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대하는 마음가짐

여행을 대하는 마음가짐

  • 337호
  • 기사입력 2015.12.13
  • 편집 김혜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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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방학, 친구와 터키에 다녀왔다. IS의 테러 소식이 연일 보도되어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했고, 가족 없이 떠나는 장기간의 여행이라 나도 긴장이 되었다. 나는 평소에 만만하게 보이는 인상 때문인지, 길에서 설문조사, 홍보, 관상 보는 사람 등 갖가지 사람들에게 자주 붙잡힌다. 부모님의 걱정에 지인들의 조언까지 나는 경계심으로 가득 무장한 채 여행을 떠났다. 역시나 터키사람들은 지나치게 친절했다. 길을 물으면 직접 차로 데려다 준다고 했고 길에서 눈이라도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었다. 심지어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았더니 어깨에 기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경계심이 가득했던 나는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성격이 매우 좋은 내 친구는 경계심 하나 없이 같이 싱글벙글 웃어줬다.

주로 도시에서 관광을 하다가 이틀 간 내륙지역 투어를 위해 친구와 단둘이 야간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났다. 터키라는 치안이 안전해 보이지 않는 나라에서 한국인 하나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야간버스를 타고 간다는 생각에 나는 거의 뜬눈으로 12시간을 보냈다.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친구는 조금 할 줄 아는 불어로 옆의 여행객과 대화해 보겠다며 말 걸기 바빴다. 이러다가 정말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내가 긴장과 경계심으로 가득 찬 와중에도 주변에서 끊임없는 친절과 호의가 이어졌다. 다른 나라 관광객들도 나서서 터키어를 모르는 우리에게 통역을 해주고 짐 싣는 것도 도와주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경계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특히 투어 중에 터키 여행객 한 분이 계속 우리 옆에 맴돌며 여행 중 힘든 사연을 풀어 놓으셨다. 정말 뜬금없을 정도로 본인의 여행일기를 우리에게 말했다. 나는 내 가방을 앞으로 끌어안고 그분의 행색과 소지품을 살피며 우리에게 딴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무서운 밤을 보내고 호텔 가까이에 있는 작은 시골마을에 갔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현지인들이 소박하게 사는 마을이었다. 여유롭게 호수 앞 벤치에 앉아있는데 옆에 한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친구는 언제나 그랬듯 할아버지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영어를 못하셔서 서로 조금 할 줄 아는 불어로 더듬더듬 대화를 이어나갔다. 가만히 있던 나는 할아버지와 조금씩 말이 통하게 되고 한국을 아신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조금씩 대화에 참여했다. 정확한 의사소통은 안 되었지만 마을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도 해주시고 할아버지 자신의 얘기도 해주셨다. 도자기로 유명한 곳이라 도자기 구경을 하고 싶다 했더니 선뜻 할아버지 아들이 운영하는 가게에도 데려가 구경시켜 주셨다. 우리가 도자기를 보고 너무 좋아하자 할아버지도 덩달아 기뻐하시는 게 눈에 선하게 보였다. 우리가 가게를 구경하는 사이 할아버지가 조용히 따뜻한 애플티를 타 주셨다. 원래 같았으면 누가 주는 음식도 두려워서 안 먹었겠지만 할아버지의 진심이 느껴지는 호의에 정말 맛있게 먹었고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갈 길을 나섰다. 나와 친구는 숙소 쪽으로 가는 버스를 찾기 위해 계속 걸었는데 버스정류장은 보이지 않았다. 더위에 지쳐서 잠시 벤치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그 할아버지가 나타나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종이 한 장을 쥐어 주셨다. 조그만 쪽지에는 할아버지 집으로 보이는 주소가 적혀있었다. 뭐라고 설명은 하셨지만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마음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아쉬웠던 것처럼 할아버지도 우리와 헤어지는 게 많이 아쉬우셨던 것 같다. 주소를 적어 가져오신 것을 보고 우리를 이토록 생각하신다는 게 느껴져 정말 감사했다. 아까 헤어진 가게에서 꽤 되는 거리인데 여길 어떻게 찾아오셨나 하는 생각도 들고, 괜히 할아버지를 힘들게 한 것 같아 죄송하기도 했다. 그저 ‘땡큐’로 밖에 감사하고 감동한 마음을 표현할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우리가 버스정류장을 찾는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면서 따라오라고 손짓하셨다. 따라간 곳에는 주차되어 있는 할아버지의 오래된 차가 있었다. 그리곤 아무 말 없이 우리를 목적지 까지 태워주셨다. 흐뭇하게 웃으시는 할아버지에게 정말 감사했고 급하게나마 음료수로 우리의 마음을 표했다. 끝까지 사양하시더니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와 악수를 했고 그렇게 할아버지와는 작별했다. 그 할아버지와 작별하고 주소가 적힌 꼬깃꼬깃한 쪽지를 다시 본 순간 여행 동안 내 마음이 닫혀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행 내내 나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경계했다. 모든 호의에는 숨겨진 악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먼저 호의를 건넬 여유도 없었다. 내 안전을 지키기 바빴고 내 돈, 내 소지품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내가 여유 있고 안전할 때는 남들의 호의에 응했으면서 정작 낯선 곳에 오니 내가 거리감을 느꼈던 사람들의 차가운 모습과 같았다. 내 안전과 내 여행으로만 머릿속이 가득 차서 남들의 호의와 그들의 이야기는 머리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을 그때에야 깨달았다. 돌이켜 보면 짐을 들어준 관광객, 어디서 왔냐고 물어본 현지인, 맛있는 곳을 소개시켜준다던 사장님, 자신의 여행이야기를 풀어 놓던 아저씨까지 다 우리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내 경계심이 다 거절해 버린 것이었다. 내가 한 번 더 말을 붙이고 관심을 가졌다면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진심으로 우리를 대하고 호의를 베푼 할아버지를 통해 나도 닫혀 있던 마음을 열 수 있었다. 낯선 사람들에게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어갈 수 있었고, 말을 걸어오는 친절한 사람들에게 물 한잔을 건넬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경계하기 보단 그들을 관찰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조금만 대화를 나누어보아도 그들은 나와 별 다르지 않은 비슷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고 생각보다 공감대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서로 자신의 나라에 대해 소개하는 것이 재미난 것인지도 처음 알았다. 자기 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보며 느끼는 것도 많았다. 나와 다른 사람, 나에게 호의를 베풀 리 없는 남이라고 생각할 때는 그저 위험한 인물들에 불과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자 그들은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 좋은 추억을 선사한 사람이 되었고 더불어 나도 그들에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대학생이 되면 꼭 해봐야 할 것으로 다들 여행을 꼽는다. 주위사람들도 모두 다 가는 분위기라 나도 지금껏 별 생각 없이 여행을 다녔다. 하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사람들이 여행에서 배운다고 하는 것들을 나도 조금이나마 느꼈다. 정확히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열린 마음으로 다른 나라나 지역을 방문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생각하고 깨닫는 것들이 많았다. 열린 마음, 긍정적인 마음으로 여행을 할 때 더욱 보람차고 기억에 남는 소중한 추억이 될 것 같다. 곧 다가오는 겨울에도 새로운 마음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