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녀와 남자 간호사

의녀와 남자 간호사

  • 334호
  • 기사입력 2015.10.28
  • 편집 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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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조선시대에는 누가 여성 환자를 진료했을까?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불문율이 존재하던 시절인 만큼 남성 의원(의사)이 여성 환자를 진료한다는 것은 대단히 난감한 문제였다. 그래서 조선 초기 태종 때부터 조정에서는 관기(官妓) 중에서 여성 의료인을 두었다. 보통 의녀(醫女)라고 불렸다. 예전에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TV 드라마의 주인공 대장금은 실존 인물로서, 16세기 중종 때 의녀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시대 의녀의 활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의료활동이었다. 궁중과 양반가문의 여성을 진맥하고, 침을 놓고, 약의 조제와 복용을 상의하고, 출산을 돕는 것이 대표적인 활동이었다. 이와 함께 환자 간호나 국왕의 수발을 드는 일도 맡았다. 하지만 의녀의 활동이 의료영역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각종 범죄사건의 여성 피의자를 수색하는 일, 각종 연회에 불려가 취흥을 돋우는 기생 노릇도 맡았다. 결국 조선시대 의녀는 여의사, 간호사, 여형사, 그리고 기생까지 1인 4역을 해냈다.

세월이 흘러 근대화가 모색되던 1885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설립했다. 이때 진료 책임자였던 의료선교사 알렌의 최대 고민은 여성 환자 진료 문제였다. 남자 의사가, 그것도 서양인이 조선의 상류층 여인들을 치료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양반집 마당에서 사람들을 내보내고 통행을 금지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또 자기 몸을 남자 의사, 그것도 서양인 의사에게 내어 보이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진찰을 완강히 거부하는 여성들도 많았다. 조대비(신정왕후)를 진찰할 때는 발이 드리워진 방에서 진맥할 신체 부위 외에는 모두 천으로 가린 채 진맥했다. 명성황후가 병환을 앓고 있을 때에는 천으로 감싼 왕비의 팔을 칸막이를 통해서 2~3센티미터 정도만 볼 수 있었다.


알렌은 이런 불편을 해결하기 위해 기생들 중에서 사람들을 뽑아 의술 학습을 시켜 여의사나 간호사로 키우려 했다. 그러나 기녀들은 제중원에 배치되자마자 연회에 참석하여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불러야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당시 조선에서 총독처럼 기세가 등등하던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팔려가고 말았다. 이 문제는 결국 미국인 여의사가 제중원에 들어옴으로써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그러나 왕족과 명망가문 등 상류사회의 여성들만 혜택을 볼 수 있었을 뿐 서민 가정의 여성들에게 서양인 여의사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일 뿐이었다.

1921년 캐나다 여의사 머레이는 우리나라에 건너와 함흥 지역의 의료선교를 담당했다. 그런데 그녀의 가장 큰 고민 역시 한국인 간호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간호사는 매우 천하고 험한 직업, 즉 요즘 말로 3D 업종에 속했다. 젊은 여성이 자기 식구가 아닌 남을, 그것도 남자를 간호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타인의 속살을 보고 매만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런 만큼 딸에게 간호사가 되라고 할 부모가 어디 있으랴? 공립병원이든 선교병원이든 간호사를 양성하려고 애를 썼지만, 성과는 별로 없었다. 그래서 머레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3명의 남성 간호사를 훈련시켰다. 그러나 이들 역시 남성 환자에게만 효과가 컸을 뿐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여성 환자 진료가 사회문화적으로 정착되기까지는 참으로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남성 의사가 여성 환자를 진료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또 1920년대만 해도 남성 환자를 돌볼 여성 간호사가 없어서 남성 간호사를 키워야 했다. 그러나 지성이면 감천이었다. 이 땅의 모든 의료인들이 노력한 덕분에 우리 한국 사회도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1940년경에는 간호사가 존경받는 직업으로 부상하여 ‘선생’이라 불렸다. 머레이는 회고록에서 “‘선생’이라는 칭호가 간호사에게 쓰이리라고 상상했던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라고 반문했을 정도다. 여성 환자 진료에 주력해온 남성 의사, 남성 환자 진료에 주력해온 여성 의사, 남성 환자 간호에 힘써온 여성 간호사 여러분들께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