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 키에슬로브스키

  • 65호
  • 기사입력 2004.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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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ㅣ법학과 김 성돈 교수

사람의 생명에 대한 형법의 태도

사람의 생명을 단절하는 행위에 대해 형법은 ‘살인죄'로서 극형에 해당하는 사형을 위시하여 최고의 형벌로 다스리고 있다.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청받거나 죽이는데 동의를 받고 사람을 살해하는 경우에도 ‘촉탁․승낙살인죄'로 처벌되고, 심지어 자살하는 자를 도와주는 행위도 ‘자살방조죄'가 된다. 천하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을 우리 형법은 거의 절대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셈이다. 생명에 관한 한 그 생명의 주체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생명에 대한 형법의 태도를 ‘생명절대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형법은 이러한 생명절대원칙에 대한 유일한 하나의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진정으로 죽고 싶어 하는 자를 죽이는 것도 살인으로 보면서도, 진정으로 살고 싶어 하는 자를 죽이는 것도 살인으로 보지 않은 유일한 예외는 ‘국가에 의한 살인', 즉 사형제도가 바로 그것이다. ‘블루', ‘화이트' ‘레드'라는 영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폴란드의 감독 키에슬로브스키가 만든 영화,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은 사형제도가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제도 살인임을 고발하고 있는 영화이다.

두 개의 살인 - 인간에 의한 살인과 제도에 의한 살인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은 두 개의 살인 장면을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 살인 장면은 20세의 떠돌이 청년이 택시기사를 살해하는 장면이다. 짧은 영화 속에서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살해 장면은 두 눈을 저절로 감길 정도로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고 있을 뿐 아니라, 살해하기 위한 준비과정을 비롯하여 피해자와 조우한 후 살해시점에 이르러 살해하는 순간까지도 건조하게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인다. 그러나 살인자는 극악무도하게 살해하지만 감정이 결여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의식을 가지고 행위하고 있고 그 살인행위에는 분명한 동기도 존재한다.

다른 한편 두 번째 살해 장면은 첫 번째 살해 장면과 달리 너무나 빠르게 진행된다. 이 두 번째 살해 장면은 다름 아닌 첫 번째 살인자를 사형시키는 장면이다. 사형선고를 내리기까지의 재판장면도 극도로 생략되고, 사형선고 후 갑자기 집행시간이 도래한다. 집행 전 변호사와의 면회시간에도 집행관들은 초조해 하며 면담을 조속히 마치기를 재촉한다. 교수대에 매달려 사망할 때까지의 시간도 극도로 짧고 기계적으로 진행된다. 사형집행관들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없어 보인다. 목에 걸 밧줄의 길이를 조절하고, 숨이 끊어지면 떨어지게 될 분비물을 위한 받침대를 밑에 놓고 커튼의 불량상태를 정비한다. 사람을 목매달아 죽이는 일을 그저 단조롭고 귀찮은 일상의 작업인양 기계적인 동작으로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자동적으로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화되어야 할 사형제도

‘사람이 제도를 만들지만, 제도가 사람을 죽인다. 고 한다. 인간이 사형 제도를 만들었고, 이 사형제도는 마침내 인간의 손을 떠나 제도 그 자체의 수레바퀴아래서 굴러가고 있다. 거대괴물(리바이턴)인 국가가 사형 제도를 장악하고 있는 한 사형제도는 비인간적이고 반인간적이 될 수밖에 없다. 잔혹한 범죄행위에 대한 대가로 두려움과 공포에 떨면서 죽어간 살인자도 비인간적이지만, 존재의 끝에 대해 경험하지 못한 두려움과 고통에 떨고 있는 살인자의 생명을 타성적으로 끊고 있는 사형집행도 비인간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인간적인 모습을 고지식하리 만큼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 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사형을 통한 제도 살인의 중단하는 일이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법률가라는 직업을 갖기에 너무 예민한' 이 인물은 살인자가 살해대상을 물색하며 기다리던 장소에서 변호사시험 합격사실을 약혼녀에게 알린다. 면접시험에서 그는 형벌의 목적이 범죄인 이외의 다른 일반인으로 하여금 범죄를 억제하기 위한 이른바 ‘일반예방'에 있는 것인지, 범죄인 개인을 개선 교화시키기 위한 ‘특별예방'에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 이러한 인간적인 회의를 통해 감독은 형벌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법이 정답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사형 제도를 맹목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우리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는 듯하다. 나아가 우리의 젊은 변호사와 살인자는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가정적 물음을 몇 가지 물으면서 번민하고 있다. 이러한 가정적 물음은 사형제도가 존재하면 살인이 줄어들 것인지, 사형제도가 폐지되면 잔혹한 살해행위가 더 많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알 수 없음을 자인해야 함을 상기시켜 준다. 사형집행현장에서 동정심과 슬픔과 회한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던 젊은 변호사의 번민과 고뇌를 이 ‘짧은 필름'은 긴 여운과 사색으로 이어지게 한다. 제도 살인인 사형제도가 결국 ‘사라져야 할 제도'임을 알 수 있을 때까지 우리는 중단 없는 사색과 성찰을 이어가야 한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의 소유자인 살인자의 ‘일생'을 무감각하고 맹목적으로 마감시키는 제도 살인자의 ‘일상'적 동작이 영구히 중단될 때까지.

생명에 대한 법제도의 인간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생명의 단절과 관련하여 법제도에 내재해 있는 비인간적인 장막은 서서히 제거되고 있다. 회복 불가능한 불치 또는 난치의 병에 걸려 고통 받고 있는 환자가 단말마적인 고통의 시간을 끝내고 편안하게 죽고 싶다고 하소연하여도 ‘아직 죽어선 안돼'라고 하면서, 반면에 살고 싶어 몸부림치는 범죄인에게 강제적인 생명단절을 허용하는 사형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형제도는 폐지하는 것이 생명에 대한 인도주의적 태도라면, 육체적인 한계를 이기지 못하며 고통 속에 죽어가는 환자에 대해서도 평안하고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선택권을 주는 것이야 말로 인간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환자가족의 집요한 퇴원요구에 응한 의사의 퇴원조치행위를 살인방조죄로 인정한 대법원판결이 나왔다. 일명 보라매병원사건으로 불렸던 이 사건에 대한 최종판결을 계기로 우리나라에서 다시 ‘소극적 안락사'의 허용여부를 둘러싼 찬반논쟁이 다시 전개되고 있다. ‘소극적 안락사'란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환자에 대해 더 이상 회복불가능한 판정이 내려졌을 때 일정한 요건 하에 그에 대한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임종시기를 앞당기는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경우 환자의 요청 또는 그의 생전의사(living will)를 추정하여 그 가족 등의 동의에 따라 그에 대한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지 않더라도 살인죄로 보지 않겠다는 것이 안락사 허용론의 주장이다. 보라매병원사건은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후 회복되는 상태에 있었다는 점에서 안락사의 범주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보라매병원사건에는 ‘의학적 충고에 반하는 환자의 치료중단'요구와 관련하여 의사의 치료 의무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다른 중요한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그렇지만 보라매병원사건을 계기로 생존할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진심으로 죽기를 바라고 있는 경우에 그의 임종시기를 앞당기는 행위를 살인행위나 자살원조행위로서 무조건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다시금 나오고 있다. 미국의 몇몇 주나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치료를 중단하는 경우인 소극적 안락사는 물론이고 적극적 행위를 통하여 사망의 시기를 앞당기는 ‘적극적 안락사'까지도 허용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고 있기까지 하다. 이러한 방향이 생명의 대한 법제도의 인간화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은 신의 것이 아니고 사회나 국가의 것도 아닌, 다름 아닌 그 생명주체 개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ㅣ스큐진 김지연 학생기자(fire_fox48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