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나병 이야기

일제강점기의 나병 이야기

  • 346호
  • 기사입력 2016.04.27
  • 취재 이지원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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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세상에서 가장 슬픈 면회

1947년 소록도갱생원(지금의 국립소록도병원)의 월례 정기 면회. 병동에 격리 수용되어 있던 나병(한센병) 환자들이 줄지어 서있다. 오늘은 환자이기에 앞서 아빠요 엄마다. 한 달 만에 아이들을 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그러나 혹시 어디 아픈 데라도 있어서 못 보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앞선다. 반대편에 등장한 아이들. 미감아(未感兒)보호소에 수용된 건강한 아이들이다. 이 세상에 아빠 엄마만큼 그리운 존재가 또 있을까? 아빠 등에 업혀, 엄마 품에 안겨 어리광이라도 부려보고 싶지만, 그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하다. 접촉 감염을 우려해 부모와 자녀가 길가에 마주 보고 늘어서서(이때 자녀들이 바람을 등지고 선다) 바라만 봐야 한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슬픈 면회가 또 있을까?


하늘도 무심한데 일제의 차별까지

천형(天刑), 즉 하늘이 내린 형벌로 알려진 나병(한센병). 인류 역사상 전염병을 둘러싸고 '격리'라는 사회적인 통제가 시작된 첫 사례다. 그만큼 가공할만한 질병이었다. 나병 발생이 극에 달했던 13세기 무렵, 유럽에는 무려 13,000여 개의 전용 병원이 세워졌다고 한다. 전염에 대한 일반인들의 공포가 너무 강하다 보니, 학자들이 발 벗고 나서서 '한센병'이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 1871년 원인균을 발견한 노르웨이의 의사 한센(Gerhard Armauer Hansen)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나병은 무엇보다도 사람의 겉모습이 심하게 변형되는 질환이다. 그래서 환자들은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해 가슴속까지 썩어간다. 전통적으로 피부와 외형이 문드러진다고 해서 '문둥이'라고 불렸던 나환자들은, 어린아이를 잡아먹는다는 근거 없는 소문 때문에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었다. 달리 말하면 철저히 소외된 이들이었다. 일부는 사립 피병원(避病院)에 들어갔으나, 대다수는 외진 곳의 토굴(土窟)에서 생활하면서 인근 마을로 구걸을 다녔다. 1928년 통계에 따르면 나환자는 6,782명이었데, 실제로는 15,000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그 가운데 2,700명 내외가 유랑생활을 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나환자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둔 이들은 선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부산(1910년), 광주(1912년), 대구(1915년)에 요양소를 설치했다. 총독부도 이에 질세라 1916년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 나병 전문병원이자 나환자 수용소인 소록도자혜의원을 개설했다. 당시 총독부 내무부 제2과장 오츠카(大塚常三郞)는 총독부가 나환자 수용시설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세계 여론이 인식하게만 된다면 좋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었다. 총독부의 생각이 어디에 있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선교단체의 나환자 수용시설은 부랑자로 떠돌던 나환자들을 수용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구호소 역할을 수행했고, 환자들을 비교적 인격적으로 대우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나환자들을 사회에서 격리 수용하는 것이야말로 공중위생은 물론 치안까지 확립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각 경찰서장은 감염되었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을 검진하고 출입지역을 제한할 수 있었고, 도지사는 환자의 직업을 제한하고 요양소에 강제 수용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다. 일단 소록도자혜의원에 들어온 환자는 원장의 강력한 단속 아래 평생 격리된 채 살아야 했다. 소장 등 직원의 판단에 따라 징계와 감금도 빈번했다. 일제 말 전시체제가 형성되면서 총독부는 한국에서 선교사들을 강제 추방했고, 선교단체의 수용시설에 있던 나환자들을 강제로 소록도로 보냈다.

소록도자혜의원장 살인사건

1933년 9월, 경기도 위생과장을 지낸 스호 마사토(周防正季)가 소록도자혜의원의 제4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야망이 대단한 사람이어서 이곳을 세계 최고의 나병원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환자들을 강제 동원하여 각종 토목공사를 벌였다. 병으로 자기 몸도 가누기 어려운 환자들에게 강제노역은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기본적인 인권마저 빼앗긴 채 희망 없는 삶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환자들이 생겨났다. 굶주림과 학대에 지쳐 도망치는 환자들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실패로 끝났고, 그 대가는 혹독했다. 특히 스호 원장의 오른팔이었던 간호주임 사토(佐藤三代治)는 악랄하기 그지없어서 환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일제의 만행은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극에 달했다. 소록도에서도 전쟁물자 공출이 시작되었다.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찍어 날랐고, 소나무 숲에서 송진을 추출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스호 원장은 환자들에게 돈을 갹출하여 자기 동상을 세우고, 절을 하도록 지시했다. '원장 찬가'를 부르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42년 6월 20일 오전 8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모든 환자들이 늘어서 있었고, 스호 원장을 태운 자동차가 도착했다. 스호 원장이 조회에서 훈시하려고 자기 동상 앞으로 다가서는 순간,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너는 환자들에게 무리한 짓을 했으니 이 칼을 받아라!" 그는 원장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스호 원장은 차에 실려 옮겨 졌으나 이내 죽고 말았다.

"범인"은 이춘상(李春相). 그는 자수하면서 개인감정 때문이 아니라 환우들의 원한을 풀기 위해 결행한 의거였다고 강조했다. 그는 법정에서 원장을 살해하여 여론화되면 일반인들에게 소록도의 비참한 생활을 알리고 개선을 촉구하고 싶었다고 진술했다.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광주형무소 소록도지소에 갇혔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