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운동, 11월의 기억

선거운동, 11월의 기억

  • 363호
  • 기사입력 2017.01.11
  • 편집 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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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강지하(문정15)

지난11월, 선거운동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선거운동? 선거운동본부? 내게는 너무도 생소한 단어임에 틀림없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그렇듯 총학생회 선거는 나와는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정치적 사회 이슈가 대두되면서 자연스레 선거가 왜 중요한 것이고, 꼭 필요한 것인지 다시 한 번 깨닫곤 했지만 거기서 끝이었다. 투표를 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있었지만 그것이 무언가를 변화시킬 거라는 기대는 전혀 없었다. 특히 ‘머드축제’ 라는 꼬리표가 붙은 작년 총학생회 선거는 내 스무 살, 첫 투표를 실망시켰다.

‘누가 되든 알게 뭐야……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이렇게 생각했던 내가 선거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단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일 년간 함께한, 누구보다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온 선배가 부후보로 출마하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그들에게 진정성 어린 열의와 열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화려한 출마의 변을 늘어놓지 않고도, ‘학생 사회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해보고 싶다.’, ‘학우들을 대변하지 못했던 기존 총학생회 모습을 바꾸고 싶다.’며 진심 어린 고민을 나누는 모습에 함께하기로 한 내 결정이 옳았음을 직감했다. 이후로 나는 매일 아침에 하던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정책팀으로 참여했다.

선거운동본부(이하 선본)의 일은 생각보다 너무 많고 복잡하다. 선거운동을 진행하는데 세세한 선거세칙을 위반하여 징계 받는 일이 없도록 매사에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했다. 경고를3번 받게 되면 선본 탈락이기 때문이다. 현수막, 대자보, 정책 자료집, 리플렛……. 준비해야할 것이 끝이 없었다. 나는 선본 활동을 하는11월 내내 하루3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었다. 3일 동안2시간도 못 자고 일한 적도 있었다. 집은 자러 가는 곳이 아닌, 씻으러 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선본 생활을 하는 동안 내 하루 일과는 이랬다. 기상 후 집에 가서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12시부터 수업을 듣는다(그러나 계속 졸았다.). 6시부터 선본실에서 계속해서 일! work!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일한다. 정책 자료집을 완성하면 그 다음은1차 리플렛 준비, 1차 리플렛을 완성하면 또2차 리플렛 준비……. 3차 리플렛에 신문, 온갖 종류의 유인물까지 밀려드는 일감에 정신 차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이 때 친구들이 나에게 건네는 인사말은 ‘너 어디 아프니?’였다.

‘정책 무식자’, ‘선거 무식자’인 내가 학우들을 위한 정책을 고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학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탓에 학교 사정에는 밝았지만 정확히 총학생회가 어떤 정책을, 어떻게 고민해야하는지 접근 방법에 관해 혼란스러웠다. 우리는 우리 학교는 물론, 서울 주요 대학 총학생회 정책 자료집을 구할 수 있는 대로 전부 구해서 참고할 수 있는 정책을 찾아봤다. 학교 친구들, 관련 학교 부처는 물론이고 종로구청과 같은 학교 외의 기관에도 계속해서 만남을 잡고 우리의 정책에 대해 문의했다. 정책공청회가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에는 긴장감과 초조함,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밤낮 가리지 않고 준비한 정책이 낱낱이 까발려지고, 평가받는 자리라고 생각하니 부담감이 끝없이 밀려왔던 것이다. 정책공청회 당일, 수업시간에는 단1분도 집중할 수 없었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예상 질문과 답변, 관련 자료를 계속해서 정리했다. 7시 법학관 모의법정으로 향하면서 ‘준비한 만큼만 해내자. 할 수 있다. 파이팅!’ 이라며 모두가 결의를 다졌다. 실제 정책공청회는 생각보다 더 딱딱했고 긴장되는 자리였다. 끝나고 나니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정책’에 집중되지 못하고 후보자 개인의 일에 치우친 질문 세례만 오고 가는 모습에 공청회의 의미가 퇴색되어 안타까웠다.

그 후에도 강의실 지지유세, 기동선전, 문화선전 등 각종 선거운동에 참여했고 열심히 하면 할수록 당선을 향한 나의 바람도 점점 강해졌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투표 기간이 시작되고 나서 는 매일 투표 참관인으로 참여했다.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자리 인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건사고가 많았다. 인주가 잘 찍히지 않는 다거나, 인주 뚜껑이 열리지 않는 문제는 기본이었다. 야외 투표소의 경우 바람이 심해 기표소가 바람에 날아가기도 했고, 계절학기 수강신청 때문에 GLS를 이용한 신분 확인이 어려워 투표가 지연되기도 했다.

경영대, 졸준위 등 각종 투표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어 옆 투표소의 투표함에 넣어야 할 투표용지를 총학생회 투표함에 넣는 사고도 종종 발생했다. 작년, 평범한 일반 학생일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개표는 자연과학캠퍼스에서 진행됐다. 두 번의 새터 이후 생애 세 번째 방문이었다. 선본원들과 함께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율전으로 내려가는 길, 지난 한 달간이 떠오르며 많은 생각이 스쳤다. 당선에 대한 확신은 있었으나 그럼에도 남아있었던 불안감. 선본실에서 춤 연습하고 대자보를 쓰는데 열심이던 날들.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대강당에 앉아 개표소 한 곳씩 발표되는 결과를 지켜봤고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올해 들어 가장 뿌듯하고 행복한 감정을 맞이했다.

추운 날1분도 쉬지 않고 손발이 빨개지도록 유세를 다닌 후보들. 한 달 동안 집에 가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고생한 선본장들. 100장 넘는 대자보를 찍어낸 대자보 공장 팔만대장경팀, 매일매일 춤 연습 시키고 지도하느라 고생한 문선팀, 그리고 너무너무 고생한 내가 사랑하는 정책팀! 그 외 도와주신 모든 분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한 한 달이었기에 고생하면서도 행복했다. ‘그 시간에 공부를 더 해라’, ‘네가 후보자도 아닌데 왜 이리 열심히 하냐’는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선본에 함께 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 덕분에 어디서도 만나지 못할 소중한 인연들을 얻었다. 뜻깊은 시간을 만들어준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새로이 다가오는2017년, 제49대 성균관대학교 총학생회 ‘성큼’ 이 진심으로 2만 성균인들에게 ‘성큼’ 다가가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