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인간성을 잃은 인간들에게

  • 504호
  • 기사입력 2022.11.30
  • 취재 박정원 기자
  • 편집 김채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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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음과 함께 온 땅이 진동하고 시커먼 재가 하늘을 뒤덮은 후 지구는 푸르른 구석을 전부 잃었다. 인간들은 자신의 손으로 망가뜨린 지구를 수십 년에 걸쳐 복구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인류애와 온정 대신 과학과 기술만이 남아 있는 세상. 여러 위험하고 힘든 일을 대신해줄 상대로 인간들은 마치 ‘인간 같은 것’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레플리칸트(Replicant)였다. 따뜻한 피와 부드러운 살을 지닌 이들은 인간의 배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점과 지정된 수명만이 자연적으로 태어난 인간과 다르다. 이는 곧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 숨쉬는 생명체임을 뜻한다.


'레플리칸트' 프리스, 로이


착취당하기 위해 태어난 레플리칸트에게는 생산되는 순간부터 4년의 수명이 주어진다. 군사, 노동, 암살, 성욕 해소 등 다양한 용도로 제조된 이들은 식민지인 화성에서 사용된다. 레플리칸트 역시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서로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생산 이후 여러가지 경험을 통해 점차 자신의 삶이 소중해진 그들 중 몇몇은 수명을 늘려줄 것을 요구하며 착취당하는 환경에서 탈출을 시도하는데, 이런 레플리칸트를 사냥해 처리하는 자들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다.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속 인간은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만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작중 탈출한 레플리칸트의 처리를 지시받은 퇴역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는 지금껏 자신의 손으로 수많은 레플리칸트들의 숨을 끊어 왔다. 종종 죄책감에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그들을 겨눈 총구에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다. 레플리칸트 제조사의 사장 타이렐은 그들의 생산과 착취를 통해 막대한 부를 벌어들인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레플리칸트를 스킨잡(Skinjob)이라는 별칭으로 부르며 그들을 배제한다.


'레플리칸트' 레이첼


인간과 대비되는 레플리칸트들은 생존 욕구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원래 그들은 생산 이전의 기억이나 삶의 경험이 없으므로 공감능력이 다소 떨어지고 일부 상황에 대한 반응도 보통의 인간과는 다르다. 그러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제품의 생산을 모토로 하는 제조사에 의해 가짜 기억이 주입되기도 하며 점점 완전한 인간의 조건을 갖추게 된다. 스스로가 인간이라 믿어 온 레플리칸트 레이첼은 자신의 정체를 깨닫고 큰 충격에 빠지지만 데커드와의 감정을 발전시키며 이를 극복해내는 모습도 보인다. 쓰러져 있는 프리스를 발견한 연인 로이도 강렬한 슬픔과 분노에 휩싸여 복수심을 불태우는 인간적 면모를 드러낸다. 하지만 후에 자신을 죽이려 한 데커드를 구하는 등 실제 인간의 참혹한 행보와는 반대의 길을 걷는다.


왼쪽부터 <멋진 신세계> - 올더스 헉슬리 / <아일랜드(2005)>


<블레이드 러너>와 비슷한 메시지를 담은 소설 <멋진 신세계>에서도 기피 직업군의 인력 충당을 위한 인간을 생산할 때 유전자를 부러 조작한다. <블레이드 러너> 속 레플리칸트 수명 제한은 <멋진 신세계>의 하위계층 유전자 조작과 세뇌, 소마 공급과 유사한 장치다. 만에 하나 부정적 감정을 봉쇄하는 소마가 들지 않아 혁명이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블레이드 러너들이 레플리칸트를 제거하듯 정부가 그들을 학살할 것이다.

영화 <아일랜드>에서는 복제인간들을 타워에 가두고는 그곳을 지구에서 마지막 남은 안전지대로 속인다. 그러곤 유전자의 원래 주인에게 복제인간의 장기와 아이를 넘기고 시신을 처리하는 비인간적 착취를 자행한다. 지구에 잠입한 레플리칸트들처럼 타워를 탈출해 살아남고자 하는 복제인간들을 맹렬히 뒤쫓는 인간들의 무자비한 모습은 생명력이 아닌 죽음의 개념과 어울린다. 이렇듯 잔혹한 인간에 의해 목적을 갖고 만들어진 자들은 쓸모가 없어지거나 목적을 벗어나 행동하는 순간 제거된다.


“공포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 그게 바로 노예의 삶이야.”


쫓고 쫓기던 상황이 역전되어 위태롭게 옥상에 매달린 데커드에게 로이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데커드를 위험에서 구해낸다. 인간을 닮도록 만들어진 무언가와 인간성을 잃은 인간. 어느 쪽이 더 ‘진짜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