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재하는가?
-통 속의 뇌 논의와 매트릭스

  • 465호
  • 기사입력 2021.04.13
  • 취재 박기성 기자
  • 편집 김민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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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장자가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정말로 나비가 된 듯 생생하였다. 진실로 유쾌하고 마음에 맞아 따라가다 보니, 자신이 장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갑자기 잠을 깨어 보니 바로 놀랍게도 장자였다.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속에서 장자가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장자와 나비는 반드시 다름이 있다. 이것을 만물의 변화라고 한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장자의 제물론 중 호접지몽 설화의 내용이다. 이 설화의 정확한 중심 내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호접지몽 설화를 통해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과연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이 실재하는가? 더 나아가 주변 사물들과 그들이 이루는 세계를 인식하는 나 자신 역시 실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당연히 우리는 스스로가 실재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직관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존재에 대한 이 문제를 논증하려는 움직임은 비단 장자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내가 인식하는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논의는 서양 철학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통 속의 뇌’ 논증을 통해, 이번 학술 섹션에서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실재성에 대한 논의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통 속의 뇌’ 논증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데카르트의 악마’라는 개념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의 악마란 사악한 악마가 개인에게 영향을 줘 그 사람의 모든 감각기관이 잘못된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사고 실험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이 전능한 악마에 의해 우리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악마 실험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오늘 소개할 ‘통 속의 뇌’이다. 미국의 철학자 힐러리 퍼트넘이 제시한 통 속의 뇌 논의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뇌를 몸과 분리해 통 속에 넣고 그 생명력을 유지시킨 상태에서, 두뇌에 컴퓨터로 외부 자극을 주어 뇌가 가상의 환경만을 느끼도록 한다. 그 결과 뇌는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세계가 실재하는 세계인지, 아니면 컴퓨터의 자극이 만들어 낸 허상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이 통 속의 뇌 가설이다.


퍼트넘은 스스로 제시한 가설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반박한다. 퍼트넘은 우선 우리가 통 속의 뇌라면 우리는 스스로가 ‘통 속의 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체를 떠올릴 수 없다고 말한다. 퍼트넘에 따르면, 통 속의 뇌는 스스로가 ‘통 속의 뇌’일지도 모른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데 ‘통’이나 ‘뇌’라는 표현이 현실 세계의 통이나 뇌를 가리킬 수 없기 때문에 애초에 의도했던 회의론적 가정을 정합적으로 생각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 통 속의 뇌가 ‘통 속의 뇌’라는 생각을 하고 언어적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인과적으로 관계 맺고 있는 대상은 사실상 컴퓨터에서 전해져 온 전기적 자극이다. 


즉, 이것이 ‘통’이나 ‘뇌’라고 부르는 것은 컴퓨터가 전기적 자극을 통하여 일으킨 가상현실 속에 등장하는 통이나 뇌이다. 즉, 통 속의 뇌가 경험하는 통이나 뇌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통이나 뇌가 아니라,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통이나 뇌이다. 그런데, 통 속의 뇌가 스스로 ‘통 속의 뇌’일지 모른다는 가정을 통하여 제기하고자 하는 회의론적 가설은 이 표현들이 현실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통 속의 뇌를 가리킴으로써만 정합적일 수 있다. 하지만, 만일 통속의 뇌라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실제의 통이나 뇌 사이에 의미론적으로 적절한 어떠한 인과관계도 맺고 있지 못하다. 이 통 속의 뇌가 실제로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가상현실 속의 통과 뇌일 뿐이며, 그런 의미에서‘통 속의 뇌’로서 지칭되는 대상은 통 속의 뇌일 뿐이다. 이러한 고려에 기초하여 퍼트넘은 만일 우리가 통 속의 뇌에 불과하다면, 우리 스스로는 ‘우리 스스로가 통속의 뇌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정합적으로 생각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 역시 자신이 제시한 악마 실험에 대해 반박한다. 그는 <제2 성찰>에서 ‘만약 전지전능한 기만자가 나를 속이고 있다면, 나는 곧 의심의 여지없이 존재한다. 그가 아무리 날 속이고 있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무언가라고 생각하는 한, 나를 아예 없게 만들 수는 없다. 이렇듯 모든 것을 고찰해 보건대, ‘나는 있다,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야말로 매번 생각이 들거나 생각을 할 때마다 반드시 참일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데카르트는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정보가 거짓일지라도, 사유하는 나 자신은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생각하고 그렇기에 존재한다는 것은 진실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인식과 존재에 대한 이러한 논의들을 잘 설명한 영화가 있다. 1999년 개봉한 <매트릭스> 속 세계에서는 인간에 지배당하던 기계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인간을 배터리로 이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동력원으로 삼았다. 인간을 일종의 배터리로 이용해 기계를 위한 동력을 생산하는 장치가 바로 영화에서 그리고 있는 매트릭스인 것이다. 주인공 ‘네오’가 매트릭스 속에서 겪는 세계는 인간이 경험한 세계와 동일하다. 그러나 네오가 지금까지 경험하고 살아온 세계는 매트릭스에서 그의 두뇌로 전달된 자극으로 이루어진 가상현실에 불과한 허상에 불과하다. 작중 예언자 모피어스가 전해준 빨간 알약을 복용한 후 그가 발견한 진실은 메인 프레임에 연결된 채로 인큐베이터 안에서 양육되면서 매트릭스에 동력원으로 작용하던 스스로였다. 이러한 ‘매트릭스’ 속 설정은 앞서 언급한 퍼트넘과 데카르트, 그리고 이외에 유사한 철학적 의문들을 제기한다. 단순히 인간과 기계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치열한 사유와 논의를 SF의 형태로 담았다는 점에서 매트릭스는 현재에도 꾸준히 그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위의 내용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가 실재한다는 명제가 참이라는 결론을 확인했다. 그러나 퍼트넘과 데카르트의 주장 역시 한계점이 존재한다. 퍼트넘은 통 속의 뇌를 경험하지 않아도 통 속의 뇌라는 개념을 알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간과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우리가 통 속의 뇌라면, 이라는 문장은 필연적으로 거짓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통 속의 뇌라면, 우리가 라는 문장을 생각하거나 발화할 때, 우리는 ‘통’ 이라는 단어로 이미지 상의 통을, ‘두뇌’라는 단어로 이미지 상의 두뇌만을 지칭할 수 있지, 실제의 통과 두뇌를 지칭하는데 실패함으로써, 라는 문장이 필연적으로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퍼트넘 논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라는 문장"은 스스로를 논파하는 문장이며 따라서 필연적으로 거짓인 문장이다. 따라서 “통 속의 뇌 가설” 역시 스스로를 논파하는 가설이다. 그리고 “통 속의 뇌 가설”은 퍼트넘식 “회의주의”이므로, “통 속의 뇌 가설”이 논파된다면 “회의주의”도 논파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실재성에 대한 논의는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즉, 우리 스스로의 실재성을 명확하게 입증할 방도가 아직은 없다는 것이다. 내가 보고 있는 이 기사는 실재하는가? 기사 이외에도 나를 둘러싼 세상은 실재하는가? 이 세상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나는 실재하는가? 더 나아가, 나는 무엇인가? 이렇게 한 번쯤 자신의 실재성에 대해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우리는 사유와 고민을 통해 퍼트넘과 데카르트를 반박하고 매트릭스를 전적으로 뒤엎는 영화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사진 출처>

http://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030

https://purplephilosophy.com/descartes-and-the-demon/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keanu-reeves-reacts-the-matrix-trans-allegory_kr_5f3c73d2c5b61551404e9116


<자료 출처>

한국고전번역원

https://www.huffingtonpost.kr/entry/keanu-reeves-reacts-the-matrix-trans-allegory_kr_5f3c73d2c5b61551404e9116

철학입문 – 롤란드 행케

‘퍼트남의 통 속의 뇌 논증에 대한 비판’ – 박제철

‘우리가 매트릭스 속에 살고 있다면’ – 신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