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한국 의학의 <br>업그레이드

한국전쟁과 한국 의학의
업그레이드

  • 354호
  • 기사입력 2016.08.26
  • 취재 이지원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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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가스 괴저병(壞疽病). 그 병원균에 감염된 흙이 포탄의 파편에 묻어 사람 몸속으로 뚫고 들어가 생기는 질환. 피부 조직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가스가 발생하면서 살이 썩어 들어간다. 상상만 해도 끔찍하기 그지없다. 특히 빛과 소음에 민감한 병이다. 밝은 곳에 있으면 신경 자극이 심해져 환자들은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게 된다. 그래서 붕대로 온 몸을 칭칭 감거나 조용한 암실에 수용해야 한다. 소음에도 민감하게 반응하여 의료진이 암실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 맨발로 소리를 죽여 걷지 않으면 환자들은 금세 경련을 일으킨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다. 정치도 이념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무고한 여인들이 동족 간 전쟁으로 인해 정말 끔찍한 질병에 걸린 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고는 만 3년 2개월간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치열한 전투가 지속되었다.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파괴전이자 소모전이었다. 이로 인해 우리의 금수강산이 초토화되었다. 인명피해만 보더라도, 한국 및 유엔군측 약 150만 명에 북한 및 중국군측 약 250만 명의 인명손실을 가져왔다. 전쟁에 쓰인 비용도 엄청났다. 유엔군측만으로도 약 200억 달러가 넘었다. 게다가 남한에 있는 900여 개의 공장이 파괴되었고 철도,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의 훼손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반 주거용 주택 60여 만 호와 5,000여 개의 학교가 파괴되었다. 남한의 경우 휴전 직후 집을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던 이재민 수가 200여 만 명에 이르렀다.

한국전쟁은 해방 후 5년 동안 힘겹게 구축해온 국내 의료체계를 단숨에 헤집어 놓았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은 북한군이 후퇴하면서 장비와 시설을 모두 뜯어가 텅 빈 상태였다. 세브란스병원, 서울적십자병원, 경성전기주식회사부속병원(지금의 한일병원) 등이 입은 손실은 굉장히 컸다. 전국에 산재한 1,000여 개의 병원과 의원이 파괴되거나 문을 닫았고, 의료장비와 의약품도 고장 나거나 못쓰게 되었다. 전쟁 중에 납북(또는 월북), 행방불명되거나 전사, 병사한 교수, 직원, 의학생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전쟁일지라도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시련과 고통을 초래했지만 한편으로는 선진 구미의학을 급속히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 참전국들은 부상병과 피난민 치료를 위해 의료진을 파견했다. 미국은 육군 야전병원을 설치하고 병원선 하렌 리포즈 컨솔리데이션호를 보냈다. 덴마크는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를 파견했다. 노르웨이는 경기도 동두천에 야전이동외과병원을, 스웨덴은 부산에 적십자 야전병원을 개설했다. 이러한 외국 의료진의 파견은 우리나라 의사들이 선진 구미의학을 습득하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우리나라의 의학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미국과 덴마크 병원선에서는 우리나라 젊은 의사들에게 전문분야별로 단기연수를 실시했다. 서울의대 이찬범, 경북의대 이성행, 이화의대 유승화가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에서 2개월간 흉부외과 수련을 받았다. 초현대식 시설과 완벽한 수술 장비를 갖춘 병원선은 가난한 후진국 의사들의 눈에는 바로 ‘꿈의 궁전’이었다. 전신마취하에 전상(戰傷)으로 인한 폐손상과 혈흉(血胸)에 대한 수술을 주로 했는데, 그러한 개흉술은 당시 우리 손으로는 불가능했다. 여기에서 수련을 받은 세 사람은 그후 흉부외과의 초석을 닦고 발전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1950년 9월 23일 부산에 스웨덴 적십자 야전병원이 설치되어 유엔군 병사를 치료했다. 1951년 초부터는 일반 시민도 진료하기 시작했고, 1953년 4월부터는 결핵 병상을 확보하여 결핵 환자를 치료했다. 원장 에켄 그렌은 외과 과장을 겸직했는데, 1953년 10월 1일 25명을 수용할 수 있는 바라크 1동을 결핵 환자를 위해 할애하고 폐외과수술을 본격적으로 실시했다. 수술 받은 환자는 다음 환자를 위해 부산시립 인보과(隣保館)로 이송되어 계속 치료를 받았다. 수술은 폐절제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치료는 전부 무료였다. 완벽한 수술 장비와 폐 기능 등 각종 검사장비, 선진 마취기술과 정밀한 엑스선 진단, 수혈과 각종 약품 재료를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이 병원의 흉부외과 시스템은 우리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요약하면 한국 의학계는 한국전쟁이라는 재앙 속에서도 엄청난 변화와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국내 의료진은 미국,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선진국 의료진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선진국의 의학과 의술에 눈뜨게 되었다. 특히 전쟁을 통해 부상자 치료와 관련이 깊은 외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정형외과, 마취과의 수준은 크게 향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