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대 사학과 총동문회 <br> 춘계답사

성균관대 사학과 총동문회
춘계답사

  • 328호
  • 기사입력 2015.07.16
  • 편집 김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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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03학번 김지연

봄은 늘 변덕이 심하다. 잔뜩 기대감을 가지고 두꺼운 외투를 벗게 하다가도, 느닷없는 비바람으로 덜덜 떨게 만들기도 하니 말이다. 봄의 변덕이 잠깐 멈춘 볕 좋은 4월의 어느 날,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동창회는 춘천으로 춘계답사를 떠났다. 사학과 동창회 답사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1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진행된 전통이 있는 답사이다. 최고 58학번에서 가장 젊은 88학번까지 긴 세대가 함께 어울리는 화합의 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자도 본교 사학과 졸업생이지만, 이번에는 사학과 동창회 조교로서 참석하였다. 지금부터 춘천에서의 답사장소를 몇 군데 소개해보고자 한다.

우리의 답사는 늘 지하철 동대입구역의 한 빵집 앞에서 시작된다. 아침식사와 간식 등 먹을거리가 풍성하게 제공된다. 답사는 눈도 배도 모두 배불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모토다. 춘천으로 가는 경춘가도는 막힘이 없었고 날씨 또한 화창했다. 탑승한 지 얼마 걸리지 않아 첫 번째 답사장소인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에 도착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의병장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의암 유인석 선생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문하의 유생들을 이끌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의도를 간파하여 저지하려는 활동들을 하였다. 또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김홍집이 이끄는 친일내각이 성립되자 의병을 일으켜 봉기를 모의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선생은 을미사변과 복제개혁, 단발령 등이 내려지자 유림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던 을미의병의 선봉장으로서도 활동하였다. 그러나 대규모 공세를 가했던 관군에 결국 패했고 서간도로 망명하여 활동하였으며, 국권을 빼앗긴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연해주에서 병사하였다.

의암 선생 유적지는 의암기념관, 영정각(의열사), 충효지(연못) 정자, 추모광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선생의 묘를 중심으로 사당과 기념관이 있고 주변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어 선생의 학덕과 민족정신을 기리기에 더없이 어울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신숭겸 장군의 묘는 지금까지 알려지기로 모두 열 개다. 도굴을 두려워하여 구월산과 팔공산에 각 세 개의 가묘를 지었고, 두 개의 도굴방지용 가묘를 포함한 세 개의 묘가 있는 춘천에는 신숭겸의 몸이 묻혀 있다. 그리고 신숭겸의 고향 전남 곡성군 태안사에는 그의 머리가 묻혀 있다고 전한다. 신숭겸의 출생지인 곡성군 용산재에는 신숭겸의 목이 안치되었다고 한다.

신숭겸 장군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홍살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연꽃이 피는 비룡지와 광인문을 지나서 전사청이 있고, 다시 우측의 충열문을 들어서면 제사를 지내는 장절사와 신도비, 기념비 및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길목마다에는 이제 막 개화를 시작한 여러 꽃들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는데, 꽃과 함께한 그 날의 추억을 기억 뿐 아니라 사진에도 보관하려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들이 보였다. 숭고한 장군의 정신을 기리는 데 자칫 방해가 될까 상춘객 모드는 잠시 접어두고 서둘러 묘역으로 올라가 보았다.

평산 신씨의 시조인 신숭겸 장군의 묘역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명당 중 하나라고 하는데 울창한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탁 트인 묘역을 보니 과연 그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저항 없이 온 몸으로 맞으니 머릿속에 묵은 생각들이 순식간에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요즘은 예전보다 석, 박사 학위 소지자가 많아져 그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고 있지만 필자와 같은 대학원생들은 그러한 학위에 대한 열망이 다른 사람들 보다는 강한 것 같다. 이 마을은 평범한 춘천의 한 농촌 마을이지만 ‘박사마을’이라는 이색적인 간판이 붙어있다. 그 이유는 이곳이 우리나라에서 단위 인구 당 박사가 가장 많이 나왔기 때문이란다. 그 기운을 필자도 한번 받아보고자 마을 입구에서 잠깐 하차하였다.

박사마을에서는 1968년 송병덕 박사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110여 명의 박사를 배출했다고 한다. 한승수 전 국무총리도 박사마을이 배출한 인재 중의 한 명이며, 1999년 서면이 박사마을로 전국에 알려지면서 마을 입구에는 ‘박사마을 선양탑’을 세워 기념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독 왜 이 마을에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많이 배출되는 것일까? 그에 대해서 우리와 동행했던 한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박사 마을은 정동향을 하고 있어서 춘천 지역에서 아침 해가 가장 일찍 비치는 곳이라고 한다. 해를 안고 일터나 학교로 가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서산에 지는 해를 안고 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부지런했다고. 박사마을이라 해서 우리나라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박사를 배출한 것도 태양의 정기를 받으며 부지런하게 생활했기 때문이라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서 해가 뜰 때 일어나 공부를 시작하고 해가 질 때 비로소 공부를 마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불변의 훌륭한 공부습관인가보다. 어김없이 선배들이 한 마디 하신다.

    “김 조교, 자네도 얼른 졸업해서 박사 코스 밟아야지!”

백번 맞는 말이지만, 아직 나에게 머나먼 이야기인 것만 같은 이유는 왜일까......

필자가 어렸을 때 아빠와 둘이 와본 청평사에 대한 기억은 유람선을 타며 보았던 소양호의 풍경과 산길 중턱에서 먹었던 감자전의 맛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소양호 선착장에서 청평사까지 이어진, 결코 가깝지 않은 오롯한 등산로를 오르다보면 어느새 더욱 가까운 부녀지간이 되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쉽게도 이번 답사에서는 배를 타고 들어가는 길 대신 차로를 택했다.

청평사는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오봉산(五峰山)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973년(광종 24) 영현선사(永賢禪師)가 창건하여 백암선원(白岩禪院)이라 하였다. 그 뒤 폐사가 되었다가 1068년(문종 22) 이의(李顗)가 중건하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으며, 1089년(선종 6) 이의의 아들인 이자현(李資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1327년(충숙왕 14) 원나라 황제 진종(晉宗)의 비가 불경 · 재물을 시주하였고, 1367년(공민왕 16)에 나옹(懶翁)이 복희암에서 2년 동안 머물렀다. 1555년(명종 10) 보우(普雨)가 이곳에 와서 청평사로 개칭하였고, 대부분 건물을 신축하였다. 사지(寺址)는 강원도기념물 제5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불전·회랑·문 등의 초석을 통하여 전성기의 규모를 파악할 수 있다. 문화재로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인 삼층석탑과 진락공부도(眞樂公浮屠)·환적당부도(幻寂堂浮屠) 등이 있다. 또한, 이 절에 있는 고려 선원(高麗禪苑)은 지금까지 밝혀진 정원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 경도(京都)의 사이호사(西芳寺)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여 년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내 기억 속에서 그저 산속에 있는 경치 좋은 절이었던 청평사는, 그 유래와 구조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둘러보니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짜임새 있게 가꾸어진 보석 같은 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百聞不如一見 百聞不如一行 百聞不如一覺 이라고 했던가.

‘직접 보고, 행하여 깨닫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번 답사에서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산행으로 인해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1년 반 동안의 임기 중, 조교로서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사학과 동창회 춘계답사. 답사를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점도 많았기에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시원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쉬운 마음이 크다.

2016년은 사학과가 창설된 지 70주년을 맞는 새로운 해이다. 더욱 다채로운 행사와 더 깊은 수준의 답사를 계획 중이니 더욱 많은 선배님들과 후배님들이 참석해서 지금보다 즐겁고 역동적인 답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다음 답사에는 조교가 아닌 03학번이라는 어린 후배로서 함께 하겠다는 마지막 인사, 그리고 그에 대한 답으로 선배들께서 건네신 덕담들은 훈훈했던 그 날의 기운보다 더 훈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