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70년대의<br> 국민병(國民病), 결핵

1950~1970년대의
국민병(國民病), 결핵

  • 356호
  • 기사입력 2016.09.28
  • 취재 이지원 기자
  • 편집 이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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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1950년대 한국 사회라면 단박에 떠오르는 개념어들이 있다. 분단, 멸공, 장기집권, 부정선거, 절대적 빈곤, 삼백산업(三白産業), 부정부패, 실향민, 판자촌 등이다. 그런데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고은 시인이 1958년 문단에 나올 때 발표한 시는 이 개념어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순수 서정시도 아니다. 그의 데뷔 작품 제목은 “폐결핵”이다. 우선 그 시의 일부를 감상해보자.


누님이 와서 이마 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 하이드라지드병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 번의 긴 숨이 창 너머 하늘로 삭아가버린다.
오늘, 슬픈 하루의 오후에도
늑골에서 두근거리는 신(神)이
어딘가의 머나먼 곳으로 간다.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청년의 답답하고 서글픈 내면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럼 당시 고은 시인이 폐결핵에 주목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병력(病歷)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한국의 1950년대는 결핵 전성시대였기 때문이다.

결핵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질병 중 하나로, 18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를 휩쓸었 다. 햇볕을 자주 쬐지 못하는 청소년,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 영양 상태와 주거환경이 나쁜 빈민 등이 주로 결핵을 앓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학가, 음악가 등 창작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나 젊고 아리따운 여성들이 잘 걸려서 ‘천재와 미인의 병’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에 영양 상태가 나쁜 빈민과 10~20대 학생들이 쉽사리 결핵균의 표적이 되곤 했다. 1930년대 후반 한국의 결핵환자는 대략 40만 명. 해마다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4만 명 정도였다.

해방 후 한국인들의 가난이 계속되고 보건위생 여건도 개선되지 않는 가운데 교통수단의 발달과 도시화로 인한 인구 집중으로 결핵균은 더 빨리 퍼져나갔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1952년 전국의 결핵환자는 120만 명에 달했다. 전쟁 직후인 1954년 서울시내 남녀 고등학생들을 검진한 결과 결핵 보균자가 6.63%나 되었다. 같은 해에 전국에서 결핵 중환자만 50만 명, 결핵으로 인한 사망자가 하루 평균 3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1956년 고아원 200곳의 원아들에 대한 질병 조사 결과 결핵은 영양실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62년에도 전국의 결핵환자가 80만 명, 해마다 4~5만 명이 결핵 때문에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65년 9월 대한결핵협회는 서울시민의 6.2%, 서울시내 초등학교 아동의 45.2%가 결핵에 감염되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보건소를 중심으로 결핵 퇴치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그러나 결핵 전문병원이나 요양원은 전국에 몇 곳밖에 없었다. 1962년경 전국에 입원해야 할 결핵환자가 50만 명인데, 병상은 3천에 불과했다. 그래서 1962년 한 신문은 대한민국을 가리켜 “폐결핵에 무관심한 왕국”이라고 꼬집고, 정부 당국의 무관심과 무대책을 가리켜 “한 해에 읍(邑) 하나가 망해도 먼 산의 불 보듯”한다고 비판했다.

결핵은 환자 본인은 물론, 환자의 가정까지 무너뜨릴 만큼 무서운 질병이었다. 1972년의 일이다. 어느 가정주부가 가출을 했다. 외도나 가정폭력,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 주부는 불행하게도 결핵에 걸려 객혈까지 하게 되었는데, 행여 자식들을 전염시킬까 두려워서 집을 떠난 것이다. 그녀는 미리 남편과 이웃에게 아이들을 잘 부탁한다고 신신당부했고, 집을 나가기 전 “꼭 (결핵을) 고쳐서 돌아오겠다”는 편지를 남겼다. 그 후 이 가족은 재회에 성공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