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상징, 경복궁

  • 445호
  • 기사입력 2020.06.08
  • 취재 고병무 기자
  • 편집 김유진 기자
  • 조회수 5813

혹시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어디인가? 물론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아마 경복궁을 뽑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조선의 5대 궁궐 중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궁궐이자, 조선 초기의 정궁인 경복궁은 해마다 우리나라 사람은 물론 외국인들도 많이 다녀가는 장소이다. 게다가 성균관대학교에서 마을버스(종로02) 한 번이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늘 <킹고복덕방>에서는 창경궁에 이어 조선 전기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을 다녀왔다.

*창경궁의 역사와 상세 내용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경복궁관리소를 참고하였습니다.

*본 기사 사진의 출처는 문화재청과 경복궁관리소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경복궁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배산임수를 적용한 건축물이다. 뒤에는 북악산이라는 큰 산이 있고, 앞에는 한강이라는 큰 강을 거느리고 있다. 또한 규모도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하루에 다 못 보고 오는 경우도 있다. 다만 현재(20.06.04 기준) 경복궁을 비롯한 5대 궁궐이 모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예방을 위해 6월 14일까지 휴관을 하고 있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다녀오면 좋을 것이다. 참고로 경복궁의 원래 개장 시간은 오전 9시이며, 폐장 시간은 월마다 17시~18시 30분으로 상이하다. 또한 만 25세까지는 무료입장이 가능하니까 상황이 나아지면 나들이 겸 한번씩 들러 보는 것도 좋다.

경복궁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안내를 했으니, 본격적으로 궁궐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이번 경복궁의 코스는 광화문-근정전-경회루-강녕전과 교태전-건청궁의 순으로 이어진다.


  1. 광화문과 궁궐 담장

경복궁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곳이 바로 광화문이다.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으로, 다른 궁궐들의 정문과는 달리,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중층구조의 누각을 세워 성곽의 성문처럼 장대하게 지어졌다.

광화문은 조선시대 당시, 왕이 주로 이용하는 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운데 있는 홍예문으로 왕의 가마가 드나들었다고 한다. 좌우의 문은 왕세자나 신하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였다. 광화문에는 아픈 역사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건물이 경복궁 안에 건설되면서,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고, 이마저도 한국전쟁 당시 폭격에 의해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후에 정문의 위치로 복원시켰지만, 나무가 아닌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제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위치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현재의 광화문은 2010년에 다시 복원을 하면서 제 위치를 찾았다.


  1. 근정전

경복궁을 맞이하는 문인 광화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오면, 이 궁궐의 정전인 근정전이 나타난다. 이 건물은 경복궁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건물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주로 왕이 신하들의 조하를 받거나 공식적인 행사,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곳이었다.

                                  ▲  근정전품계석                                                                                       ▲ 세종대왕즉위식  

근정전 앞마당에 보면 작은 비석이 줄을 맞추어 서있는데, 이는 다들 알고 있다시피 품계석이라는 비석이다. 정1품부터 종9품까지 좌우로 9쌍의 품계석이 위치해 있는데, 왕의 즉위식이나 사신 접대 등 대규모의 행사가 있을 때, 신하들은 각자의 위치에 맞는 품계석에 서있었다. 또한 바닥을 살펴보면 거친 표면을 가진 돌들이 마당에 깔려 있는데, 이는 박석이라고 한다. 박석은 얇게 깎은 화강암으로 표면을 적당히 우둘투둘하게 만들어서 가죽신을 신하들이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햇빛도 난반사가 되게 해서 눈이 부시지 않게 만들어졌다.


  1. 경회루

경복궁 안에는 연회를 즐길 수 있는 장소도 존재했는데, 바로 경회루가 그 것이다. 경회루는 왕의 침전인 강녕전 서쪽에 있는 연못 안에 있는데 주로 외국사신이나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베풀 때 이용하던 곳이다. ‘올바른 사람을 얻어야 정사를 바로 할 수 있다’라는 의미에서 경사스러운 모임이 있는 장소로 쓰였다.

현재 경회루의 모습은 고종4년에 중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경복궁의 많은 건물들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소실되거나 파손되었는데도 경회루는 중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원래는 연못의 사방으로 담장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철거되었고, 복원 과정에서 북쪽과 동쪽의 담장을 복원했다. 참고로 이 연못에서는 용조각상이 출토된 바가 있으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 경회루에서 출토된 용조각상





  1. 강녕전과 교태전

공식적인 행사를 치르는 정전과 연회를 베풀던 경회루를 지나왔으니, 이제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자리를 이동할 것이다. 왕의 침전은 강녕전, 왕비의 침전은 교태전으로 두 침전은 양의문으로 연결되어 있다. 침전의 경우 세 차례의 화재를 당했고, 경복궁 중건 때 다시 세워졌으나 창덕궁 재건을 위해 헐려졌다. 지금의 모습은 1995년 복원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다.

침전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곳이 아니었다. 왕과 왕비의 내외 종친들을 모아서 연회를 하거나 왕이 신하들과 은밀한 정사를 논의하던 곳이기도 했다. 또한 교태전 뒤로는 아미산이라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는 인공으로 조성된 언덕으로 교태전의 온돌에서 나오는 연기가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굴뚝을 세우고, 주변에 다양한 화초를 심어 조성했다.

                                                                                      아미산 ▶








  1. 건청궁

마지막 장소는 바로 건청궁이다. 건청궁은 궁궐에서 가장 북쪽에 있어서 한적한 곳이다. 왕과 왕비는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이 곳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 곳은 고종 10년에 지어진 건물로 당시 민간 사대부들 집의 형태를 따르고 있으면서도 화려하고 섬세한 치장을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건물을 지은 고종이 특히나 좋아했다고 하는데, 자주 왕비와 함께 머무를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왕과 왕비가 없을 때는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모시기도 했다. 하지만, 휴식의 공간이었던 이 곳이 조선 말기에 들어서면서 혼란의 장소로 변했다. 고종이 이 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 공사들을 접견했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역시 이곳의 옥호루에서 발생했다. 시해사건 이 후에 방치되었다가 철거되었으며, 지금의 모습은 2006년에 복원한 모습이다.

◀  옥호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