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과 사망진단서

영화 1987과 사망진단서

  • 390호
  • 기사입력 2018.02.28
  • 편집 주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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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삼성서울병원 건강의학센터 양광모 교수
비뇨기과전문의, 前청년의사신문 편집국장

영화 1987은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많은 이들이 주인공인 영화다. 군사정권의 탄압에 대항하며 민주사회를 갈망하던 시민들의 모습을 역동적이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그려낸 수작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시발점은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 받다가 고문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이다. 영화를 보지 않더라도 근대사에 관심이 있는 성균관대 학생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대통령 욕만 하더라도 끌려가 빨갱이 간첩으로 처벌받던 시절에는 이와 같은 사건이 알려지기 힘들었다. 단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런 시절이었음에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여러 사람들의 노력덕분이다. 중앙대병원에서 근무한 오연상 내과의도 그 중 하나다. 박종철이 숨을 쉬지 않자, 경찰이 가까운 중앙대병원에서 데리고 간 의사다. 경찰은 그에게 ‘학생이 술을 많이 먹었는지 목이 탄다며 물을 달라고 해 주전자를 입대고 마시더니 호흡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데리고 갔다.

그러나 실제 남영동에 가보니 욕조가 있었고 박종철은 속옷만 입은 채 흠뻑 젖어 있었다. 호흡과 심박이 없는 사망 상태였고 30여 분간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오연상 선생은 사망진단서에 사망 원인 ‘미상’으로 기재했다. 이는 사인을 알기위해 부검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서울대생이 조사 중 사망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당국은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표현을 했다.

부검을 시행한 법의관도 소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했다. 경찰 측은 사인을 쇼크사(심장마비)로 작성하라고 압력을 넣었으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황적준 법의관은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작성했다. 후에 언론 인터뷰에서 ‘의사로서 기본적인 직업윤리를 지킨 것’이라고 했다. ‘법의학은 망자의 사인을 밝혀주는 최후의 보루’라는 평소의 소신을 실천한 것이다.

이렇듯 의사는 산 사람에게도 중요하지만 죽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사망진단서를 제대로 작성하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 이유로는 환자 가족과 의사 양측 모두에게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의사 측을 살펴보자.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진단서 발급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라 과거보다는 정확한 기재가 보편화되었으나, 여전히 진단서 발급을 환자 편의를 봐주는 온정주의적 행동과 보편화될 수 없는 개인적 신념에 따라 처리하는 경우가 간간히 존재한다. 이런 행동은 의사로서 직업윤리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다.

환자 가족들도 인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추세가 정확한 사인을 입력하도록 하고 있다. 사망통계는 질병의 역학이나 예방, 보건 정책을 수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죽은 자에게 칼을 대는 것은 망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란 인식이 강해 부검을 피하려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 위해 사망진단서를 자연사로 종용하는 경우가 지금도 없지 않다.

1987년 6월 항쟁의 주인공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떤 직업을 가지든, 각자가 해야 할 일을 잘 하고 있을 때 우리의 민주주의가 지켜진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