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과 감염병 | “그 속에선 아무 차별도 없었다”
페스트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 565호
- 기사입력 2025.06.09
- 편집 성유진 기자
- 조회수 673
글 : 고관수 의학과 교수
아르놀트 뵈클린, <The Plague> (1898)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 1827~1901)은 가족 중 여섯 명을 페스트를 비롯한 감염병으로 잃었다. 그는 만년에 <페스트>라는 그림을 그렸다. 페스트균을 상징하는 검은 사신(死神)이 긴 낫을 휘두르고, 그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있다. 사신을 태운 괴물은 입을 벌려 이상한 연기를 내뿜는데, 이 연기를 맞은 사람은 얼굴이 검게 변하면서 쓰러진다. 뵈클린은 페스트로 인한 평생의 상심과 공포를 그림에 고스란히 표현했다.
대니얼 디포(Daniel Defoe, 1660-1731)는 불온한 글을 썼다는 이유로 옥살이를 치렀고, 여러 정권 밑에서 스파이 노릇도 했다. 생애 동안 세 차례나 목에 칼을 쓴 채 광장에서 대중의 모욕을 받기도 했다. 사업으로 성공하기도 했지만, 투자 실패로 거의 전 재산을 날리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디포가 지금까지 불멸의 이름을 얻고 있는 이유는 예순 가까운 나이에 쓴 첫 소설 《로빈슨 크루소》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몇 년 후에 쓴 《전염병 연대기》는 팬데믹 시대를 맞이해 더욱 관심을 받고 있다.
1772년에 발표한 《전염병 연대기》 (최근에는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는 1665년 런던을 집어삼킨 페스트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뉴턴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쫓아내 고향으로 향하게 했던 바로 그 전염병이다.
디포는 이 17세기 페스트에 관한 비망록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런던 페스트에 병들다
때는 1665년,
저세상에 입적한 그 수 몇 십만이랴.
그러나 나는 살아남았도다.
《전염병 연대기》에는 전체적으로 중심인물도 없고, 극적인 스토리 라인도 없다. 마구상을 운영하는, 특별할 것 없는 한 런던 시민(‘나’)이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에서 겨우 살아남아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회고해서 정리하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을 굳이 꼽자면 ‘페스트’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디포가 이 ‘소설’을 발표한 시점은 1772년이고, 1665년은 그가 겨우 다섯 살이었을 때였으니까 직접적인 관찰자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은 소설적 구성을 넘어 당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담고 있다. <사망주보>의 여러 숫자와 상세한 질병 묘사, 실감 나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그렇다. 디포는 도시를 장악한 질병, 페스트의 시작에서 마지막까지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 나가는지, 사람들은 이 참혹한 질병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 당국의 정책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등등을 비망록, 아니 마치 보고서처럼 쓰고 있다.
디포는 질병으로 인한 처참한 장면을 많이 묘사하는데, 그중에서도 시체를 처리하는 장면은 여러 차례 반복된다.
그 차에는 16, 17개의 시체가 실려 있었는데, 어떤 것은 리넨 천으로 둘둘 말린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모포에 싸인 것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오로지 팬티 하나만 걸친 시체도 있었다. 시체들이 차에서 내던져질 때, 입고 있던 것들도 모두 벗겨져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한 행위가 시체 자신으로서는 아무 상관이 없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인류의 공동묘지 속에서 사이좋게 살을 비비고 파묻히니까. 그 속에선 아무런 차별도 없었다. 가난뱅이든 부자든 다 같이 뒹굴고 있으니 말이다. (107쪽)
부자든 가난뱅이든 구별도 없이 마구 파묻히는 장면, 마부나 말이 함께 내던져지는 장면, 살아 있는 상태에서 실수로 함께 파묻히는 장면들은 물론, 격리되어 있던 환자들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밤중에 알몸으로 도망 나와서 시체들이 묻힌 구덩이로 주저 없이 뛰어드는 장면까지... 이처럼 죽어가는 모습도 비참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대접받지 못하는 역병(疫病)의 참상은 충격적이기 그지없다.
디포의 《전염병 연대기》를 보면 페스트의 원인에 대한 시각이 300년 전의 《데카메론》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다. 디포는 페스트의 원인을 ‘병균’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이것은 굉장히 전향적인 시각이었다. 안톤 판 레이우엔훅이 미생물을 발견하고 발표한 이후이기는 하지만 아직은 파스퇴르와 코흐의 세균병인론(germ theory)이 나오기 전이었다. 물론 디포가 ‘병균’이라고 한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질병이 단순히 어떤 기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생명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특히 보인자(carrier), 즉 병원균을 가지고 있지만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 감염질환을 퍼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320쪽). 당연히 감염질환의 전파와 관련해서는 아직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가끔은 ‘신의 섭리’를 운운하고 있긴 하지만, 당시의 지식에 비추어 보면 감염질환과 관련해서 상당히 진전된 입장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페스트를 사라진 질병으로 여긴다. 그렇지만 최근에도 가끔씩 페스트 발생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 걸 접한다. 예를 들면 2019년 이래 2023년까지 매년 중국과 몽골에서 페스트가 발생하여 방역 경보를 내렸다는 보도가 나왔었고, 2017년엔 마다가스카르에서 집단 발병한 사례도 있다. WHO에 보고되는 페스트 발생 건수의 95퍼센트 이상이 마다가스카르를 포함한 아프리카 지역이기도 하다. 2015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페스트 감염 환자가 발생해서 그 해에만 4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후 미국에서는 매년 평균 7건 가량의 페스트 감염 환자가 보고되고 있다.
페스트가 예전처럼 폭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페스트균은 곳곳에 산재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항생제가 개발되고 보편화된 이후로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 되었다(발병 초기, 즉 14시간 이내에 치료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고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날 수 있으며, 그때 시대를 달리하며 위대한 작가들이 극적으로 묘사해온 이 질병의 참상이 현실이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소설가 스티븐 킹이 <척의 일생>에서 지구의 재앙에 페스트가 한몫하는 것으로 묘사했던 것처럼. 물론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페스트를 다룬 소설들
· 조반니 보카치오. 《데카메론》
· 다니엘 디포. 《전염병 연대기》
· 알베르 카뮈. 《페스트》
· 알레산드로 만초니. 《약혼자들 1, 2》
· 오르한 파묵. 《페스트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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