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영화, 밀리언달러베이비

  • 83호
  • 기사입력 2005.05.04
  • 취재 황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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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과대학 김성돈 교수

여전히 진행중인 영화속의 이야기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떤 이야기라도 두어 시간 내에 결말이 난다는 점이다. 그것이 개인사에 관한 이야기이든 사회적인 의미지평을 가진 이야기이든 대부분의 영화에는 끝맺음이 있다. 아카데미수상 네 개부분에 빛나는 영화〈밀리언 달러 베이비〉도 우리에게 뚜렷한 결말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영화〈밀리언 달러 베이비〉속의 이야기는 아직도 계속 진행 중에 있어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같은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영화〈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권투에 인생의 전부를 건 열정적인 서른 한살의 여성 복서 매기(힐러리 스웽크 분)와 스스로 세상과의 교감을 피하는 늙은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초라한 만남에서 시작된다. 상처받은 두 영혼이 만나 서로에게 용기를 주며 세상을 향해 뻗어나가는 중반부까지 이 영화는 고난과 시련이 꿈과 희망으로 이어지는 진부한 복싱영화로만 진행된다. 그러나 복싱장면이 더 이상 화면에서 등장하지 않는 시점부터 영화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주제를 가지고 새롭게 시작한다. 가장 화려한 절정의 순간에서 가장 절망적인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인간사의 평범한 진리를 잔인하게 우리에게 들이미는 영화이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도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의 문제 속으로 빠져들게 하면서도 전율과 감동을 선사해 주는 그야말로 ‘밀리언 달러 베이비’(예상치 못한 곳에서 얻게된 보물과 같이 진귀한 것이라는 뜻이다) 같은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관조적으로 보여주는 인생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나는 아직 말할 능력도 자격도 없다. 법학도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영화 속에 나오는 세 가지 종류의 ‘동의’와 그러한 동의에 대한 법의 태도를 재음미 해보는 일 뿐이다.

‘책임지게 하는 동의’와 ‘면책시키는 동의’

챔피언의 꿈을 위해 샌드백을 두드리는 매기는 자신을 애써 외면하는 프랭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 힘들게 그의 동의를 얻어낸다. 하지만 프랭키가 일단 그녀를 받아들인 후부터는 동의를 전제로 하지 않은 혈연관계보다 더 두터운 신뢰와 사랑을 보여준다. 무릇 사회속의 모든 당사자의 의사의 합치를 요구하고 그것을 토대로 각자를 권리와 의무의 주체로 만든 후 거기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 법의 태도이다. 하지만 법적 책임이라는 강제가 있어도 관계의 깨어짐이 빈번히 일어나고 그 깨어짐은 언제나 책임회피로 이어지는 것이 현실 세계의 일이다. 프랭키로 분한 노 감독은 얄팍한 ‘법적 책임’과 중압감 있는 ‘마음의 빚’을 말없는 웅변으로 우리에게 대비시키고 있다.

더 나아가 프랭키는 스포츠 세계에서 당사자 간의 동의 및 그에 기한 법적 책임이 무의미한 경우를 대비할 것을 목소리 높여 외친다. 신체에 대한 위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스포츠세계의 당사자들이 상대방에 대한 침해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상호간의 동의 탓이다. 당사자가 게임의 규칙을 위반해서 그러한 침해행위를 해도 좋다는 동의까지 한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규칙위반에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는 것은 언제나 ‘나’이다. 경험 많은 운전자 일수록 방어운전에 유념하듯이 노회한 프랭키도 자신의 애제자에게 반복하여 전수하는 복싱철학이 바로 ‘항상 자신을 보호하라’는 것이었다. 동의를 전제로 한 ‘법적 보호’의 건너편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은 ‘자기보호’밖에 없다는 것이 인생의 진리임을 설파하듯이.

‘스스로 책임을 지는 동의’

매기의 행복이 절정의 순간에 갑자기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이 영화도 장조에서 단조로 조바꿈을 한다. 자발적인 생존가능성 없는 생명을 인위적인 생명연장장치에 의존하게 된 상태에서 매기는 스스로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법은 자신의 생명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는 인간에 대해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법은 사람의 생명에 관한 한 그것이 너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영화 속의 매기와 같은 처지에 있는 현실세계의 ‘테리 사이보’라는 여성환자가 있었다. 이들 두 여성이 전세계에 생명에 대한 자기결정권이라는 논제를 뜨겁게 달구고 있기에 우리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법의 태도를 차갑게 묵상할 때를 맞이하게 되었다.

존엄사와 안락사

테리 사이보나 매기가 처한 상황에서 그들에 대한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오늘날 ‘존엄사’라고 부른다. 존엄사란 식물인간상태와 같이 환자에게 의식이 없고 그의 생명이 단지 인위적인 생명연장장치(예컨대 인공심폐기)로만 연장되고 있는 경우에 품위있는 죽음을 위하여 그 생명연장조치를 중단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에 반해 ‘안락사’란 죽음에 임박한 환자의 극심한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더 이상의 치료를 중단함으로써 죽도록 방치하여 죽음의 시기를 앞당기거나(소극적 안락사) 약물을 투여하거나 치명적 주사약을 주사하는 적극적 작위행위를 통해 환자를 죽이는 경우(적극적 안락사)를 말한다. 적극적인 안락사는 금지되어야 하지만, 소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는 환자의 명시적 의사 또는 추정적 승낙에 기한 것일 경우에는 일정한 요건하에서 허용하자고 하는 견해가 우리나라 학계의 일반적인 태도이다.

존엄사와 안락사의 차이

안락사가 환자의 죽음을 목적으로 한 특정 치료행위의 중단인 반면, 존엄사는 살릴 수 없는 환자의 생명보조 장치의 투입을 중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환자의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려는 것을 의도한다. 이러한 존엄사의 경우는 우선 환자가 명시적으로 치료중단의 의사표시를 한 경우에는 그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서 그 보조장치를 제거함으로써 환자에게 자연적인 죽음의 순간을 맞도록 해주고, 환자가 의식이 없을 경우에는 환자가 의식이 있을 때 표시해 둔 의사(living will)나 추정적 의사 또는 보호자의 의사에 따라 그가 인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따라서 존엄사란 본질적으로 안락사와 같이 인위적인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생명연장장치의 제거를 통한 자연사에 해당한다. 이러한 의미의 존엄사 내지 자연사는 이미 1976년에 미국에서 합법화(Natural Death Act)되었으며, 1980년 로마 교황청도 이를 인정하였고, 2000년에는 대만도 자연사법을 통과시켰으며, 최근 2005년 3월 13일에는 프랑스에서도 소생 가망이 없는 말기 환자가 생명 연장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허용한 법안이 13일 프랑스 상원에서 승인되었을 정도이다.

의술이 연장시키고 있는 고통의 시간

최근 국내외적으로 소생가능성없는 연명환자에 대해서는 품위있게 죽을 권리를 선택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하는 존엄사를 안락사의 문제와 구별하면서 이를 허용하자는 목소리가 어느 때 보다도 드높다. 이에 반하여 개인의 생명을 개인의 처분권에 맡기지 않고 생명절대사상을 고수하고 있는 법의 태도는 생명의 본질에 접근한 태도라기 보다는 오히려 생명경시풍조를 사전에 봉쇄하자는 전략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연성없는 생명절대사상은 의학기술의 눈부신 발달과 함께 소생가능성이 없는 인간에 대해 오히려 무의미한 고통의 시간만 연장시키고 있다. 이러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존엄사 뿐 아니라 의사조력자살은 물론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안락사까지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인류가 나아가야 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일 지도 모른다.

 

법 보다 매기를 더 사랑한 프랭키

‘모꾸슈라’(내사랑, 내핏줄)의 자기결정을 존중하는 프랭키의 태도는 법의 태도에 비할 바가 못된다. 법은 생명경시라는 남용현상을 막기위한 전략만을 가지고 있는 반면, 모꾸슈라는 사랑의 객체이자 사랑의 주체이고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사람으로 하여금 죽음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은 그의 삶에 대한 간섭으로 작용한다. 사람의 삶은 살아있을 때 의미가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두 장면 - 가난한 무명시절 귀가길 버스 한켠에서 어두운 차창가를 보며 챔피언을 꿈꾸며 내밀한 미소를 머금는 매기의 모습과 단조로운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안경너머로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수섬’을 읽는 프랭키의 품세 - 이 나의 머리에 주조물처럼 박혀있다. 희망은 살아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고, 행복은 살아있는 동안에 누릴 수 있는 가치이다. 행복한 삶을 주체적으로 가꾸어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삶에 대한 주인공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을 이 세상 누구 보다 사랑하는 자신의 결정에 대해 법은 물러나야 할 것이다.

편집 ㅣ 스큐진 황예진 학생기자 (ooohyj@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