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 양의(洋醫)

우리나라 최초 양의(洋醫)

  • 338호
  • 기사입력 2015.12.24
  • 편집 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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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 한국인 최초 양의, 서재필

  1892;년 미국 컬럼비안 의과대학(지금의 조지 워싱턴대학 의대) 졸업생들이 학사모와 졸업가운을 입고 사진을 찍었다. 셋째 줄 왼쪽에서 세 번째 졸업생의 이름은 필립 제이손(Philip Jaisohn). 이름만 봐서는 여느 미국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러나 사진을 자세히 보면 동양인임에 틀림없다. 비록 1890년 6월 미국 시민으로 귀화했지만. 필립 제이손의 본명은 무엇일까?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기억하는 이름, 바로 갑신정변과 “독립신문”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서재필(徐載弼)이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을 주도했다가 실패한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 고국에 남은 그의 가족은 모두 죽었다. 부모님, 형, 아내는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생은 참형되었다. 두 살 난 아들은 굶어죽었다. 미국에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그의 심경은 어땠을까?

  그러나 서재필은 온갖 슬픔과 좌절감을 딛고 일어나 미국에서 7년 간 눈물겨운 노력을 벌였다. 1892년 컬럼비안 의과대학 야간부를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로 의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가필드(Garfield)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치고, 1893년 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한국인 최초로 양의가 된 것이다.

   1895년 12월 서재필은 고종과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고 고국에 돌아왔다. 11년 만의 귀환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처럼, ‘역적’에서 ‘미국인 의사’로 변신해서. 그의 직함은 중추원 고문이었고, 월급 300달러의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여 한국인의 근대적 정치의식과 사회의식 형성에 기여했다. 의사답게 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독립신문”에 기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종의 측근들과 외세에 막혀 조국 근대화의 꿈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 한국 여성 최초 양의, 박에스터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양의인 박에스터가 결혼 무렵에 찍은 사진. 그녀의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으로 18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 다녔는데, 특히 영어를 잘했다. 그래서 감리교계에서 운영한 여성 전문병원 보구여관(保救女館)에서 영어를 통역하며 약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했다. 어느 날 여의사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의 언청이 수술을 보고 감탄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1893년 감리교 신자인 박유산과 결혼했다. 세례명이 에스터(Esther)였던 그녀는 이때부터 남편 성을 따라 박에스터라 불렸다.

  1895;년 박에스터는 로제타 셔우드 홀의 소개로 미국에 건너갔다. 1900년 볼티모어여자의과대학(지금의 존스 홉킨스대학)을 졸업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양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식당에서 일하며 아내를 뒷바라지해 온 남편은 그녀가 졸업하기 3주 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에스터는 귀국 후 보구여관과 평양의 광혜여원(廣惠女院) 등 여성 전문병원에서 여성 환자 진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평안도, 황해도 등 지방 순회 진료도 마다하지 않았다. 로제타 셔우드 홀이 설립한 맹아학교 일도 열심히 돌봤다. 그러나 역시 과로는 만병의 근원이었다. 그녀는 1910년 35세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한국에서 배출된 최초 양의들

  한국 남녀 최초의 양의인 서재필과 박에스터는 모두 미국에서 의과대학을 나왔다. 1899년에는 김익남(金益南)이 한국인 최초로 일본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안에서 최초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양의가 된 사람은 누구일까? 1902년 의학교(醫學校,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를 최초로 졸업한 유병필(劉秉珌), 김교준(金敎準) 등 19명이다.

  대한제국 정부가 국립 의학교를 세우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의학교의 교육연한은 3년이었으며, 모든 경비는 나라에서 부담했다. 교과목은 동물, 식물, 물리, 화학, 해부, 약물, 진단, 내과, 외과, 위생, 종두 등 16과목이었다. 학사 관리가 엄격히 운영되어서 의학교 학생은 함부로 학교를 그만 둘 수 없었다.

  1902;년 7월 4일, 마침내 19명의 학생이 졸업시험을 통과했다. 졸업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의사로서의 모든 자격과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 땅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식 의사들이 배출된 것이다. 그러나 1907년 한국 군대가 강제 해산될 때까지 개원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들은 주로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군인 장병의 질병 치료에 주력했고, 더 나아가서 한국 사회에 근대의학을 정착시키고 확산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윗 사진의 주인공인 김교준은 1884년에 서울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특히 그의 맏형은 대종교의 제2대 교주인 김교헌(金敎憲)이다. 김교준은 1899년 의학교에 입학해 1902년 우등으로 졸업했다. 19명의 졸업생 중 최연소였다. 의학교 교관을 거쳐 육군 군의, 무관학교 의관(醫官) 등을 지내며 군진의료의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1910년대에 김교헌을 따라 만주로 이주, 교민들을 대상으로 의료활동을 벌였다. 북간도지역 대종교 항일무장투쟁도 도왔다. 해방 직후에 대종교 총본사를 국내로 옮기는 작업을 주도했고, 1962년 대종교 제5대 총전교(總典敎), 즉 교주에 선출되어 2년 동안 시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