도 Q.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시아 가뭄의 특징이 있나요? 지금 특징은 플래시 드라우트(급성 가뭄)라고 하죠. 그러니까 가뭄이 되게 급박하게 생겼다가 급박하게 사라지는 그런 것들이 폭염과 같이 몇 년 전부터 폭염이 오면서 가뭄이 같이 생기거든요. 그런 현상들이 실제로는 농업적 가뭄(토양수분 부족)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수문학적 가뭄(지표수·지하수 부족)으로 발전을 하는데요. 실제로 토양수분이 급격히 감소한다든지 증발산이 급격히 (늘었다가) 감소한다든지와 같은 그런 현상들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플래시 드라우트에 대한 그런 연구들이, 필요성이 많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최민하 교수 연구팀이 관측한 동북아시아 가뭄의 변화양상 Q. 위성 이용한 기후 관측은 얼마나 발전했나요 한 오십 년 전에 지구 관측을 목적으로 과학 위성들이 많이 개발이 됐습니다. 지금까지 오십 년 동안 급격한 발전을 했고요. 여러 가지 다양한 센서, 다양한 위성들이 현재 약 5천 개 정도가 지구를 맴돌면서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데요. (위성궤도인) 500km, 600km 상공에서 지구 표면을 관측하려고 하면 대기를 통과하면서 여러 가지 오차라든지 여러 가지 왜곡들이 많이 생기게 되는데요. 그런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센서들을 더 다양한 각도로 개발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예를 들면, 날씨에 영향을 받지 않는 센서, 대기 보정이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센서, 여러 가지 다각도 방면에서 센서들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한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들이 있고요. 그런 데이터들을 빅데이터 형태로 같이 융합하고 재해석하기 위해서 인공지능이라든지 다양한 기법들 이 개발되고 같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Q. 인공위성 데이터 활용 연구, 왜 중요한가요 실제로 예전에는 데이터가 좀 부족해서 사실은 데이터가 되게 많이 아쉬운 실정이었는데요. 지금은 데이터가 없어서 분석을 못하는 그런 건 아니고요. 실제로 말씀하셨다시피 많은 데이터 중에 좋은 데이터들을 잘 선별해서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이 지금의 관건 중에 하나입니다. 제 생각에는 해외 선진국에 비해서 실제로는 위성이 아무리 좋은 센서에, 좋은 탑재체가 있어도 사실은 그걸 활용하는 인재가 문제거든요. 새로운 인재들을 개발하는 그런 분야에 조금 더 역량을 쏟으면 우리도 좋은 결과를 내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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