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명수와 키니네

활명수와 키니네

  • 336호
  • 기사입력 2015.11.27
  • 편집 김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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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동서의학 합작의 신약(新藥), 활명수

100여 년 전에 한국인들은 배가 아프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활명수를 마셨다. 당시 사실상 한약이 유일했는데, 달이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먹기도 불편해서 신속한 효과를 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작은 병에 든 활명수는 평소에 사다 놓았다가 마시기만 하면 되었고, 효과도 빨랐다. 약 도매상이 많은 종로에 나가 큰 병에 든 활명수 여러 병을 사다가 재워놓고 온 가족이 먹는 집도 있었다. 즉 예나 지금이나 활명수는 소화불량, 과식, 체증 등에 먹는 소화제의 대명사격이었다.

활명수를 처음 만든 사람은 충북 충주 출신으로 무과에 급제해 선전관(宣傳官)으로 활동하던 민병호(閔幷浩)였다. 선전관이면 국왕의 경호 무관이다. 무예가 뛰어나고, 임금의 신임을 얻은 이들이었다. 그런데 민병호는 평소 한약에도 능통해서 궁중의 약 처방에도 실력을 발휘했던 듯하다. 어느 날 그는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1885년 개원)에서 일하는 사람을 통해 서양의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곧 서양의학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큰 가마솥에 위장약 계통의 한약 건재들을 달여서 우려낸 진한 팅크가 복방방향팅크(復方芳香丁幾)인데, 그는 여기에 수입 약재인 아선약(阿仙藥), 정향(丁香) 가루를 탄 뒤 새로 들어온 클로로포름과 멘톨(박하)을 적절히 배합해 활명수를 만들었다. 그는 이웃과 개신교 교인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활명수를 나눠주었다. 1897년에는 아들 민강(閔?)과 함께 ‘동화약방’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활명수 판매를 시작했다.

1880년대에 고종과 왕비(명성황후)는 국가 차원의 개화 프로젝트를 세우고 실천에 나섰다. ‘동도서기(東道西器)’, 정치체제, 사회 질서, 사상, 문화, 종교 등 인간 사회의 근본이 되는 부분은 우리 것을 고수하되 산업, 과학기술, 무기 등 실용적인 분야는 서구의 근대 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을 꾀한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활명수는 한약, 즉 전통의학에 능통한 무인이 제중원의 서양의학을 배우고 응용하여 만든 약이었다. 즉 한약과 양약, 동서의학을 합작하여 만든 제3의 신약이었다. 개항기나 일제강점기에 나온 약들 가운데 □□수(水), △△산(散), ○○고(膏) 등의 이름이 붙은 약들은 한국인들의 상비약으로 애용되었는데, 대부분 동서의학 합작의 신약으로서 ‘동도서기’형 신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을 떼는’ 특효약, 금계랍

말라리아는 병원충을 가진 학질모기에게 물려서 감염되는 전염병이다. 갑자기 고열이 나며 설사, 구토, 발작 등을 일으키고 비장이 부으면서 빈혈 증상을 보인다. 주로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 등 열대지방에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개항기에 학질이라는 이름으로 말라리아가 유행했다. 어떤 사람, 또는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통해 굉장히 황당하고 분한 경험을 했을 때 흔히 ‘학을 뗐다’고 하는데, 여기서 ‘학’이 바로 학질이다. 고통스럽기 그지없고 치사율이 높은 학질에 걸렸다가 살아난 사람은 아주 독한 사람이라고 해서 이런 표현이 생긴 것이다.

키니네는 말라리아의 특효약으로 유명하다. 킨코나 나무껍질에서 추출한 약제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키네네를 음차하여 금계랍(金鷄蠟) 또는 금계납(金鷄納)이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제중원을 찾은 환자들 중 말라리아 환자가 많았는데, 제중원에 가면 치료약인 키니네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896년부터 발행된 독립신문을 보면 금계랍을 파는 중간상인을 모집하는 독일 무역상 ‘세창양행’의 광고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의약품 광고의 효시가 된 금계랍 광고는 독립신문에만 600여 회 이상 실렸다.

황현은 “매천야록”에 “우두법이 나와 어린아이들이 잘 자라고, 금계랍이 나와 노인들이 장수를 누린다는 유행가가 널리 퍼졌다”고 기록했다. 당시 민간에 키니네의 효과가 널리 알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계랍이 서양의학에 대한 한국인들의 경계심을 푸는 데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이다.


한국인들과 동고동락한 활명수와 키니네

활명수는 맛있는 편이어서 청량음료가 없던 시절 아이들이 홀짝 홀짝 마시곤 했다. 반면에 키니네는 무척 써서 아이들이 젖을 떼거나 손가락 빠는 것을 막는 데 쓰였다. 무엇보다도 활명수와 키니네는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고 지독한 열병을 떼어내는 신통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활명수와 키니네는 한국인들의 상비약으로서 한국인들과 동고동락했다. 즉 단순히 약이 아니라 한국인들 삶의 동반자이자 사회문화적 아이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