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형- 대니’를 읽고

‘윤이형- 대니’를 읽고

  • 392호
  • 기사입력 2018.03.20
  • 편집 김규리 기자


글 : 최연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4차 산업이 시작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AI는 가장 대두되고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현재도 인공지능은 우리 사회에 조금씩 스며들고 있습니다. 기존에 없던 것이 만들어지고 나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시작했죠. 인간의 노동력보다 효율적인 AI, 인공지능들이 곧 인간의 자리를 꿰차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 섞인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인공지능이 빠르게 발전할수록 기대와 두려움은 자연스럽게 커지게 됩니다. 사회는 인공지능과 AI에 대해 적응하고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을지라도, 개인이 그것에 대해 적응하느냐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니까요. 개인과 사회의 적응 속도가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하여 우려하고 걱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설 ‘대니’에서도 인공지능 기능을 탑재한 로봇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스물넷의 ‘대니’와 예순 아홉의 ‘나’가 등장합니다. 로봇은 늙지 않죠. 대니는 영원히 스물넷입니다. 작년에도 스물넷이었고, 내년에도 스물넷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보모 역할을 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대니는 맞벌이 부부의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딸의 아이를 돌보며 늙은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와 대니는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죠. 대니는 힘에 부쳐 아이를 겨우 따라다니는 나를 보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땀을 흘리고, 버벅거리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대니와 나는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니와 나의 대화는 일반 사람간에 오가는 대화와 별 다를 바 없습니다. 대니는 아주 잘 만들어진 인공지능이니까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을 줄 알아야지. 

나는 대니에게 말합니다. 대니는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대니는 늙어가고 시들어가는 나를 좋아하고 따릅니다. 영원한 젊음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늙어가는 존재를 부러워하는 아이러니함이 보여집니다. 극명히 다른 둘 사이에는 우정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이 생기지만, 생각해보면 AI에게 감정이 어디 있고 생각이 어디 있겠어요. 계산된 프로그램일 뿐이죠.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소설을 읽던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가장 먼저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윤이형 작가의 매끄럽고 자연스러운 문장과 대사 덕분일지도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는 사실 AI에 대한 직접적인 이야기 보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더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니와 나는 서로의 한계점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대니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감정에 동요하지 않으며, 분야에 대한 뛰어난 학습능력을 모두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가지지 못한 것을 모두 충족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또한 그런 모습에 대해 여과 없이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래서 인간의 특유함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인간이기에 가능한 것들에 대해서 말이죠. 오직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소설에서도 ai는 인간의 자연스럽고 부족한 모습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로 보여집니다.

본래 ‘로봇’이라는 단어는 문학에서 시작된 단어라는 것을 알고 계신가요? 체코의 희곡 작가 카렐 차펙이 쓴 ‘롯섬의 만능 로봇’이라는 작품에서 처음으로 로봇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어찌보면 문학과 과학 사이의 괴리감이 꽤 느껴질지도 모르겠으나, 길게 보면 둘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소설 ‘대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특유함과 인간으로써의 모습을 가지고 사는 것이 ai와 인공지능의 발전과 대비되는 하나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대니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소설처럼 로봇이 인간과 섞여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설계되기 까지는 아직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우리는 조금씩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