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최고의 <br>외과의사, 백인제

일제강점기 최고의
외과의사, 백인제

  • 350호
  • 기사입력 2016.06.28
  • 취재 이지원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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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경성의학전문학교 수석 졸업생

백인제(白麟濟)는 1899년 평북 정주(定州)의 학자 집안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에서 가장 먼저 근대 문물을 수용한 사람은 당숙인 백이행(白彛行)이었다. 그는 전통교육으로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과 함께 정주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해 초대 교장을 지내며 근대적 민족교육에 힘썼다. 그의 영향을 받아 백인제의 집안도 일찌감치 개화의 흐름을 수용했다.

백인제는 1912~1915년에 오산학교를 다녔다. 이 학교는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와 함께 항일 비밀결사였던 신민회(新民會)의 구국운동 프로그램 중 하나로 설립되었다. 오산학교는 시설, 재정, 교과내용 등이 우수했다. 특히 이광수(李光洙), 조만식(曺晩植) 등 지사들이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오산학교에서는 백인제, 김억(金億), 김소월(金素月), 함석헌(咸錫憲), 한경직(韓景職) 등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백인제는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이하 ‘경의전’)에 입학했다. 3ㆍ1운동 발발 직전까지 3년 동안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공부벌레’였다. 당시 경의전에는 한국인 반과 일본인 반이 따로 있었고, 교과과정도 달랐다. 독일어, 해부학, 조직학 등 중요과목의 경우 일본인 반의 수업시간이 훨씬 많았다. 엄연한 민족차별이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 학생들은 3ㆍ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19년 4월 1일 현재 서울에서 구금된 학생은 모두 167명이었는데, 그 중 경의전 학생이 31명으로 가장 많았다. 백인제도 학교 당국의 민족차별과 일본인 교수, 학생들의 오만함, 더 나아가 식민지라는 현실에 울분을 느꼈다. 그래서 1919년 3월 1일 서울 시위에 적극 참여했고, 경찰에 체포되어 10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겪었다. 물론 경의전에서는 퇴학당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외과학교실 주임교수

백인제가 출옥한 1920년 초는 그의 인생을 가르는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상해로 망명해서 직접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 설움을 참고 이겨내면서 의사와 의학 연구자가 될 것인가. 그는 처절한 고민 끝에 의학 공부를 선택했다. 총독부와 경의전의 유화조치 덕분에 4학년으로 복학했다. 그러고는 이듬해 3월 수석으로 경의전을 졸업했다. 그러나 3ㆍ1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졸업과 동시에 자동 부여되는 의사면허증을 받지 못했다. 2년 동안 조선총독부의원 부수(副手)로 근무하면 의사면허를 내주겠다는 보복 조치를 감수했다.

백인제에게 주어진 일은 당시 의사라면 누구나 싫어하던 마취 일이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이었다. 마취 전문의가 없던 시절 마취는 외과의사에게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2년 동안 뛰어난 마취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가 훗날 외과의사로 대성할 수 있었던 데는 탁월한 마취 솜씨도 한 몫 단단히 했던 것이다.

백인제는 1928년 4월 구루병(佝僂病)에 관한 연구로 도쿄제국대학에서 의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인으로는 세 번째로 도쿄제대 의학박사가 된 것이다. 이 무렵만 해도 의학박사란 매우 희귀한 존재였다.

백인제는 이어서 1928년 6월 1일자로 모교 경의전의 외과학교실 주임교수가 되었다. 당시 한국인 학생이 경의전에 입학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고, 한국인 교수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특히 한국인 주임교수는 미생물학교실의 유일준(兪日濬)이 유일했다. 그런데 그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던 주임교수가 된 것이다.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

백인제는 1928~1941년 경의전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당대 제일의 외과의사라는 명성을 얻었다. 제자 장기려(張起呂)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백인제 선생의 수술에 대한 호평과 일반인의 신임도는 여간 두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각종 질환의 감별 진단에는 어느 누구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정확했습니다. 당시의 대수술은 선생님의 독무대 같은 인상을 줄 정도였습니다. 위장, 특히 위궤양, 위암, 간담관(肝膽管), 유암(乳癌), 갑상선 등의 수술을 받기 위해 오는 환자들이 많았습니다.”

백인제가 명성을 얻게 된 중요한 계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28년 오산학교 때의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문학가였던 이광수의 건강이 나빴다. 이때 백인제는 이광수의 좌신결핵(左腎結核)을 진단하고, 국내 최초로 좌신적출(左腎摘出) 수술에 성공했다. 제자 백인제가 스승 이광수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이다. 둘째, 1937년 세계 최초로 유착성(癒着性) 장폐색 환자의 폐색부 상부 위관에 공장루(空腸瘻)를 만들어 환자가 기력을 회복했을 때 장 폐색의 근치술을 실시해 그 유효성을 입증했다.

백인제는 의학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1931년 수술환자에게 수혈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나, 1938년 혈액은행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선진국의 의학계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1941년 백인제는 경의전에 사표를 내고 ‘백인제 외과의원’을 운영했다. 김희규(金熙圭), 주영재(朱永在), 윤덕선(尹德善) 등 후배, 제자들이 의료진으로 동참했다. 백외과는 그야말로 ‘문전성시’였다. 그래서 1946년까지 5년 동안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백인제는 여러 방면으로 선각자였다. 1946년 11월 우리나라 최초로 자신의 병원을 재단법인으로 만들었다.

백인제는 해방 직후 우리나라 의료계를 주도했다. 첫째, 경의전의 재건과정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탄생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해방 직후 경의전 부속병원장 겸 외과학교실 주임교수로서 진료, 교육,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1946년 10월 경의전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통합되었을 때도 서울의대 제2부속병원장 겸 제3외과학교실의 주임교수를 맡았다. 둘째, 해방 정국의 의료계 지도자로 활약했다. 서울의 개업의사들이 결성한 건국의사회와 각 의대 교수들이 결성한 조선의학연구회, 두 단체의 통합으로 이루어진 조선의학협회(지금의 대한의사협회)에서 모두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아울러 서울시의사회의 1~2대 회장, 조선외과학회의 1~3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백인제는 1950년 한국전쟁 중 납북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