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보지 못한 시대에 보내는 노스탤지어
그리고 시티팝

  • 468호
  • 기사입력 2021.05.28
  • 취재 천예원 기자
  • 편집 윤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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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빌딩은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는다. 찬란한 야경은 무성한 잡초인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문다. 김광균은 1939년 발표한 시 <와사등>에서 발전한 문명의 도회 가운데 소외감을 느끼는 현대인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그려냈다. 김광균이 환기시키고자 했던 문명 속 현대인의 비애는, 21세기 ‘시티팝(City Pop)’이라는 장르로 모습을 달리해 음악적으로 <와사등> 속의 분위기를 좇는다. 

 

‘시티팝’이라는 용어에  공식적으로 합의된 정의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시티팝’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을 당시에 이는 서구 문화의 본격적인 유입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대중음악 장르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1970~1980년대 서구권에서 유행했던 재즈, 디스코 풍 음악이 가지는 음악적 문법을 모방했거나 풍부한 전자음과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음악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1970~1980년대 일본에서 발생한 시티팝 장르가 2010년대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시티팝’이라는 용어의 적용 범위는 이전에 비해 확대되었다. 


오늘날 ‘시티팝’은 앞서 언급한 서구권의 음악적 특징을 흡수한 대중가요를 일컬을 뿐만 아니라 1970~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를 띤 음악적 작업물들을 아울러 가리키곤 한다.


쇼와 시대 말기의 일본 버블경제가 꺼지고 자그마치 30년이 흐른 지금, 젊은 대중들은 시티팝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을 ‘겪어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향수’라고 정의 내린다. 일본 경제 호황을 상징하는 거리의 현란한 네온사인과 도쿄도청, 1970 오사카엑스포, 나이트클럽 등은 시티팝 장르가 선사하는 분위기의 상징물로 자리잡아 젊은 세대들에게 여유롭던 과거를 선망하게끔 만든다. 국내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었던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2001)>에는 사람들이 풍요롭던 20세기를 그리워하다가 결국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해버리는 연출이 등장하는데, 이는 실제로 쇼와 시대를 그리워하는 부모 세대와 이를 겪어보지 못한 자식 세대(헤이세이 시대)의 세대차이를 애니메이션 서사에 반영한 경우이다. 이는 시티팝을 향유하는 대중이 느끼는 노스탤지어와 비슷한 감정의 양상을 띠지만, 시티팝의 재부흥은 그 호황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마저도 과거를 선망한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한국의 Z세대 역시 호황을 누리던 한국의 1980~1990년대의 여유로운 분위기에 동경의 시선을 가지고 시티팝 장르를 향유한다. 각종 대중매체로부터 1980년대 중반(IMF 이전)의 한국 경제 호황의 이미지를 학습한 한국의 Z세대는 삭막한 21세기의 현대사회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30년 전의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동경하게 되었다. 



이에 영향을 미친 컨텐츠는 대표적으로 신원호 PD의 ‘응답하라 시리즈’와 ‘슬기로운 시리즈’가 있는데, 드라마 속에 반영된 낭만적인 20세기의 모습이 젊은 대중에게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젊은 세대가 공유하는 20세기의 향수는 시티팝풍 음악의 유행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업 아이템의 컨셉트에 적용되면서 그 인기를 증명하고 있다.



시티팝 열풍의 원인을 젊은 대중의 현실 도피적 경향만으로 설명하기는 힘들다. 다른 장르도 아닌 신스팝풍의 시티팝 장르가 유행하게 된 이유는 시티팝이 소비되는 방식에 있다. 인기 대중가요가 아닌 자신의 감성에 꼭 맞는 노래의 리스너로서 가지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삭막한 도심에서 살아가는 스스로에게 보내는 작은 동정이 시티팝 장르 소비의 핵심이다. 실제로 유튜브에 ‘시티팝’을 검색해보면, 많은 영상들이 ‘외로움’, ‘공허’, ‘도시’, ‘감성’ 등을 키워드로 한 제목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시티팝 아카이빙 영상들 중 상당수가 어두운 분위기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음악재생 화면으로 한 포맷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티팝 장르를 향유하는 많은 사람들이 냉소적인 도시 속의 나’의 모습에 시티팝을 투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외로움, 혹은 고독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음악 감상의 재료로 사용한 경다.



한국 시티팝씬의 대표 주자로는 가수 김현철을 빼놓을 수 없다. 맥심 시티써머라이프 CF에 사용된 곡 ‘오랜만에’, 갤럭시 노트20 미스틱 레드CF에 사용된 곡 ‘Drive’ 모두 가수 김현철의 곡이다. 그를 대표하는 음반으로는 단연 그의 데뷔 앨범인 ‘김현철 Vol. 1’을 꼽을 수 있다. 그의 1집은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 12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앨범에는, ‘월간 윤종신’ 프로젝트를 통해 태연이 리메이크 하기도 한 ‘춘천 가는 기차’, 맥심 CM송으로 사용되었던 ‘오랜만에’, 그리고 ‘응답하라 1988’에 삽입된 ‘동네’ 등이 수록되어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티팝 앨범으로 평가 받는 ‘김현철 Vol. 1’의 제작 당시 정작 김현철 본인은 ‘시티팝’이라는 용어 자체를 몰랐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김현철 외에도, 김현철과 절친이기도 한 윤상, 장필순, 나미, 빛과 소금의 음악에서 우리는 시티팝(신스팝) 풍의 음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세기에 발표된 시티팝 앨범뿐만 아니라, 시티팝 리바이벌 이후 발표된 2010년대의 시티팝 음악 역시 찾아 듣는 재미가 있다. 1970~1980년대 발표된 시티팝 음악에 비해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지는 시티팝의 아류(亞流)작 같은 음악도 분명 있지만, 그 가운데 21세기의 젊은 감각과 시티팝의 감성을 모두 잡은 좋은 곡들 역시 많이 발표되었다. 일본 인기 드라마 ‘롱 베케이션’의 OST인 ‘La La La Love Song’을 커버해 화제가 되었던 가수 백예린의 ‘Our love is great’ 앨범은 세련되고 감각적인 사운드로 현대인의 멜랑콜리를 노래한다. 이 앨범의 수록곡 ‘지켜줄게’는 고가도로에 삐져나온 초록잎 / 아마 이 도시에서 유일히 적응 못한 낭만일 거야’로 노래의 도입을 열며 도시 속 소외를 노래하는 시티팝의 정수를 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