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정체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되다

  • 549호
  • 기사입력 2024.10.15
  • 취재 이다윤 기자
  • 편집 오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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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는 특정 지역의 문화와 정체성을 표현하는 매개체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는 풍부한 식재료를 지닌 지역의 음식문화가 발달했다면 이제는 뛰어난 요리를 선보이는 사람들이 모인 지역이 음식문화를 이끌어 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요리의 부가가치는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버드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위대한 극장보다는 위대한 식당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분석했다. 음식문화가 현대 도시를 살리는 요인 중 하나라는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먼 나라의 음식마저 손쉽게 맛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별한 음식을 경험하기 위해 여행을 가거나 특정 장소를 방문하기도 한다.


많은 ‘핫플(Hot Place)’이 식당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핫플에는 더 유명한 식당과 요리사들이 모여든다. 한 지역의 문화유산이나 자연환경을 즐기고자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맛집 탐방’을 위해 여행을 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맛있는 빵을 먹을 수 있다면 먼 지역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는 ‘빵지순례’가 인기를 끌고 있다. 특정 지역을 대표하는 유명한 빵집을 찾아 그곳에서만 파는 제품을 사 먹는 것이 일종의 놀이문화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들은 주로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각종 SNS 채널을 통해 유명한 빵집 정보를 나눈다. 빵지순례의 특징은 프랜차이즈 브랜드가 아닌 지역 기반의 동네 빵집이 중심이 된다는 점이다. 유명한 빵집은 일종의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해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한다.


대전광역시는 대표적인 '빵지 순례’ 명소다. 성심당은 창업 이래 68년 동안 성실하게 맛과 품질을 유지하며 대전의 얼굴로 자리 잡았다. 튀김소보로, 튀소구마, 명란바게트, 보문산메아리, 부추빵 등 성심당에서만 맛볼 수 있는 빵들은 전국적인 베스트셀러가 됐고, 딸기시루와 무화과시루, 망고시루도 큰 인기를 끌었다. 성심당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매출액도 큰 빵집이 됐다. 지난해 매출액이 1,243억 원, 종사자가 1,000여 명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렇듯 대전은 성심당을 중심으로 동네 빵집이 핫한 관광 상품으로 떠오르면서 빵지순례자들을 잡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빵지순례 지도’다. 대전 동구는 지난달 대전 원도심 현지 빵집 지도를 발행했다. 대전 동구 관계자는 “현장에서 보면 관광객들이 양손에 빵 봉투를 가득 들고 다니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빵지순례를 위해 대전을 찾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라며 “잘 알려진 빵집 외에도 동네에 숨어 있는 빵집들을 알리기 위해 빵지순례 지도를 제작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8~29일 열린 '2024 대전 빵축제'는 빵의 도시 대전을 실감케 했다. 대전의 71개 빵집과 전국의 유명 10개 빵집 등 모두 81개 빵집이 참가한 축제에는 이틀 동안 14만 명이 행사장을 다녀가며 대전이 '빵의 도시'임을 입증했다. 


전문가들은 빵지순례 열풍을 “빵집을 중심으로 ‘로코노미(Loconomy)’를 구축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한다. 로코노미는 ‘지역(Local)’과 ‘경제(Economy)’의 합성어로, 서울을 중심으로 한 거대 상권에서 벗어나 지방의 작은 상권을 중심으로 경제가 활성화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각 지자체가 그 지역에서만 알려진, 숨어 있는 장인 빵집들을 발굴해 적극적으로 홍보한다면 지역 관광과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니체, 파스칼, 루소 등 많은 철학자는 ‘먹는 행위’를 인간의 욕구로만 관찰했다. 반면 칸트는 예술 개념을 ‘무언가 창조하는 것’으로 정립하면서 독창성, 보편성, 재현성, 자아와 지식의 확장성 등을 예술의 요건으로 제시했다. 최근 요식업계에서 살펴볼 수 있는 요리의 흐름은 칸트의 예술 개념을 모두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22년에 진행된 재료 중심 아카이브는 한국 동시대의 식재료를 예술가의 시선으로 기록한 프로젝트이다. 요리 중심의 상업사진에서 벗어나 음식의 본질인 한식 재료의 물성 자체를 고찰한 예술사진으로 이를 기록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한 구본창은 12절기의 요리와 식재료에 대한 탐구를 선행한 후 계절, 지역, 조리법의 발달 등을 담고 있는 토속적 식재료를 우리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소재로 보았다. 따라서 여러 식재료를 탐구하며 다양한 배치와 조합을 사진에 담았다. 이러한 작업은 지역의 특성, 역사적 배경, 인문학적 맥락 등을 고려하여 한국의 식문화를 다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된다. 구본창은 음식에 부여한 특별한 의미와 한국인의 정신을 전통 오방색을 통해 표현하며, 고향과 연결되는 애틋한 애정을 담아내려 했다. 재료 중심 아카이브 프로젝트는 단순히 음식의 식재료를 담아낸 사진이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표현을 시도하는 중요한 시도로 평가된다. 요리를 활용한 이러한 시도는 예술의 한 형태로 보이기도 한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이하 '흑백요리사')에서도 요리가 셰프의 독창성과 철학을 담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흑백요리사'의 클라이맥스는 한국계 미국인 셰프 에드워드 리의 요리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는 생참치를 재해석한 비빔밥을 내놓으며 자신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을 표현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흑백요리사’의 심사위원 안성재 셰프는 전달하려는 의도가 뚜렷하지 않고 비벼 먹어야 하는 비빔밥의 본질과 엇물린다는 평을 내렸다. 이는 ‘흑백요리사’의 또 다른 심사위원인 백종원이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준 것과 대비되며 시청자들에게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에드워드 리가 준비한 마지막 요리인 '나머지 떡볶이 디저트' 또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떡볶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아이스크림 디저트를 선보였고, 서툰 한국어로 전한 요리에 대한 설명은 시청자들에게 많은 울림을 안겼다. 에드워드 리는 결승전을 앞두고 흑백요리사에 나온 가장 큰 이유가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알고 싶어서"였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그의 서사가 알려지며 시청자들은 음식에 스토리를 입히는 셰프의 철학에 주목하게 되었다.


음식은 우리의 생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소통과 경험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하여 새로운 시각과 감정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예술적 성격을 띠기도 한다. 따라서 대중은 요리를 통해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경험을 맛보고 새로운 관점을 개척하게 된다. 먹고 마시는 행위는 그저 단순히 반복되는 일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개성의 표현이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창의적인 움직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