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의 덕목 목록 제1호에 관하여 - 레인메이커

  • 61호
  • 기사입력 2004.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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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법학과 김성돈 교수

누가 정의를 태양처럼 드러낼 수 있는 법률가인가

날카로운 시력을 가진 암탉은 철망 뒤에 있는 곡식에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철망의 존재를 곧바로 알아채고서 그 주변만 배회하다가 물러서고 만다. 그러나 나쁜 시력을 가진 암탉은 곡식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철망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철망의 존재를 의식도 못한 채 곧바로 곡식을 향하여 돌진할 수도 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는 승산이 없는 힘든 게임을 하지 않는다. 상황을 재빠르게 인지하고 분석하여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험적 행동은 삼가고 실패 없는 안전한 길을 선택한다. 반면에 상황을 빠르게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자는 모험과 실패 뒤에 마침내 큰일을 해내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정의가 거대하고도 강력한 불의의 장막에 가로막혀 있을 때 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이는 명석하고 똑똑한 법률가인가, 일류는 못되지만 감수성과 열정을 가진 법률가인가, 존 그리샴의 소설 레인메이커(The Rainmaker)를 스크린에 담은 영화 레인메이커는 이 물음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정의를 정오의 태양처럼 드러내게 하는 역할을 감당할 할 수 있는 법률가의 자질에 대해 이 영화는 말하고 있다.

변호사 - 좌 반부는 거짓말, 우 반부는 탐욕

법률가를 꿈꾸며 법대에 진학하는 자는 누구라도 ‘하늘이 무너지더라도 정의를 세우라'는 말을 한번쯤 듣게 된다. 그러나 법대를 졸업하고 법률가가 된 후에도 이 말을 가슴에 새기는 이는 드물다. 하물며 이를 실천에 옮기는 이는 더 더욱 드물다. 그 대신 그들은 사건경험이 누적됨에 따라 정의의 실체나 존재 그 자체에 의문을 품게 되고, 그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지배하는 가치기준도 변하기 마련이다. 점점 더 현실적으로 변하며 이해득실을 따져서 행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럼으로써 사회적 지위는 기득권층의 대열에 들어가게 되며, 그에 따라 법률가들의 의식구조 역시 대체로 보수화된다. 그 결과 그들은 현실시스템의 급격한 변화에 거부감을 느끼게 되며, 전통과 기성질서의 테두리 속에 안주하고 싶어 한다.

그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법률가는 결코 “안개 속으로 잠복해 들어간 정의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일하는 태양과 같은 존재”(소설 레인메이커의 첫 페이지에 나오는 말)로 여겨지고 있지 않다. 법률가 그 중에서도 특히 변호사는 황금을 좇기 위해 악마에게도 영혼을 팔 수 있는 데블스 애드버킷(Devil's Advocate)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을 개탄한 비웃음에서인지 몰라도 미국에서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좌 반부는 거짓말, 우 반부는 탐욕'으로 이루어진 두뇌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변호사의 덕목

그러나 레인메이커의 변호사 루디 베일러는 보기 드물게 초심을 잃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변호사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피자를 배달하면서 어렵사리 대학을 마친 후 멤피스 소재 테네시 주립대학 로스쿨에 진학한다. 그는 법정드라마에서 흔하디흔하게 등장하는 일류대학 수석졸업자가 아니다. 지방대학 법대를 중간정도의 실력으로 졸업한 평범하고 소심한 인물로 심지어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영향아래 성장한 자이다. 로스쿨에서 정상적인 학업을 마친 자라면 대부분 합격한다는 변호사자격 시험을 앞두고도 불안을 감추지 못하며, 합격통지서를 받고서 어린애처럼 기뻐할 만큼 평범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비범한 인물들이 가지지 못한 훌륭한 덕목을 가지고 있다. 그 덕목을 십분 발휘한 그는 마침내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들이 보기에 넘어뜨리기가 불가능해 보이는 골리앗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는 다윗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결과 그는 정의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것을 온몸으로 떠받치는 괴력을 보여주게 된다.

골리앗과 대적한 다윗 루디 베일러가 이끌어낸 승리의 원동력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이 영화의 감독은 루디 베일러가 공인인 변호사로서가 아닌 사인으로서 몸소 겪게 되는 체험과 그에 대한 대응양식을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인 소송사건과 대비시켜 가면서 보여주고 있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한 여성을 그 남편으로부터 구해내기에 앞서 그는 자신의 과거경험을 통해 그 여성이 처한 상황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폭우가 퍼붓던 날 그들 두 사람에게 광풍처럼 몰아닥친 극한상황에서도, 서로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다. 루디가 선택한 인생의 행보는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초일류 법률가들이 결코 하지 않을 인생의 선택이다. 일상의 삶에서 보여준 루디의 감성지수는 법정투쟁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이어져간다. 첨단과학의 시대에 보험회사의 간교한 책략 때문에 치료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동년배의 의뢰인에게 그는 무한한 인간애를 통해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그는 그로인해 생겨나는 화 에너지를 불의에 맞서는 투쟁에너지로 전환시킴으로써 역사적인 배심평결을 이끌어낸다.

좋은 이웃인 좋은 법률가

‘좋은 법률가는 나쁜 이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법률상의 개념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고 법의 논리를 불편부당하게 전개하면 이웃에게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되더라도 그러한 결과를 고수해야 하는 법률가의 사명을 강조한 말로 이해된다. 법률가가 갖추어야 할 덕목 가운데 정확한 법률지식과 논리적 사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법률이 인간의 언어로 만들어져 있는 이상, 이 언어는 필연적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길 경우가 많다. 따라서 모호하거나 탄력성을 가진 법률개념이 구체적인 사건에 적용될 때에는 그 추상성에서 비롯되는 의미의 폭을 무시할 수가 없다. 더욱이 법정에서 확정되는 사건의 진상에 관한 한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 상 실체진실에의 접근은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한 경우도 여전히 온존한다. 그리고 법률은 언제나 어떻게든 법정에서 진실이라고 판단된 확정사실에 대해서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좋은 이웃이면서도 훌륭한 법률가인 자가 갖추어야 할 요소는 날카로운 두뇌와 논리력 보다 우선적으로 사건의 실체진실에 접근하고자 뜨거운 가슴이다. 감수성 없는 법률가는 사건의 진상에 결코 접근하지 못한다. 자신이 받은 인상과 확신만 신뢰하다가는 오판에 이르기가 일쑤다. 감수성 없이 감정이입할 수 없는 법률가는 사건의 당사자들에게 ‘일생'의 사건을 자신에게 부과되는 ‘일상'의 사건으로 치부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확인될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가게 하는 더듬이를 ‘법적 감수성'이라고 부른다면, 그 사건이 사회의 전체에 미치게 될 파장과 정의의 실현에 이바지할 정도를 가늠하게 하는 통찰력을 법률가의 ‘역사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역사의식 없는 법률가는 현행의 질서유지에만 관심이 있고, 눈앞에 놓여진 불의에 가려진 정의를 바라볼 수 없다.

레인메이커를 대망하며

법률가는 하나의 사건에서 개별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는다. 이러한 지상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명석하고 유능한 초일류 법률가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우리 사회는 법적 감수성과 역사의식을 가지고 우리의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할 법률가도 많아야 한다. 상식에 입각하여 이웃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법률가야 말로 하나의 사건을 통해 개별사건을 넘어서서 전체까지도 뒤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기존의 세계와 타협하여 부유한 고객의 소송만을 맡거나 거대기업의 이윤을 챙겨주는 레인메이커가 아니라, 단비를 바라는 모든 이에게 그들이 딛고 있는 온 대지를 촉촉하게 적실 수 있는 비를 만들 수 있는 레인메이커를 소망하는 것이다. 그들만이 우리 사회에 내재해 있는 모순과 부 합리를 통째로 뒤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레인메이커의 덕목 목록 제1호는 명석한 두뇌와 날카로운 논리력이 아니다. 타인의 아픔에 감정이입할 수 있는 법적 감수성과 정의는 언제나 승리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마음에 새긴 역사의식으로 무장하고서, 사실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을 품고서 타성으로 불문에 붙여진 기성의 전제에 대해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철학적 자세가 없으면 안 된다. 날카로운 두뇌의 초일류 법률가는 날카로운 두뇌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새로운 사고를 만들 수가 없다. 그러한 자는 이리저리 살피지 않으며 결코 실패를 용납하지 않고 기성관념의 올가미 속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두뇌를 가진 지식인들은 예민한 두뇌를 소유한 동물들의 반응처럼 고정되고 엄격한 관념을 주장할 확률이 높다. 그들은 왕과 늑대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늑대는 죽이고 왕에게는 엎드린다. 그러나 왕과 늑대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둔한 자들은 때때로 왕을 늑대로 알고서 늑대 같은 왕의 가슴에 칼을 꽂을 수도 있다. 우리의 진보를 가로막고 우리의 자유를 압제하고 제도라는 왕에게 칼을 꽂을 수 있는 법률가를 대망한다.



편집ㅣ스큐진 김지연 학생기자(fire_fox48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