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결핵 이야기

일제강점기의 결핵 이야기

  • 344호
  • 기사입력 2016.03.27
  • 취재 이지원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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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해마다 4만 명이 숨지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질병 중 하나인 결핵은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를 휩쓸었다. 햇볕을 자주 쬐지 못하는 청소년과 영양 결핍자, 빈민 등이 많이 걸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가, 음악가 등 창작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나 젊고 아리따운 여성들이 잘 걸려 '천재와 미인의 병'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인들은 영양상태 면에서 면역체계가 부실하다 보니 쉽사리 결핵균의 표적이 되곤 했다. 1930년대 후반 조선의 결핵환자는 대략 40만 명. 해마다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4만 명 정도였다.

조선총독부는 1918년 1월 15일 조선총독부령 제4호로 '폐결핵 예방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환자로 판명된 이들은 격리 수용하게 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대응은 이와 같은 관련 법규 제정과 기초적인 예방책에 머물렀다.

적극적으로 결핵 치료책을 모색한 것은 선교병원들이었다. 세브란스병원, 미국북감리회 소속이 해주 구세요양원, 캐나다장로회 소속의 함흥 제혜병원, 천주교의 성모병원 등이 결핵환자 치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1928년에 세운 해주 구세요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원으로 결핵 퇴치의 상징적인 의료기관이었다.

무지가 부른 비극

일제강점기에는 결핵 환자나 가족의 무지와 미신 탓에 불행한 사건이 잇따르곤 했다. 셔우드 홀의 회고를 들어보자.

나라 전체를 보더라도, 1910년대는 암울한 시기였다. 조선인들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헌병과 순사들의 횡포에 시달려야 했다. 토지조사사업과 과중한 세금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도 몰락해갔다. 사회문화 분야에서도 민족차별을 당했고, 조선인들은 열등하다는 궤변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야만 했다.

형이는 배재고보 교장인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보낸 학생이었다. 요양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중환자였다. 고열, 심한 기침, 거기다 매일같이 거의 한 컵이나 되는 가래를 토했다. 인공기흉 요법을 실시하는 한편 완화 치료법도 병행했다. 치료 효과가 좋아서 회복이 빨랐다. 본인도 새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어느덧 형이는 집에 돌아가고 싶어 퇴원하겠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퇴원이 이르다고 달랬지만, 그는 자기 병이 다 나았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형이는 요양원을 떠났다. 그를 맞이한 식구들은 멀찌감치 서서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병원에서 뱀탕이나 사슴 생피를 주더냐?" 할머니가 물었다. "아니요. 가슴에 공기를 집어넣는 특수 치료를 받았어요. 휴식과 일광욕과 우유 먹는 법도 배웠는걸요." "그럴 줄 알았다. 당장 가서 무당을 불러오너라. 외국 악마들이 경영하는 곳에 있었으니 이 아이 몸에는 악귀가 들어 있다." 형이는 할머니의 말에 움찔했다. 이제는 그런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피로감을 느꼈고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는 힘없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갔다. 그 후 몇 주일 동안은 불행한 기간이었다. 형이의 가족들은 폐병에 대한 공포감을 억누르지 못했고, 그의 옛 친구들도 그를 피했다. 어디를 가도 그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절망적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라고 성화를 부렸다. 그는 집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아버지의 제안을 얼른 받아들였다.

몇 달 후 우리는 형이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다시 심한 병에 걸렸으니 되돌아오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양원에 빈자리가 없었다. 나는 대기환자 명단에 올려두었으니 기다려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 슬픈 소식이 날아들었다. 형이는 조상이 묻힌 옆으로 간 것이다.(출처: "닥터 홀의 조선회상")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 : 거북선에서 남대문으로

셔우드 홀은 한국인들에게 결핵퇴치운동을 홍보하고 결핵환자 치료자금을 모으기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기로 했다. 때마침 그와 친한 일본인 관리가 크리스마스실 발행에 대해 적극 동조해주었다. 그는 직접 크리스마스실을 도안하면서 한국인들의 열정과 가능성을 부채질할 수 있는 그림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국의 아이들이 어른들이 들려주는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이야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점을 떠올렸다. 그는 도안에서 거북선이 국가의 적인 결핵을 향해 발포하도록 대포를 배치했다. 그러나 일본인 관리는 거북선 도안에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지난날 일본군의 패전을 떠올린 것이다. 결국 셔우드 홀은 심사숙고 끝에 새 도안을 서울의 남대문으로 결정했다. 그는 남대문을 결핵을 방어하는 보루로 설정했다. 마침내 한국에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실이 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