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페이백'과 회복적 사법

  • 71호
  • 기사입력 2004.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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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법학과 김 성돈 교수


‘피의 보복'을 부른 실패한 형사재판

한 남자가 8세 된 여아를 강간한다. 그 남자는 유죄를 인정한 대가로 감형(미국에서는 피의자가 재판이전에 유죄를 인정하면 곧바로 양형에서 피의자에게 유리한 형을 선고하는데 이를 유죄답변거래제도라고 한다)되어 6년의 징역형만 선고받는다. 사건 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피해자는 몇 차례의 자살까지 시도하고 급기야는 정신병원신세까지 지게 된다. 피해자의 아버지도 사랑하는 딸의 영혼과 육체가 망가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책감과 고통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그 틈바구니 속에서 방치된 피해자의 언니까지 가출하여 피해자의 전 가족의 상처와 후유증은 나날이 악화되어 간다. 6년의 수형기간을 마친 그 남자는 귀여운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단란한 생활을 영위해 간다. ‘피의 보복!', 그것은 현행의 형사사법시스템이 범죄자의 사회복귀를 우선한 나머지 범죄자로 하여금 응분의 대가조차 치르게 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피해자의 아버지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이었다.

TV 시리즈 의 스크린 버전 “페이백(Payback)”은 이와 같이 복수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는 현행 형사사법시스템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영화이다. 범죄자를 처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상처가 치유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악화되기까지 하여 마침내 더 큰 비극을 초래하고 만 형사사법시스템에 어떤 잘못이 있는가를 묻고 있는 영화이다. 피해자의 아버지가 어린 딸을 위해 복수하는 내용을 소재로 담은 “타임 투 킬(Time to Kill)”이 흑백간의 갈등문제로 초점을 맞추어가고 있는 영화인 반면, 페이백은 성폭력범죄의 피해자가 겪은 후유증과 그것을 치유하지 못하는 형사사법시스템의 무기력에 관한 근본적 성찰을 유도하고 있는 영화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범죄로부터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가족)의 운명이 범죄자로 뒤바뀌고 만 것이 ‘실패한 범죄문제의 해결방법'이 초래한 결과였고, 따라서 피고인(피해자의 아버지)은 범죄자가 아니라 실패한 형사사법시스템이 낳은 또 다른 피해자였다는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는 영화이다.

피해자의 중립화와 근대 형사사법의 탄생

근대 이후 우리나라를 위시한 세계 각국의 형사사법시스템이 범죄에 대한 대응에서 보여준 중핵은 ‘범죄자에 대한 처벌'이었다. 그 처벌의 의미를 응보에 두고 있는가 아니면 범죄자에 대한 교육 내지 재사회화에 두고 있는가는 그 바탕에 흐르는 형벌철학 내지 사회적․정치적 상황에 따라 약간씩 차별성을 보여 왔다. 하지만 어느 나라건 그 형사사법시스템의 근저에는 언제나 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깔려있었다. 그러나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 범죄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는 범죄문제의 본질에도 접근하지 못하는 단순한 논리일 뿐 아니라 범죄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 경험적으로 입증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형사사법시스템은 오히려 많은 중요한 사항들을 간과함으로써 새로운 문제점을 낳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범죄자 처벌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형사사법시스템이 간과하고 있는 가장 크고 중요한 부분이 바로 범죄로부터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피해회복과 피해자의 장래를 위한 치유라는 것이라고 한다.

국가의 형사사법시스템이 피해자의 피해회복 등 피해자의 요구만을 대변해주는 형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형사재판이 피해자의 감정을 처리하는 마당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합리적인 사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국가(검찰)와 범죄자(및 그 변호인)만이 형사절차의 주된 당사자로 설정되었다. 이렇게 되어 피해자는 형사절차에서 주체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중립화되었고, 마침내 형사재판의 무대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와 형식은 국가가 범죄자를 처벌하는 메커니즘에도 그대로 안착되었다. 즉 범죄를 피해자 개인에 대한 범죄자의 사적인 차원의 침해행위로 파악하지 않고, 국가가 질서유지를 위해 만들어 놓은 규범에 대한 위반으로 파악한다. 이에 따르면 규범위반은 곧 국가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국가가 범죄자에게 형벌을 부과하는 일은 바로 국가의 법규범 수호와 질서유지를 위한 공적인 차원의 ‘의식(ritual)'이라는 것이다.

형사사법의 실패 원인

이러한 형사사법시스템의 메커니즘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에 대해서는 오늘날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한 인식을 널리 확산시킨 것은 1970년대의 한 선각자의 날카로운 지적, 즉 “국가가 범죄 속에 나타난 범죄자와 피해자간의 ‘갈등'을 빼앗아 갔다”는 주장이었다. 당사자 간의 갈등을 국가가 찬탈해간 결과는 전적으로 피해자의 불이익으로 나타났다. 공적인 차원으로 변환시킬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피해자의 개인적 요구를 고려하는 형사절차에서 피해자의 소외현상은 점점 가속화되었다. 피해자는 수사기관이 정보를 제공받기 위한 수단으로만 취급되고, 그 와중에서 인격권이 침해되고 사생활이 노출되는 등 제2차 피해를 입게 되었다. 피해자가 피해를 자초한 면도 있다는 외부에서의 비난도 가세될 수 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한 상황에서 정체성의 위기에까지 처하게 된 피해자는 오히려 새로운 범죄의 범죄자가 되는 제3차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생긴다.

그나마 잃은 것이라도 찾을 길이 없는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회복 받으려면 다시 민사재판이라는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시간과 돈이 드는 민사재판절차에서도 피해자가 입은 정신적 손상을 치유하는 과정은 없다. 범죄자의 장래를 감안하여 완화된 형벌을 부과하는 법원의 태도에서 반사적 이익을 얻은 범죄자는 거리를 활개 치며 다니는데, 피해자는 일반외과 혹은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한다. 범죄자가 납부하는 벌금형도 고스란히 국고로 들어간다.

범죄로 인해 모든 것을 상실한 피해자에게 아무 것도 회복시켜 주지 못하는 형사사법시스템을 정의를 실현하고 국민이 신뢰하는 국가시스템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형사사법시스템이 국민의 신뢰를 받고 정당성을 인정받는 국가시스템으로 거듭나려면 먼저 피해자의 회복이나 피해자의 치유에 도움이 주는 내용을 가진 제재수단을 모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범죄문제를 범죄자만의 문제로 단순화하여 대응'하고 있는 기존의 태도도 수정해야 한다. 범죄는 과거의 일회적인 사건이지만 그 범죄사건의 영향은 장래에 대해서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범죄자와 피해자 간의 관계를 회복하는데 역점을 두어야 할 뿐 아니라 범죄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된 피해자나 범죄자의 가족들의 관심사, 더 나아가 피해자와 범죄자가 다같이 발을 딛고 평화롭게 살아가야 할 지역 내지 공동체의 관심사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형사사법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와 같은 다차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범죄에 대한 새로운 대응시스템에 관한 논의가 오늘날 서구사회에서 붐(boom)을 이루고 있다. 범죄에 대한 새로운 대응양식 내지 새로운 패러다임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대안적 사법운동이 지구촌에서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다. 종래의 형사사법이 주로 범죄자에 대한 처벌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이 대안적 사법은 피해자의 피해회복, 피해자와 범죄자의 관계의 개선 그리고 나아가서 그들이 몸담고 있는 공간에서 무너지고 부서진 모든 것의 재건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새로운 대안적 사법모델은 종래의 ‘응보적 사법'과 대비되면서 ‘회복적 사법'이라고 명명되고 있다. 응보적 사법은 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반면, 회복적 사법은 범죄로 인한 손상을 어떻게 복구할 것인가를 묻는다. 회복적 사법 하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중심적 역할을 하기 때문에 범죄의 처벌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범죄로 인해 부서진 모든 것, 범죄로 인해 깨어진 모든 관계를 회복하고 치유하기를 시도한다.

따라서 회복적 사법은 필요할 경우에는 형벌을 부과할 수도 있지만 치유, 배상, 용서, 자비, 화해 등을 포함하여 인간이 가지는 감정의 폭넓은 범위를 모두 껴안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회복적 사법의 철학은 또한 우리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존재이고 우리가 행한 바는 선한 일이건 악한 일이건 모두 타인에 대해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라는 세계관을 기초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회복적 사법은 피해자이건 가해자이건 그 가족들이건 혹은 지역사회의 구성원이든 간에 범죄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는 모든 자들을 범죄문제의 해결의 장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한다.

웰빙 형사사법을 지향하며

영화 페이백은 구조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현행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대안적 방안인 회복적 사법의 가능성을 모색함에 있어서 그동안 빈곤했던 우리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 주는 좋은 자극제가 될 수 있다. 회복적 사법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웰빙 형사사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임을 영화 페이백은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일어났던 인종차별의 만행문제를 해결한 ‘진실과 화해위원회(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1995)'도 바로 이러한 회복적 사법의 한 형태로 분류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문제되고 있는 가칭 ‘진실과 화해위원회'도 - 만약 ‘진실규명과화해를위한기본법(안)'이 국회를 통과한다면 - 회복적 사법의 철학과 세계관을 기반으로 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기 위한 가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편집ㅣ스큐진 김지연 학생기자(fire_fox48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