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세계몰락감’
공연예술 기획자 김남현 (연기예술17)
- 547호
- 기사입력 2024.09.24
- 취재 이다윤 기자
- 편집 오소현 기자
- 조회수 674
믿었던 세계의 몰락, 상처와 상실은 현재를 어디로 데려갈까? 청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와 이 세계는 어떻게 성장해 나갈 것인지 질문하는 연극 ‘세계몰락감’이 오는 10월 4일부터 10월 13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다. ‘세계몰락감’ 기획을 맡은 김남현(연기예술17) 동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공연예술 기반 독립 기획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남현입니다.
연기예술학과 17학번이고 올해 2월에 학교를 졸업했어요.
‘크리에이티브 윤슬’에서 청소년극 ‘세계몰락감’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세계몰락감’은 극 내에서 어떠한 충격적인 경험으로 인해 자신의 내부 세계가 완전히 무너져내려 자신을 감싸고 있는 외부 세계 또한 완전히 몰락할 때 느끼는 감각을 표현한 단어로, 강하늘 작가가 자신의 청소년기를 되돌아보며 주목한 ‘몰락의 경험’을 바탕으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이 작품은 현재, 윤비, 제이라는 세 명의 여자 청소년을 통해 누구나 청소년기를 지나오며 처음으로 마주하는 몰락의 경험과, 기후 위기로 인해 무너져 가고 있는 세계를 병치하며 관계와 성장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동시에 기후 위기로 무너지는 세계를 살아가는 지금의 청소년과 어른 모두와 연결되고자 한다.
| 이번 작품은 청소년기 ‘몰락의 경험’을 다룬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세계몰락감’이 어떤 작품인지 소개해 주세요.
‘세계몰락감’은 영원할 것 같았던 관계,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세계가 무너진 이후 처음으로 나와 세계를 마주하게 된 청소년 현재의 이야기를 다뤄요. 중고등학생 때는 나랑 친한 친구가 내 세계의 전부라고 착각하기도 하잖아요. 이 친구랑 사이가 멀어지면 내 세계도 끝날 것 같았던 기분을 우리 모두가 겪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들이 무너졌을 때 내가 어떻게 다시 일어났는지에 따라서 지금 우리 모습이 만들어졌을 텐데요. 믿었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과 감각에 집중해 주신다면 청소년 관객뿐만 아니라 청소년 시기를 지나온 성인 관객들도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어요.
| 연극 ‘세계몰락감’의 기획을 맡고 계십니다. 공연 기획자로서 작품을 준비하면서 어떠셨나요.
우리 극단 창작자들이 대부분 20대거든요. 청소년기와 맞닿아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번 작업을 통해 극단 구성원들과 청소년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성장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나는 그 시기를 제대로 지나왔나, 그 시기의 경험에 대해서 되돌아본 적이 있었나’ 같은 생각을 해보면서요. 저희도 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좌절하면서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보니 저희 자신도 다시 세계를 시작할 힘을 받고 있어요. 관객들도 극장에 오셔서 함께 무너지고 또 내일을 시작할 힘을 얻으셨으면 좋겠어요.
‘크리에이티브 윤슬’은 다양한 파도를 마주하고 극복하는 청소년의 모습을 통해 모두의 빛나는 이야기가 담긴 공연을 제작하는 공연단체다. 이들은 청소년이 성장하는 삶이 관객과 동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청소년의 이야기와 무대, 사운드, 움직임 등을 결합해 다양한 감각을 자극하는 공연을 만들어 청소년들과 극장에서 만나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윤슬’은 ‘세계몰락감’ 공연 준비와 더불어 [2024 크리에이티브 윤슬 청소년 워크숍]을 진행하며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청소년의 목소리를 담고자 한다. 매주 공연 창작자들과 청소년이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다양한 감각을 공유하며 함께 공연을 만들어 가고 있다.
▲ 2024 크리에이티브 윤슬 청소년 워크숍
| ‘2024 크리에이티브 윤슬 청소년 워크숍’을 통해 청소년과 소통하려는 모습에서 창작진의 세심함이 엿보입니다. 워크숍은 어떤 마음으로 기획하셨나요?
청소년을 위한 공연을 만드는데 ‘우리의 몸짓이나 언어가 그들과 멀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워크숍을 통해 청소년 친구들과 매주 만나면서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함께 공유하는 감각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청소년들을 만나기 전에는 개인적으로 청소년극에 대한 의문점이 있었어요. ‘이미 청소년기를 지나 보낸 우리가 청소년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게 청소년극이 될 수 있는 걸까’ 싶었거든요. 워크숍 초기에만 해도 청소년들과 차이를 크게 느꼈지만, 이 친구들을 만날수록 오히려 경험하는 감각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젠 저희가 굳이 청소년들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아도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 청소년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청소년을 이해하고 공연을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으신 듯합니다. 워크숍에서는 어떤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나요?
저희 공연에 ‘등장인물들의 티파티(Tea party)’가 주요 장면 중 하나로 나와요. 청소년들과 차를 나눠 마시면서 함께 워크숍을 진행하기 위한 우리만의 약속을 정했어요. ‘모든 존재는 소중하다, 우리는 실수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 이런 내용들이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공연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잖아요. 안전한 작업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청소년들과 이야기를 많이 나눌 필요가 있었어요. 대본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포스트잇에 적어보거나 일상 속 소리를 수집하는 활동을 했어요. 녹음한 소리를 함께 들어보고 어디서 녹음한 소리인 것 같은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공유하는 거예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작품에 몰입한 청소년들이 해주는 이야기가 흥미로워요. 저희가 평소에 발견하지 못했던 감각을 느끼기도 하고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무대에 올라갔을 때 분명히 여기에서 나오는 힘이 있을 것 같아요.
▲ ’세계몰락감’ 연습 스틸컷
모든 사람의 근원을 찾는 것은 어린 시절을 다시 만나는 작업에서 시작합니다. 그 태생부터 다가가는 어린이청소년극, ‘예술이 일상으로, 일상이 예술로’의 첫걸음. 즐겁고, 쉽고, 깊게!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홈페이지 문구는 청소년극이 지니는 가치를 온전히 보여준다. 연극과 사회, 청소년이 연결되는 지점에서 청소년과 소통을 시도하는 청소년극은 세대를 넘어선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청소년을 문화 주체로 인지하고 이들이 예술 창작의 주체로 설 수 있는 장을 마련하기도 한다. ‘세계몰락감’ 역시 하나의 청소년극으로서 청소년극을 만든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어떤 청소년극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며 청소년극의 새로운 지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청소년극의 연극적 의미와 사회적 역할에 대한 김남현 기획자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 ‘세계몰락감’을 청소년극으로 소개하고 있어요. 청소년극이라는 개념이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하게 다가올 수 있는데요. 청소년극을 기획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울산 출신이라 청소년기에 연극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청소년기에 연극을 본다고 하면 학교에서 어려운 고전 작품을 단체 관람하고 어떤 친구들은 극장에서 자고 있고 그런 경험뿐이었어요. 그런데 청소년기에 ‘나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을 접한다면 더 많은 청소년이 연극에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어릴 때 공연을 재밌게 관람한 경험이 쌓이면 그때의 경험을 가지고 다시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생길 테고 나중에는 우리 동료가 되는 친구들도 생길 거예요. 연극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시점에 그저 관객들이 와주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관객들에게 먼저 다가가고 싶은 마음인 거죠.
| 청소년극은 전개가 단순할 거라는 편견과 달리 ‘세계몰락감’은 제법 심오한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청소년극에서 관계와 성장의 경험, 기후 위기 등의 사회적 담론을 다룬 이유가 궁금합니다.
청소년극이 단순히 청소년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그들이 쉽게 이해하길 바라면서 만드는 연극은 아니에요. 창작 과정에서부터 극이 극장에 올라가기까지 모든 과정에 청소년이 포함되는 걸 청소년극이라고 해요. 사실 그렇게 심오한 주제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지나온 우리의 청소년기가 단순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매일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일상이 단순한 것처럼 보여도 그 속에서 우리는 매일 몰락하고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면서 그 시기를 지나왔잖아요.
사회적 담론에 대해서도, 청소년과 사회적 담론이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지난 8월 29일 헌법재판소에서 ‘청소년기후행동’ 청소년 활동가들이 제기한 ‘탄소중립법’ 관련 헌법소원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어요. 멀리서 응원하면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함께 살아갈 미래세대의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는 청소년들이 있고, 기후 위기는 우리 모두가 마주할 문제인 만큼 이러한 담론이 청소년극과 유리(遊離)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 인터뷰하는 김남현 기획자
한 편의 연극이 막을 내리기까지 공연예술 기획자는 작품의 모든 과정을 총괄한다. 작품 선정부터 섭외, 홍보, 수익 정산까지 기획자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예술적 감각과 사업적 통찰력을 바탕으로 팀을 책임져야 하는 인물, 김남현 기획자에게 그의 직업에 대해 물었다.
| 연기예술학과에서 연출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공연예술 기획자의 길을 걷게 되었나요?
4학년이 됐을 때쯤 문득 ‘계속할 수 있을까?’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광고 업계로 가볼까 싶어서 광고대행사 인턴도 했어요. 그런데 광고 업계에 가 있으면서 뭔가 놓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내가 뭘 놓고 왔는지 고민해 보니 함께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을 놓고 온 것 같았어요. 저랑 함께해왔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꿈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거든요. 이 사람들이 다른 이유라면 몰라도 사람 때문에 상처받아서 좋아하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리고, 경험이 부족하고, 힘이 없는 약자의 위치에서 불합리한 일을 겪고 업계를 떠나는 사람들이 꽤 있거든요. 결국 사람들을 지켜내고 싶어서 공연예술 기획자의 길을 선택했어요.
| 진로를 결정하는 건 누구에게나 그렇듯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요. 직업 선택에 확신을 얻은 순간이 있었을까요?
저는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았어요. 연극도 했고 영화도 했고 다큐멘터리도 했었고 광고, 뮤지컬, 유튜브에도 잠깐 발을 담갔어요. 졸업을 앞두고 하나를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무엇을 선택할지 따져보니 다 나보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이 분야에 대해서 나보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감히 이걸 해도 되나?’ 싶었어요. 그런데 ‘사람을 지켜내고 싶다’는 생각은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느끼면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기획 일을 하면 적어도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기획자로서 작품의 모든 과정에 관여하면서 안전한 창작 환경을 만드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죠.
| 공연예술 기획자로 일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는지 궁금합니다.
올해 4월에 ‘쉬는 시간’이라는 작품을 할 때였어요. ‘쉬는 시간’은 수업이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쉬는 시간을 배경으로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그려낸 연극이에요. 올해는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안전연극제>로부터 제안을 받아서 공연을 준비하게 됐어요. 이 공연을 준비할 때 기획에 대한 고민이 되게 많았어요. 세월호 참사와 연결된 ‘안전’이라는 키워드로 연극제에 초청을 받았지만, 작품 자체는 고등학생들의 일상을 다룬 내용이었거든요.
세월호 참사와 등장인물들을 연결 짓는 순간 ‘극 중 고등학생들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이 아니라 피해자로서 무대 위에 올라오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 접근이 조심스러웠어요. 시기와 축제의 특성상 세월호 참사와 연결되어서 읽힐 가능성이 있었으니까요. 고민 끝에 ‘세월호 참사를 연상시키는 것들은 작품에서 배제하되, 창작자인 우리는 참사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다가가자’는 결론을 내리고 오로지 등장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공연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을 쓰신 이양구 작가님께서 공연을 보시고는 “처음으로 이 작품이 완벽히 해석됐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셨어요. ‘우리의 접근 방식이 진정성 있게 다가갔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했죠.
그리고 공연을 올릴 때 제가 티켓 부스에서 관객분들에게 티켓을 나눠드리고 있었는데 학생 할인을 받는 분이 계셨어요. 학생증을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단원고등학교 학생증을 내미시는 거예요. ‘청소년극이니까 많은 청소년이 극장에 찾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계속 공연을 홍보해 왔지만 티켓 부스에서 단원고 학생증을 본 순간 정말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들더라고요. ‘목표하지는 않았지만, 이 순간을 마주하려고 내가 이 공연을 준비했구나’ 싶었어요. 그때 느꼈던 감각으로 공연을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요.
| 마지막으로 성균관대학교 학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얼마 전에 친척들과 나눈 대화가 떠올라요. 친척분들이 저에게 “수입이 안정적인 교사 일을 하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제가 지금 연극도 준비하고 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안양예술고등학교에서 수업도 하고 있거든요. 저는 “교사는 딱히 끌리지 않아요. 연극을 계속할 생각입니다.”라고 답했어요. 그러자 몇몇 분들이 “그렇게 철이 없어서 되겠냐?”며 저를 꾸짖으시길래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제일 중요한 가치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죠.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하고 돈의 영역 바깥에서 목소리를 내고 자기 작업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가 이미 기울어져 있지만 그래도 균형을 맞추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야 우리 세상이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갈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사실 돈을 많이 벌고 싶고 나 자신의 안위가 우선이라면 이 일은 못 할 것 같아요. 일반 기업에 취직해서 회사에 다니는 편이 정신 건강에 이롭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공연을 통해서 관객분들을 만나고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세계를 같이 만들어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10월 4일 금요일부터 10월 13일 일요일까지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되는 ‘세계몰락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세계몰락감’ 컨셉포토
소신껏 답변을 이어가는 김남현 기획자의 모습에서 공연예술을 향한 그의 묵묵한 애정이 드러났다. 공연예술 기획자로서 선보일 그의 커리어가 기대되는 이유다. 올가을, 김남현 기획자의 연극 ‘세계몰락감’을 대학로 극장에서 만나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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