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돌아보기] 한국전쟁을 둘러싼 민간인 학살

  • 458호
  • 기사입력 2020.12.27
  • 취재 최승욱 기자
  • 편집 김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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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한국전쟁 70주년이다. 한국전쟁은 우리 역사에서 중대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무리 역사에 무지한 사람이라고 한들, 6.25 전쟁 내지 한국전쟁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전쟁이라는역사를 떠올리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한국전쟁이 일어난 원인, 한국전쟁의 진행 양상, 한국전쟁 휴전 협정 등 많은 역사들이 우리를 스쳐간다. 하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역사를 세심히 들여다볼 때 보이는 역사가 있다. 바로 한국전쟁 전후로 발생했던 민간인 학살이다. 민간인 학살은 한국전쟁이라는 역사를 기억하는 데 있어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 중 하나이다. 이 기사를 통해 한국전쟁을 떠올릴 때 민간인 학살도 함께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의 배경, ‘신천 학살’

© RMN-Grand Palais (Musée national Picasso-Paris) / Mathieu Rabeau

신천 학살은 1950년대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달하는 35,000여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사건이다. 실제로 이 학살이 세계에 뉴스로 보도되자 피카소는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릴 정도로 서구 사회는 경악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벌거벗은 임산부와 아이들을 향해 총칼을 겨누는 군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사건은 황석영 작가의 <손님>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는데, 황석영 작가는 책을 통해 신천 학살의 실상을 말했다. “놈들은 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지 않은가, 당장 떼내어 따로 가두라. 그리하여 어머니들이 어린이를 찾아 애가 타죽고 어린이는 어머니를 찾아 간이 말라죽게 하라면서 떠벌렸습니다. 살인귀들은 총칼을 휘둘러 필사적으로 항거하는 어머니들의 품에서 어린이들을 강제로 떼내어 다른 창고에 가두어 넣었습니다. 어머니를 찾는 아이들의 애절한 울음소리, 아이들을 애타게 부르는 어머니들의 부르짖음을 차마 들을 수 없었습니다.”


『말』 1998년 12월 호에 실린 원광대 이재봉 교수의 「신천박물관참관기」는 신천 학살 사건의 사실을 전했다. “전시실은 한마디로 미제 침략자들이 신천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잿가루 속에 파묻으라고 지껄이면서 1950년대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천3백83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가장 잔인하고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귀축 같은 만행을 자행했다는 온갖 자료를 보여주고 있었다. 9백여 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강제로 방공호에 몰아넣은 뒤 공기구멍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 학살했다든지, 수많은 여성들을 온천 휴양소에 붙잡아다 농락한 뒤 연못에 빠뜨리고 수류탄을 던져 무참히 죽였다든지... 차마 그랬을까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처럼 신천 학살은 무고한 신천의 주민들이 대거 학살된 사건이다. 신천 학살이 미군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건의 실상은 신천 학살이 ‘신천 군내 반공청년들’에 의해 벌어진 것이었다. 같은 지역에 살았던 주민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사실은 더 큰 충격을 준다.


▶ 여수와 순천에서 왜 그들은 죽어야 했는가, ‘여순사건 주민 학살’

© 임형두, “사진집 ‘1948, 칼 마이더스가 본 여순사건’ 출간”, <연합뉴스>, 2019. 12. 12. 中 지영사 제공 사진 첨부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국방경비대 14연대에 의해 시작된 사건이다. 여순사건에는 많은 배경과 전개 과정이 있지만 주민의 집단 희생에 집중해 보고자 한다. 여순사건은 제주 4.3보다 반 년 뒤에 일어났지만 제주 4.3의 큰 희생은 여순사건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정부 수립과 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주민 집단학살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주민 학살은 여수, 순천을 비롯하여 여수군 소속 여러 섬과 보성 등지에서도 일어났다. 또한 반란군 토벌 과정에서 구례 등 지리산 지역 주민들이 대거 집단희생되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과 큰 관련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부역자 색출이 한창 진행 중이던 11월 5일 발표한 여순사건 담화에서 어린아이들이나 여학생들이 총질하고 심악한 짓을 저지른 것을 개탄하고,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25일 계엄령을 선포한 뒤 김완룡 법무관을 불러 “임자가 가서 한 달 동안 그 빨갱이들 전부 다 재판해서 토살하고 올라오라. 그럼 계엄령을 해제하겠다.”고 말했다. 한 논문에서는 광주, 여주, 순천에서 열린 군법 재판에서 단 8일 동안 무려 1,500명이 처리된 것으로 나와있다. 또한 각지에서 행해진 고등군법회의에서 1,931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그중 691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른 한 자료에는 대전 군법회의에서 4,750명이 재판을 받아 3,715명이 혐의자, 1,035명이 불기소 석방자 판정을 받은 것으로 써있고, 사형은 곧 집행되었다. 


여순사건에서는 좌익에 의한 우익의 희생도 컸지만 군경과 우익에 의한 주민 학살이 훨씬 규모가 컸다. 취조관의 재량에 따라 즉결 처분되거나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토벌군에 의해 주민들이 현지에서 집단 희생되었다. 이는 제주 4.3으로 이어져 많은 주민들이 집단 학살되었고,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전국 각지에서 훨씬 더 큰 학살이 자행되었다.


▶ 보복 학살이 더 문제였던,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 학살

© Hamish McDonald Asia-Pacific Editor, “South Korea owns up to brutal past”, <The Sydney Morning Herald>, November 15, 2008. 中 기사 사진 첨부

전쟁 이후의 학살은 형무소 재소자 학살,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 학살, 경찰과 군에 의한 함정 학살, 미군에 의한 학살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중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은 보도연맹원 집단 학살이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경부터 준비해 6월 5일 발족한 단체로 사상계 검사들이 임의로 만든 단체였다. 


보도연맹원 학살의 자료는 첫 번째로 치안국과 관련된다. 6월 25일 치안국장이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을 발동한 것은 당연한 조치이지만, 6월 29일에 통첩한 ‘불순분자 구속의 건’, 6월 30일에 통첩한 ‘불순분자 구속 처리의 건’은 바로 보도연맹원 집단학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인민군이 점령을 못했거나 잠시 동안만 점령했던 경남이 가장 상세하고 다른 지역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자들은 수원 이남 지역부터 구금되어 7·8월에 집단 학살되었다. 7월 11일 충북 청원군 북이면 옥녀봉에서 8백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 밖에도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제주도 등 거의 모든 지역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형무소 학살은 대전형무소, 대구형무소, 부산형무소에서의 학살이 규모가 컸는데, 대전형무소 재소자를 학살한 대덕군 산내면에서는 보도연맹원 등도 함께 학살되었다. 


전쟁 초기에 군·경이 자행한 이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이후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미처 피난하지 못한 우익인사들에 대한 보복 학살을 초래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즉, 부모·형제·친지를 보도연맹 학살로 잃은 가족들은 그 보복으로 학살을 자행한 경찰관 및 가족을 살해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보도연맹 학살이 휩쓸고 지나간 지역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벌어졌던 추세였다. 우리가 흔히 ‘인민재판’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대부분 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보복 학살이었다. 보복 학살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미군과 국군이 북상하면서 인민군에 협력했던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재현되었다. 한 미국인은 “피학살자 중에는 어린이·임산부·노인 등 부역자로 처벌받을 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고 말했다. 학살이 또 다른 학살을 낳으며, 그에 따라 많은 무고한 죽음이 발생했다. 


보도연맹원 피해 규모는 확정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데,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희생자 수 추산이 가능한 몇 개 군의 경우 보도연맹원 중 30-70%가 학살된 것으로 나타났고, 각 군에서 적게는 100여 명, 많게는 1,000여 명 정도가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다. 그리고 자료나 진술을 통해 추정 희생자 수를 산출했다. 이에 따르면 남한 149개 시·군 중 114개 시·군에서 희생 사실이 확인되었고, 희생자 수를 확인한 71개 시·군중 100명 미만이 11곳, 100-199명이 18곳, 200-299명이 12곳, 300-499명이 9곳, 500-999명이 18곳, 1천 명 이상이 충남 대전(대덕 포함)과 경북 청도로 나타났다. 보도연맹원 학살로 부모 모두를 잃은 강진상 씨는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라는 다큐 방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총살당하고 그 총살된 시신을 찾아 묻은 어머니도 총살되었다고 한다. 강진상 씨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이유로 공부도 취업도 할 수 없으며 살아갔다.


▶ 전쟁과 관련된 또 다른 주민 학살에 관하여

© 이상우 감독의 영화 <작은 연못> 스틸컷

함정 학살 전남의 해남·완도 등에서 있었는데, 1950년 7월 하순 퇴각하던 나주 경찰서 소속 경찰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하여 인민군 동조자를 색출한다는 방법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사진은 노근리 학살을 다룬 영화 <작은 연못>의 스틸컷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노근리 학살은 1950년 7월 하순 피난민처럼 위장한 인민군에게 큰 피해를 입어 의심이 드는 피난민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에 따라 노근리 부근의 주민과 피난민 300-400여 명이 미군에 의해 희생된 사건이다. 사실 미군에 의한 학살은 대부분 공습에 의한 것이었고 거의 다 피난민이 희생자여서 드러난 학살 사건이 적어 진상 규명을 하기 어렵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되어 인민군과 좌익세력이 도처에서 퇴각하고 피신할 때도 많은 학살이 뒤따랐는데, 옥구군 미면 인민위원회위원장 김행규 등은 1950년 9월 하순에 주민 574명을 집단 학살했다. 대규모 주민 집단 학살은 1950년 11월부터 빨치산 토벌 임무를 받은 11사단에 의해서 자행되었다. 단일 지역에서 있었던 최대 규모의 학살은 산청군 금서면 가현에서 90여 명을, 방곡에서 180여 명을, 점촌에서 42명을 학살하는 등 하루에 529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전후로 많은 민간인들이 ‘빨갱이’라는 말과 함께 대규모 학살을 당했고 그 ‘빨갱이’의 가족이라며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그 흔적은 전국 각지에 남아 있고 과거의 일로 고통받는 많은 유가족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민 학살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심지어 여순사건, 보도연맹원 학살 등은 정확한 피해 규모를 추정해야 하는 등 충분한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전쟁이니까 불가피하게 죽음을 맞이했겠다고 생각하지만 동족에 의해 가해진 의도적이고 참혹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존재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 중국·소련·미국뿐만 아니라 20개국 이상이 한국 땅에서 싸운 특수한 국제전이다. 전 세계의 군인들이 유엔군에 참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머나먼 타국에서 희생되었다. 한국전쟁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원인, 진행과정, 국제적 영향이 아닌 사람들의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복잡한 한국전쟁의 이야기 속에서 오늘날의 사람들은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정전협정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어느 보수 성향의 남한군 하급 장교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탐구를 마치며 그의 일기 내용을 통해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을 마무리해보고자 한다.

“6.25사변이라고도 부르고 한국전쟁이라고도 부르는 이 전쟁은 우리들의 싸움인 동시에 강대국들의 전쟁이다. 아니 우리들은 강대국 간의 대리전을 치렀다. 우리들은 용병이고 총탄 받이였다. 우리들은 수백만의 동포를 죽인 죄인이며 바보 천치 못난 것들이다. 입이 백 개라도 변명할 길이 없다. 무슨 까닭에 피를 흘리고 무슨 까닭에 죽었는가 하는 의문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참고 자료 : 

박동찬, 「[오늘에 살아있는 역사 2] 한국전쟁의 숨겨진 진실, 양민학살사건」, 『내일을 여는 역사 제2호』, 재단법인 내일을여는역사재단, 2000. 07.

박영률·박진희, 「신천학살은 기독교와 사회주의 대립의 산물」, 『월간말』 2001년도 7월호(통권 181호), 월간말, 2001. 07.

서중석, 「이승만과 여순사건」, 『역사비평』 2009년 봄호(통권 86호), 역사비평사, 2009. 02.

서중석, 「[특집 : 6·25 전쟁, 그 과거와 현재] 한국전쟁과 양민 학살」, 『통일시론』 통권7호, 청명문화재단, 2000. 06.

서중석, 「특집 : 전쟁과 고통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집단학살의 연구 방향」, 『사림(성대사림) 36권 0호』,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