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살아 숨쉬는 곳, 창경궁

  • 443호
  • 기사입력 2020.05.11
  • 취재 고병무 기자
  • 편집 김유진 기자
  • 조회수 5526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캠퍼스는 다들 알다시피 종로구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몇 안되는 대학 중 하나이다. 캠퍼스 안에 있는 성균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역사 유적지들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이번 <킹고복덕방>에서는 학교에서 15분 정도 걷다가 보면 나오는 창경궁을 취재해보았다.

*창경궁의 역사와 상세 내용은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소속 창경궁관리소 홈페이지를 참고하였습니다.

*본 기사 사진의 출처는 문화재청과 창경궁관리소입니다.

창경궁은 조선의 4대 궁궐 중 하나로, 성종14년(1483년)에 영건된 궁궐이다. 창경궁은 일제시대의 아픔이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순종이 즉위한지 2년 째가 되던 1909년에 일제가 창경궁 안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들여와 개장하였고, 그로부터 2년 뒤인 1911년에는 창경궁의 명칭마저 ‘창경원’으로 격하시키면서 조선 왕실의 상징성마저 떨어뜨리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1984년부터 시작된 복원공사로 현재는 다시 예전의 창경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창경궁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으니, 본격적으로 창경궁 안으로 들어가보도록 하자. 참고로 창경궁은 만 25세 미만과 만 64세 초과인 경우와 한복을 착용한 외국인은 무료이며,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매표 및 입장시간은 오후 8시)까지다. 무료 관람대상자의 경우 반드시 주민등록증 등 관련 증빙자료를 매표소에 제시 후 입장권을 받아야 하므로 잊지 말기를 바란다.



    1.홍화문 

   홍화문은 창경궁의 정문이다. 문의 이름인 ‘홍화’는 ‘덕을 행하고, 백성을 감화시켜 널리 떨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홍화문은 왕이 직접 밖으로 나가 백성들을 접겼했다고 한다. 일례로 영조 26년이었던 1750년에는 영조가 균역법을 시행하기에 앞서 홍화문으로 나가 양반과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었다고 하고, 정조 19년이었던 1795년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왕이 직접 홍화문 밖으로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정조의 일화는 <홍화문 사미도>라는 그림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 2.옥천교


옥천교는 ‘구슬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라는 이름 뜻처럼 다리 밑으로 응봉산의 명당수가 흐르고 있다. 다리 양쪽 아래에 있는 아치 사이의 도깨비 얼굴의 귀면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고 궁궐을 보호 및 수호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옥천교의 독특한 점은 다른 궁궐들의 다 말라버린 금천과 달리 아직도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봄에 옥천교 근방의 꽃들이 피어나면 금천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3.명정문                                                                                                                                                                                               

명정문은 홍화문과 명정전 사이에 위치한 중문이다. 광해군 8년에 중건한 이 문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겹처마와 팔작지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양 옆으로는 행각이 연결되어 있다. 명정문은 중심축선상에서 조금 틀어져있는 것이 특징이며, 건물의 포작과 건축의 형식으로 보았을 때, 명정문 뒤에 있는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부터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4.명정전                                                                                                                                                                                                                   

명정전은 창경궁의 정전으로 주로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연회 등 공식적인 행사가 있을 때 사용되었던 장소이다. 경복궁의 근정정, 창덕궁의 인정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음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데, 이는 창경궁의 원래 목적이 왕대비 등의 생활공간에 있었기 때문이다. 명정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인 광해 8년에 재건되었고, 이 때 만들어진 건물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래서 조선 궁궐의 정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뽑힌다.


5.문정전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주로 국왕의 집무실로 쓰였다. 관리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했던 곳으로 명정전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에 다시 지었다. 이후 일제 강점기 시절 철거되었다가 1986년 다시 지었다. 또한 이 곳은 왕실 가족의 신주를 모셨던 혼전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다. 이 곳에도 슬픈 역사가 있는데, 다들 한번쯤 들어봤던 사도세자와 영조의 이야기다. 바로 이 곳이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고 서인으로 폐했던 장소이다.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는 8일 동안 갇혀있다가 숨을 거두었다.


6.숭문당                                                                                                                                                                                                                        

숭문당은 우리 성균관대학교와도 관련이 어느 정도 있는 곳이다. ‘문(文)을 숭상하라’는 숭문당의 이름처럼 학업과 관련된 곳이었다. 국왕이 경연을 벌이고, 영조 같은 경우에는 성균관대학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의 유생들을 시험하거나 종친을 접견했던 곳이다. 숭문당 현판과 내부의 ‘일감재자(日監在滋)’라는 현판은 영조의 어필로 알려져 있다. 내부의 일감재자의 뜻은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으니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뜻으로 『시경』에 나와있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