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도 여행기

나의 인도 여행기

  • 331호
  • 기사입력 2015.09.13
  • 편집 김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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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윤혜 신문방송학과(10)

지난 8월, 나와 내 친구는 말 그대로 ‘무작정’ 인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남들은 자기만의 ‘김종욱’을 찾으러, 혹은 인도의 종교적, 철학적 유인 때문에 떠나지만 나와 친구는 달랐다. 단지 ‘신기해 보여서’ 였다. 여느 때처럼 학교 앞에서 소주 한 잔(한 잔이라 쓰고 두 병이라 읽는다.)을 하며 우스갯소리로 “야 인도 여행이나 가볼까.” 했던 불씨가 커진 것이다. 그때 까지만 해도 몰랐다. 진짜 인도에 가리라는 것을.

여차저차 준비도 제대로 못 하고 책 한 권과 함께 떠난 여행. 인도는 중앙아시아에 있지만 우리나라와 공기부터 다른 나라이다. 콜카타(Kolkata) 공항에 처음 내렸던 순간 코를 자극하던 습하고 구리구리한 냄새가 아직도 비강에 머물러있는 것 같다. 콜카타 공항은 특이하게도 환풍기가 엄청나게 많았고, 짠바람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4시간 후 국내선 비행기로 델리로 넘어가야 했기 때문에 공항 노숙을 해야 했는데, 4시간 후 우리 머리는 짠바람에 말 그대로 떡이 되어 있었다. 어쨌든 우리의 본격적 일정은 델리에서 시작되었다.

-릭샤꾼은 사기꾼

아침 일찍 도착한 델리에서 우리는 사기를 당했다. 공항버스를 타고 시내에서 내린 순간 주위에 있던 릭샤꾼들은 마치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게 달려들기 시작하였다.

릭샤란 태국의 툭툭처럼 전기로 움직이는 인도의 가장 흔한 교통수단 중 하나이다. 특히나 여행객들에게 악명 높은 바가지와 사기 수법으로 소문이 나 있다. ‘유 프롬 꼬레아?’ 어설피 들려오는 ‘코리아’라는 말에 한 릭샤에 올라탄 것이 화근이 되었다. ‘빠하르간즈’로 가달라는 우리의 말에 릭샤는 허름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릭샤꾼은 이곳이 정부에서 운영하는 관광안내소라며 우리를 안내했고, 더운 날씨에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곳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소소한 행복감을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감도 잠시, 우리는 곧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빠하르간즈가 지금 큰 시위 때문에 통행이 금지되었다. 너네 혹시 빠하르간즈 내 숙소를 잡을 생각이라면, 우리가 더 좋은 숙소를 추천해 주겠다.’ 내가 그럴 리 없다며 의심하자 이내 뉴스를 보여주며 지금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며 우리를 계속해서 혼란에 밀어 넣었다. ‘아 인도에 온 지 반나절도 안됐는데 왜 벌써 이런 시련이 찾아온 것일까’만 되뇌며 친구와 4년간의 우정의 노하우로 쌓아온 눈짓으로 커뮤니케이션을 시작하였다. 여자의 육감이라고 하는 그 무엇인가에 대한 촉이 섰다. 불현듯 우리는 ‘아 이놈이 지금 사기를 치려는 구나’에 대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서로에게 전했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인데, 알고 보니 우리가 간 곳은 정부 운영이 아닌 사설 여행사였고, 시내의 릭샤꾼들과 거래를 통해 일종의 수수료를 주고받는 식의 사기였다.

다녀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인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진짜처럼 잘한다. 내츄럴 본 사기꾼들이다. 이렇게 말하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그들의 거짓말은 애교처럼 느껴졌다. 뭐랄까. 우리나라에서의 사기는 공금 횡령, 수치 조작처럼 스케일이 크다면 그네들의 사기는, 적어도 여행객들에게는 바가지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바가지를 씌워도 매우 쌌다.)

-길거리음식의 비극

나는 대체로 환경 변화에 둔감한 편인 줄 알았다. 해외에 나가도 불면증, 배탈 하나 없이 내 집처럼 편안히 있다 오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도는 나의 이 오만함을 철저하게 무너뜨렸다. 나흘 동안 화장실에서 소변인지 대변인지도 모를 것을 분출해냈고, 복통과 고열은 덤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길거리에서 사먹은 튀김이 문제였던 것 같다. 인도에서는 꼭 식당에 들어가서 밥을 먹으라는 사람들의 충고를 귓등으로 한 채, 솔솔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에 정신을 잠시 놓았음이 틀림없다.

이 사진을 찍고 인도인들에 뒤섞여 튀김을 먹을 때만 하더라도 마치 현지인이 다 된 기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흘 앓고 난 뒤에는 인도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에 눈길도 주지 않고, 식당에 들어가서도 파스타, 피자만 골라 먹었다. 나의 소화력에 대한 오만방자함이 큰코다친 기억으로 아직도 남아 있다. 참고로 친절한 호텔 주인들 덕에 약도 구하고, 메뉴판에도 없는 쌀죽을 먹을 수 있었는데, 이런 것들이 나에게 ‘인도향수병’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도시, 바라나시

보통 사람들이 인도 여행을 떠날 때, 열에 다섯 이상은 갠지스 강과 바라나시를 보러 떠난다고 한다. 갠지스 강은 인도인들에게 정신적인 ‘어머니’이자, 삶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성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카스트제도 특성상 모든 계급의 사람들은 윤회 사상을 기반으로 다음 생에 더 나은 계급으로 살아가고자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이 끝에 갠지스 강이 있다. 갠지스 강 가로 늘어선 화장터에는 쉴 새 없이 시체가 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우기가 아닐 때는 강에 등불과 뼛가루를 뿌리며 내세의 ‘더 나은 삶’을 기원한다고 한다. 불가촉천민이라고 일컬어지는 빨래하는 여인들이나 구두닦이 할아버지들, 걸인들은 평생 푼돈을 모아 죽음이 가까워지면 바라나시로 모여든다. 앞에 말했던 내세를 위해 당신 자신을 화장하기 위해서다. 또 만약 화장할 돈이 모자라면 시체를 태우다 말고 갠지스 강에 띄우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인도에 가기 전, ‘갠지스 강에는 시체가 떠다닌다’, ‘갠지스 강은 똥물이다.’ 이러한 부끄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바라나시는 내게 조금 더 의미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갠지스 강이 올려다보이는 가트 위쪽에서 갠지스 강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러한 생각을 했던 내가 민망할 정도로 인도인들은 갠지스 강을 성스럽게 여겼다. 사람이고 원숭이고 염소고 할 것 없이 황톳빛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는 것부터, 양치질하고 잠수도 하며 축복을 받은 듯한 그들의 성스러운 얼굴은 아직도 내 기억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이 말을 지인들에게 똑같이 해줬더니, 정확히 내가 직접 보기 전의 반응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 물은 성스러운 물이라고, 그들은 축복을 받았다고 설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직접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남은 이야기, 그리고 그리운 인도

처음엔 순전히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시작한 여행이 기억 속에 이렇게 강하게 남을 줄은 몰랐다. 밥 먹듯이 사기를 당하던 일, 길거리마다 어설픈 한국어로 뭐라도 팔아보려던 끈덕지던 인도 상인들, 덥고 습했던 날씨 덕에 샤워하는 동시에 땀이 흐르던 일, 물갈이 덕에 달리는 기차 안에서 6시간 동안 7번이나 화장실을 갔던 일, 무거웠던 배낭 등 힘들었던 기억이라 더 깊게 기억되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도라는 나라, 아니 여행지는, 여행객들이 다시 가고 싶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것 같다. 무질서 속에 숨어있는 나름대로 질서, 매연이 가득 찬 도로를 달리던 릭샤, 진실인지 사기인지 헷갈리게 하는 인도인들의 친절, 카메라를 좋아하던 어린아이들, 어느 식당을 들어가더라도 풍기는 향신료 냄새, 좁은 골목에서 개와 소, 염소,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던 모습 등 나의 오감이 인도를 기억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인도에 다녀온 지도 어언 4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글을 쓰다 보니 마치 어제 있었던 일 같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 글은 나의 여행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인도를 (여행지로서) 찬양하지 않는다. 숱한 영화나 수기처럼 독자들에게 인도로 떠나라고 떠밀지 않는다. 인도는 분명히 우리나라보다 위험한 나라이고, 여행하는 데 많은 주의가 요망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도에서 만난 혼자 온 여자아이는 위험한 상황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에게 인도란 흥미로운 나라이자 여행지였고, 어쩌면 20대의 마지막 ‘헝그리 여행’에 어울리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담담하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잘 전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이상 나의 인도여행기를 마친다.

위에서부터 빠하르간즈의 해질녘 모습, 아그라에서 만난 꼬마들, 3인용인 릭샤 한 대에 탄 일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