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내가 배운 것 Ⅱ

길 위에서 내가 배운 것 Ⅱ

  • 379호
  • 기사입력 2017.09.13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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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장지영 프랑스어문학과 (13)

 2편. 순례길을 걸으며 깨달은 것들 - 사람에 대한 애정을 배웠다

인사를 나누고 우연히 알레자와 작은 동네 식당에서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알레자는 독일 한 보험회사에서 일 하는 회사원이었다. 여름휴가를 맞이해 늘 가고 싶었던 순례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하지만 걷다가 발목에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물집이 터져 상처가 심해 당분간 걷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울상이었다. 우리는 작은 샌드위치를 같이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떻게 순례길을 알게 되었는지, 이 길을 걷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등.

알레자는 따뜻하면서 친절한 친구였다. 식사를 끝낸 뒤, 페르난다 아주머니의 집으로 함께 돌아가니 발목 통증이 심해진 지니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픈 친구들을 바라보며 잠시 '내가 이 친구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가방에 있는 휴족시간이 떠올랐다. 정말 나중에 발이 아프거나 피곤할 때를 대비해 한 번도 쓰지 않고 고이 모셔두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니 내게는 필요치 않은 것이었다. 내가 가진 발의 피로는 참을 수 있는 피로였으며, 내게 쓰는 것보다 당장 이 친구들에게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족시간을 꺼내 친구들의 양발에 붙여주었다. 처음엔 생소한 얼굴로 낯설어하던 지니와 알레자는 휴족시간을 붙이고 난 뒤 태어나서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며 너무 행복해했다. 친구들의 행복해하는 얼굴을 보면서 나는 오히려 더 행복했다. 스스로 더 놀랐다. '내가 이렇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서 행복해한 적이 있었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누는 것의 기쁨이 이런 거였구나.'라는 깨달음이 나를 스쳐지나갔다. 그런 순간이 있다. 다들 이야기하는 깨달음을 직접 체감해서 깨달았을 때의 놀라움. 내게는 이 순간이 그런 순간이었다.

이후 평소와 다름없이 책을 읽고, 햇살을 즐기며 오후를 보냈다. 그 시간동안 다양한 사람들이 페르난다 아주머니 집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사랑스러운 남아프리카에서 온 60대 노부부와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새벽 4시 반부터 부지런히 걸어온 호주에서 온 엘리자베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혼자 오신 할머니, 폴란드에서 온 부부, 순례길에서 만나 친구가 된 독일과 미국에서 온 여자 친구들까지.

그렇게 8개국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 페르난다 아주머니의 저녁 식사자리에 모였다. 페르난다 아주머니는 본인의 집을 기부제 사설 알베르게로 몇 년 째 운영해오고 계셨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본인이 원했고 또 하고 싶어서 몇 년간 수많은 순례자들을 본인의 집에서 먹이고, 재우고, 상처도 치료해주면서 살아오고 계신 분이었다.



누구에게도 쉽지 않았을 결정이었을 텐데 아주머니는 강한 의지와 자부심으로 이곳에서 낯선 타인을 집에 들이고 계셨다. 우리를 위해 3시간 동안 저녁 준비를 거쳐 15인분의 요리를 뚝딱 내오시고, 쉴 새 없이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술을 나눠주느라 정작 본인은 제대로 식사도 못하셨다. 식사를 하던 도중 유일한 한국인 순례자인 나를 위해서라며 매운 소스를 따로 만들어주셨다. 모두 맛있는 식사를 함께 나누며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순례길을 왜 걷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해 각자의 인생 이야기까지. 자신의 아픔마저 드러내는 대화를 나누며 같이 슬퍼하기도 했고, 먼 나라에서 홀로 와 길을 걷고 있는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응원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이 날 저녁식사는 내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순간 중 하나로 남아있다. 유럽에서 지내면서 꽤 적지 않은 여행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동안 내가 했던 여행은 여행이 아닌 관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많은 나라에서 온,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고, 마음의 문을 여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이곳에서 진정하게 깨달은 여행이었다.

서울에 살면서 낯선 타인에 대한 경계심을 잔뜩 품고 살던 내가 너무 낯선 타국에서, 낯선 타인을 품어도 괜찮다고, 마음을 열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친구가 되어도 괜찮다는 걸 배웠다. 나는 이렇게 내게 너무 낯선 타인을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걸, 그래도 좋다는 걸 이 길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페르난다 아주머니를 보면서 소유에서 오는 기쁨보다 내가 가진 것들이 비록 보잘것없고 작은 것이라도 이것을 나누는 마음. 그 마음이 오히려 더 나 자신을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직접 보고 경험하면서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이 글이 뻔한 이야기일 수 있다. 도서관에서 손만 뻗어 책 몇 장만 넘겨도 읽을 수 있는 흔한 말들일 것이다. 하지만 활자를 통해 얻은 깨달음과 내가 몸소 부딪쳐 얻은 깨달음은 차원이 다르다. 매 순간 길 위에서 사람들을 만나며 얻은 소소한 깨달음은 내가 직접 체감하여 얻은 깨달음이며, 덕분에 나는 앞으로도 이 깨달음을 놓지 않고 실천으로 옮겨 나갈 것이다.

늘 적게 소유하고, 내가 가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며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살아갈 것. 앞으로도 내 앞을 스쳐지나갈 수많은 낯선 타인들을 조금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품을 것. 나는 이 길을 통해서 사람을 얻었고 그들로부터 사람에 대한 애정을 배웠다. 앞으로도 일상에서도 여행길 위에서도 더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