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적으로 보아야 할 영화 '선택'

  • 68호
  • 기사입력 2004.09.16
  • 취재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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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국가보안법과 선택

:: 필수적으로 보아야 할 영화 '선택'

여기에 용도폐기의 위기에 처한 법이 하나 있다. 제정된 이래 55개성상(星霜)을 거치면서 그 법 때문에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많았던 만큼 그 법으로 인해 웃고 그 법이 있어서 행복했던 사람도 많았다. 그 법의 이름은 다름 아닌 '국가보안법'이다. '정권유지법'이라는 별칭이 시사하듯이, 한 때 그 법 때문에 사선(死線)을 넘나들었던 전직 대통령도 그가 집권했던 동안에는 국가보안법을 유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만큼 국가보안법에는 그 법의 칼을 쓰는 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 칼을 잡으려는 유혹을 떨쳐 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매력적 요소가 들어있다. 그러므로 이제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두려워하는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이 진정 우려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그들이 국가보안법의 존치로 얻게 될 이득이 있다면 그 이득의 실체는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우려와 존치를 통해 얻게 될 이득의 실체를 지극히 '사실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한국 영화 '선택'은 그래서 국가보안법존폐논쟁의 한가운데 서 있는 우리에게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

::국방경비법과 국가보안법

영화 '선택'은 김선명이라는 한 실존인물의 옥중생활을 그리고 있는 영화이다. 그는 6·25가 한창이던 51년 10월 15일 인민군 정찰대원으로 근무 중 철원에서 유엔군에 체포되어 1951년에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2년 후인 1953년 7월 25일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간첩혐의가 추가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후 결국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1995년 8·15 때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후 2000년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그를 무려 43년 10개월 동안이나 수감생활을 하게 하여 '세계 최장기수'로 만든 근거법은 '국방경비법'이라는 이름의 법이다.

이 법은 1948년 7월 5일 공포된 법으로서 그 이후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이 이 법을 대체할 때까지 무려 16만∼20만건 정도의 간첩사건 연루자가 이 법에 의해 처벌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 법에 의해 처형된 사람의 수는 추측조차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국방경비법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모든 법령집에 예외 없이 '1948년 7월 5일 공포, 법령호수 미상, 남조선 과도정부 법률'로 돼 있지만, 남조선 과도정부 법률을 제정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은 이 법이 공포되기 전인 48년 5월19일 이미 해산됐으며 48년 7월 5일에는 미군정 역시 어떤 법률도 공포한 일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준 바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김중기씨를 위시한 수많은 희생자들은 법령호수도 없고 공포된 적도 없는 유령법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라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은 베일에 쌓인 국방경비법의 후신으로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지 4개월도 안 된 1948년 12월 1일 공포·시행되었다. 1948년 11월 발생한 여순 사건을 계기로 남한의 좌익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서둘러 제헌의회에서 제정한 법이다. 그 후 국가보안법은 6차개정에서는 반공법을 흡수통합 했고, 제7차 개정에서는 제7조(찬양·고무 등)의 문제점을 보완하기에 이르기까지 삭제 및 개정을 거듭해 왔지만, 국내에서는 물론이고 국제사회에서도 이 법의 폐지가 촉구되어 왔다. 1999년에는 유엔인권위원회에서 국제인권규약에 위반이라는 통보를 해 왔고, 최근에는 국제엠네스티도 이 법의 폐지를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2002년 이후만해도 3천명 이상이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연루되어 있고, 그 중에 70%이상이 제7조의 찬양·고무죄의 위반혐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국가보안법의 아킬레스 건

이 법이 시시때때로 광적인 매카시즘의 망령을 되살려내고 생각과 양심을 왜곡시켜 국민들을 냉전의 틀 속에 갇히게 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영화 선택에서도 문제된 사상전향의 강요는 바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내고 있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토대로 한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행위책임을 전제로 하는 법치국가내에서 누구든지 사상(생각)만으로는 처벌되지 않는다. 그러나 표현되지 않은 사상은 원래부터 의미가 없다. 내심의 생각은 처음부터 외부에서 알 수가 없는 것이기에 국가개입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 헌법도 표현의 자유를 사상 및 양심의 자유와 함께 인간과 사회의 근본가치로 설정해두고 있다.

따라서 자유민주국가를 표방하는 국가는 개인이 자유롭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일 그 자체만으로는 - 그 표현에 일정하게 금지된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한 - 개입해서는 안되는 것이 원칙이다. 이 원칙은 표현된 사상이 자유민주국가체제와 다른 경우에도 변함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미 18세기의 밀(John Staurt Mill)이 갈파했듯이 서로 다른 사상끼리라도 사상의 '자유로운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가운데 개인의 자기실현 및 사회와 국가의 발전이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제7조는 이와 같은 사상의 자유경쟁을 차단하고 그러한 행위를 처벌하도록 하는 조항이다. 국가보안법 제7조에서 말하는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고무·선전 또는 이에 동조" 하는것은 단순히 다른 체제에 대한 선호도를 표현하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 조항을 통해 국가의 존립·안전 혹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현실적으로 위태롭게 하는 구체적인 행위의 전 단계까지 앞질러가 형벌의 칼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조항은 '사상의 표현'을 그 적용대상의 한계를 가늠할 수 없는 불확정 개념(찬양, 고무, 선전 또는 동조)을 사용하여 봉쇄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형법상 죄형법정주의원칙에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물론 이와 같은 비판의 소지를 없애기 위한 보완장치로서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정을 알면서'라는 주관적 요건을 추가(1991년 5월 31일 개정)하였다. 하지만 '위태롭게 하는 정을 알면서'라는 요건은 위태롭게 할 가능성을 인식(미필적 인식)하기만 해도 충족되었다고 해석되고 있는 한 그 요건은 있으나 마나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 제7조가 남아 있는 한, 국가의 존립 등에 대한 위태화의 가능성(위태화)만 있는 사상의 표현도 처벌할 수 있고, 위태화의 위태화( … )도 처벌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다. 국가보안법 제7조가 이 법의 남용자의 총아가 되어 온 것도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른 사상의 단순한 표현행위를 자유의 영역으로 되돌려 놓는다면, 국가보안법의 아킬레스건은 이미 독화살에 맞은 상태이고 그러한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이제 사망진단서가 발급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이 없어진다면 실제로 국가보안법의 모든 처벌조항은 형법의 처벌조항으로 대체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 이외의 모든 국가존립 등에 대한 위태화 행위는 형법의 행위로 모두 처벌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고 하면서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 형법 조항에 제7조와 유사한 규정을 삽입하거나 새로운 대체입법을 통해 그러한 조항을 온존시킨다면 그것은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의 변장'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선택이란 둘 중에 하나를 버리는 것

어떤 사상의 우월성과 체제의 건강성은 자유로운 경쟁관계속에서 검증받아야 한다. 영화 선택의 주인공 김선명씨가 끝까지 사상전향을 하지 않은 것도 그리고 실제로 출감후에 몇 년 되지 않을 마지막 남은 생애를 북한에서 보내려고 송환의 길을 선택한 것도 바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영화 선택에서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로운 경쟁방법 대신에 비인간적인 억압과 회유의 방법을 사용한 미성숙성을 보였기 때문에 그 대한민국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택은 둘 중의 어느 하나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둘 중의 어느 하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 같다.

사상을 자유로운 상태에서 경쟁하지 못하게 하는 국가보안법을 존치하면 우리는 앞으로도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을 지향하는 문학, 음악, 영화 그리고 미술을 잃게 된다. 무엇보다도 양심을 지키려는 사람을 잃게 된다. 열린사회는 그 사회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체제의 건강성과 사상의 우수성을 자유로운 경쟁상태에서 검증받는 사회이다. 국가보안법을 유지하려는 생각은 성숙한 시민의식의 기반하에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강한 체질을 가지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을 닫힌 사회로 유지하려는 생각에 다름 아니다.

::'열린 사회와 그의 적들'

유령법일지도 모르는 국방경비법의 실체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사실자료는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는 모호한 논리로 그 법의 사실상의 존재를 토대로 하여 그 법의 효력을 인정하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의 검찰과 사법부가 행한 과거의 많은 처분과 재판의 정당성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고, 국가가 거기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태가 생길 수 있을 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땅에 떨어질게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엄청난 일을 회피할 때 사용하는 멋진 포장술은 '법적 안정성'이라는 논리이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우리의 검찰, 대법원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종래의 처분과 판례 및 결정이 잘못되었음을 자인하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국가보안법이 존치되기를 희망할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국가보안법에는 법적안정성이라는 논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국가보안법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보안법존폐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이 우리 사회의 뜨거운 여름을 연장하고 있는 시점에서 국가보안법의 존치이득이 무엇이며 그 이득의 귀속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고개를 든다.

그들은 필경 열린 사회의 적대자들일 것이다. 그러나 열린사회의 적들이 누리게 될 열매는 그들의 기대치와는 달리 실로 하찮은 것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를 닫힌사회로 만들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고장난 자물쇠, 그리고 그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발목을 채우는 녹슨 차꼬(족쇄)가 고작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