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 의학생의 해방 맞이

의사 · 의학생의 해방 맞이

  • 352호
  • 기사입력 2016.07.27
  • 취재 이지원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 조회수 6128

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8·15 광복은 도둑처럼 왔다. 한국인들은 일본이 그토록 빨리 패망할 줄 몰랐다. 오죽하면 일장기를 개조한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달려 나갔을 정도였다. 한국인 의사와 의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갔을 정도였다. 또한 각자 다른 시간, 공간, 위치에서 해방을 맞았다. 어떤 이는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지금의 서울대병원)에서, 어떤 이는 서울 도심의 개인병원에서 해방을 맞았다. 어떤 이는 평양의 감옥에서, 어떤 이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평안도 깊은 산속으로 피신한 상황에서 해방을 맞았다. 그들의 회고록에서 해방 당시의 경험담을 발췌하여 소개한다.

 ● 일본인들이 감춰놓았던 태극 문양 - 주근원

1945년 8월 15일, 오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전날 저녁부터 여러 가지 풍문이 들리면서 병원 안팎으로 긴장감이 감돌았었다. 그날 아침에는 총독부 관저에 밤새 불이 켜져 있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그러더니 낮 12시에 일본 국왕의 라디오 방송이 있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무언가 중대한 일이 벌어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기대 반, 불안 반. 초조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일본인들 눈치만 보면서 공연히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11시 40분경 슬그머니 수술장을 빠져나와 라디오 있는 곳을 찾다가, 한 연구실에서 동료들과 함께 숨을 죽이며 일본 국왕의 방송을 들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하도 이상해서, 보통 사람의 화법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잡음도 심했다. 그러나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다는 말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계탑’(본관) 앞으로 뛰어나갔다. 이때 갓을 쓴 어떤 노인이 시계탑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그는 시계탑의 아랫부분을 올려다보며 소리를 질러댔다. 누군가 노인의 말을 알아듣고는 건물 안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 시계탑 아래 4면의 일장기를 닦아냈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거기에서 태극 문양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일본인들이 감춰놓았던 태극 문양을 해방과 동시에 되찾은 것이다. (출처: 함춘원의 회상)

● 애국가를 배운 적이 없어서 아리랑을 - 공병우

1945년 8월 15일. 낮 12시에 중대 방송이 있다는 벽보가 서울 시내 곳곳에 나붙었다. 나는 일본의 항복에 관한 것이라고 어림짐작만 했을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서로들 전화로 확인하고서야 일본의 항복이 틀림없다고 추측했다. 예측했던 대로 일본 국왕은 잡음이 유난히 많이 섞인 방송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연합군에게 항복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시내는 일본 헌병이 칼을 차고 다녔으니 일본의 패망을 공공연히 기뻐할 수는 없는 형편이었다.

맥아더 장군의 전단이 하늘에서 떨어진 후부터 우리는 거리로 뛰쳐나가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기세등등하던 일본인들은 풀이 죽어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불안해하며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런 감격적인 순간에 애국가를 배운 적이 없어 할 수 없이 아리랑을 목 놓아 불렀다. (출처: 나는 새 식대로 살아왔다)

● 오랜만에 우리말로 예배를 - 김명선

해방의 기쁜 소식을 8월 15일 저녁 늦게 미림형무소에서 들었다. 평양기독병원 직원이 면회를 와서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를 믿지 못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는 소식은 접할 수 있었으나 이처럼 빨리 해방이 오리라는 것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루가 지나 형무소의 간부가 나를 찾더니, 이제 한국이 해방되었으니 나가도 된다며 풀어주었다. 해방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감옥을 나서보니 평양 시내가 온통 들끓고 있었다. 집집마다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와 찬송가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평양기독병원으로 가서 직원들과 해방의 기쁨을 같이 하며 흐트러진 병원을 정돈했다. 8월 17일 아침에는 전 직원이 모인 가운데 예배를 보았다. 실로 오랜만에 우리말로 보는 예배였다. 우리말로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며 모든 직원이 벅찬 감격을 힘겨워했다. (출처: 영원한 세브란스인 김명선)

● 태극기를 달고 들어오던 기차 - 권이혁


1945년 8월 15일, 나는 저녁까지도 해방된 줄을 몰랐다. 숯을 굽는 인부가 배급 양곡 신청서를 가지고 사인장에 갔다가 돌아와서, 평화가 왔다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다. 순간 ‘혹시’하고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곧바로 사인장으로 달렸다. 약 20Km 거리였는데 내 딴에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저녁 무렵에 도착했다. 지금은 기억이 희미하지만, 어떤 가게에서 라디오를 들었다. 안재홍 선생이 삼천리강산에 평화가 왔다고 감격어린 연설을 하시지 않는가. 꿈인가 생시인가 했다.

다음날 새벽 서울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기차가 언제 올 지 알 길이 없었다. 역에서 몇 시간인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기차가 기관차 앞에 태극기를 달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역에는 나 이외에도 몇 사람이 있었는데 다함께 만세를 불렀다. 참으로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기차에 올랐다. 흥분의 도가니였다. 누가 준비했는지 애국가 가사를 돌렸다. 모두들 애국가를 합창했다. 그러고는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날 밤 늦게 서울역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