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월드데이터(Real World Data)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409호
  • 기사입력 2018.12.13
  • 편집 주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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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인문학교실

삼성서울병원 건강의학센터 비뇨의학과전문의 양광모 교수


임상연구의 틀이 바뀌려고 하고 있다. 새로운 약을 개발할 때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되는데, 그중 상당 부분은 임상시험에 들어간다. 특히 유효성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무작위 대조 이중맹검시험(Double-blinded Randomized Controlled Trials)은 피험자의 모든 위험을 연구자(대부분 제약회사)가 감당해야 한다. 이중맹검시험 특성상 조건에 맞는 환자들을 모집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효과를 증명해야하는 혈액학과 영상의학적 검사비용뿐 아니라 부작용에 대한 책임까지 엄청난 비용이 들게 된다.


안타깝게도 고비용의 임상시험을 수행해도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수천억원에서 수조원의 돈을 날릴 수밖에 없다. 인체에 사용하더라도 안전한 약을 개발하는 문제라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같은 보건당국은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데 제약사가 감수해야하는 일로 지금껏 치부해왔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단순한 돈 문제로 치부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만도 않다. 희귀한 질병은 새로 개발한 약을 시험할 대상자 모집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치료 가능성이 충분히 있어보여도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실제로 환자에게 투약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다. 때문에 의료현장에서는 환자나 가족들이 의료진을 원망하기도 십상이었다. 이모든 것들이 근거중심의학(Evidence Based Medicine)이 중시된 지난 반세기간 진행된 일이다.


하지만 최근 기술의 발달로 이런 문제들이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리얼월드데이터(Real World Data, RWD)의 등장 덕분이다. 리얼월드데이터는 일종의 의료 빅데이터다. 다만 각 병원에 있는 병원정보시스템에 저장된 환자 데이터를 잘 짜인 연구에 활용하는 것이 차이다.

해외에서도 이런 식의 연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국가가 미국이다.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처(FDA)는 2016년에 ‘21세기 치료법안’을 만들어 리얼월드데이터란 개념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다. 무작위 대조 이중맹검 임상시험이 실제 존재하기 힘든 지나치게 이상적인 환경이라 의료 현장에서 부딪히는 현실과는 큰 차이가 있고, 비용도 지나치게 많이 드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우리 보건당국도 리얼월드데이터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금 당장 무작위 대조 이중맹검을 대체할 수 있다는 시각이 아니라, 새로운 약물을 탐색하고 적응증을 확대하는 부분에서는 조심스럽게 사용해보자는 입장이다.


이런 움직임에 제약회사들은 환영하고 있다. 허가 임상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임상 효용성을 확인하는데 이미 리얼월드데이터를 이용하고 있는 상태다. 일본 제약사인 다이찌산쿄의 새로운 경구용 항응고제(NOAC)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미 허가된 약품이긴 했으나 허가임상이 서구 환자들만을 대상으로 했기에 아시아권 의사들에게는 외면 받았었다. 그러나 리얼월드데이터를 통해 아시아 환자들에게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확인 후 유명 학술지에 발행함으로써 큰 관심을 끌었다.


국내 제약사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녹십자사는 간암 환자에게 사용하는 항암제를 전통적인 이중맹검시험으로 확인한 후에 리얼월드데이터로 다시 확인해 큰 차이가 없음을 확인했다. 일정 부분 리얼월드데이터가 이중맹검시험을 일정 부분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이 리얼월드데이터가 모든 이중맹검시험을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중맹검시험을 통해서만 증명이 가능한 부분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런데도 과거의 방식보다 더 안전하며 더 저렴하고 더 빠르게 적용 가능한 새로운 연구방법이 생겼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환자 입장에서는 적어도 직접적인 치료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임상시험에 몸을 맡겨야 하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게 되니까 말이다. 지금까지는 임상시험에서 시험약을 투약하더라도 효과가 없을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효과가 없는 위약(Placebo)을 배정받는다면 더더욱 치료기회를 날리는 셈이 됐다.


그렇기에 리얼월드데이터를 활용한 임상시험에 거는 기대가 큰 것이다. ‘리얼월드데이터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이 공상이 아닌, 현실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