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지 못한 자유,「홀리데이」

  • 99호
  • 기사입력 2006.01.31
  • 취재 전미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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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영화보다 더한 실화

서울의 주택가의 한 가정집에 4명의 탈옥수가 침입하여 가족을 인질로 삼고 경찰과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탈옥수 중에 나이가 가장 어린 한명은 살아남으라는 나머지 동료들의 강권에 의해 집밖으로 내쳐졌고, 다른 둘은 총으로 자신들의 생명을 끊었다. 경악한 인질들의 비명소리, 피바다가 된 집안, 골목길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인파, 금방이라도 공격을 감행할 듯한 태세의 경찰, 이 모든 광경위로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애잔하고 비감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이 모든 광경이 아직 집안에 살아있는 탈옥수의 요구에 의해 전국에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고 있다. 그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누리는 며칠간의 짧은 휴가를 그렇게 마감하고 있다. 마침내 그는 오른손의 권총을 머리에 대고 왼손의 유리조각으로 목을 찌르면서 쓰러졌고, 곧이어 들이닥친 진압조가 쏜 총탄에 맞고 쓰러진다.

이 묘사는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1988년 10월 어느 날 만산에 단풍이 곱게 피어있을 즈음 8박 9일 동안의 도피생활을 그렇게 마감한 ‘지강헌’이라는 남자의 최후를 최대한 압축한 실화이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영화, ‘홀리데이’는 그동안 여러 차례 영화제작이 시도되었으나 사회분위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중도하차 되었던 매력적인 소재를 담고 있는 영화이다.

 

지강헌 사건과 영화 ‘홀리데이’

550만원을 훔치고 징역 7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고 17년의 자유박탈이 주는 무게를 이기지 못하여 탈옥하였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탈옥수의 이름은 ‘지강헌’ 이었고, 우리 사회에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하게 한 사건이 바로 ‘지강헌 사건’이었다고 한다. 지강헌이 인질극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경찰과 매스컴을 향해 외친 말이 바로 ‘유전무죄, 무전유죄’, 즉 ‘돈 있으면 죄 있어도 무죄, 돈 없으면 죄 없어도 유죄’라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 ‘홀리데이’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압축된 말을 플롯으로 삼아 살을 붙여나간다. 88올림픽신화를 만들어낸 한강의 기적과 개발독재의 포크레인에 쓰러져간 도시빈민이 대치되는가 하면, 수백억을 삼키고도 가벼운 형벌을 받는 선택받은 자들과 상습절도와 기타 잡범으로서 중한 형벌을 감수해야 하는 버림받은 자들이 대비된다. 탈옥자들을 추격하는 공권력은 ‘인간쓰레기를 일소하는 청소기’로 묘사되고, 쫓기는 죄수들은 위험한 범죄자라기보다는 ‘힘없고 서러운 자들의 표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럼으로써 영화 ‘홀리데이’는 막다른 골목에 몰린 탈옥수들의 최후를 통해 눈물샘을 길어 올리는 동시에 공권력의 입술 뒤에 숨어 있는 번쩍이는 금니를 향해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려는 이분법적 기획의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범죄에 대한 두가지 시각: 환경결정론과 의사자유론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의 근저에는 보다 범죄의 원인을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환경에 의해 지배되고 결정되는 것으로 보는 환경결정론적 시각이 깔려있다. 환경결정론적 범죄원인론은 자연과학적 사고가 풍미했던 19세기말에 등장한 이론이었다. 이러한 이론은 범죄는 범죄행위자가 생래적으로 타고난 신체적, 유전적 결함 때문이라는 생물학적 범죄원인론과 짝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생물학적 결정론의 주장이 타당하다면 범죄는 행위자도 어쩔 수 없는 신체적 결함 내지 유전학적 소질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범죄행위에 대한 대응방안 역시 형벌이 아니라 결함을 치료하고 소질을 개조하는 어떤 처분이어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범죄자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범죄의 원인이라고 하게 되면 비난되어야 할 것은 범죄자가 아니라 그를 범죄상황으로 내몬 ‘환경’이고, 개조되어야 할 것은 ‘사회’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결정론적 범죄원인 및 그에 기초한 범죄에 대한 대응방법은 오늘날 지배적인 견해가 아니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를 기초로 구축된 현대의 법체계는 18세기의 계몽주의적 사고에 기초한 비결정론적 사고를 토대로 하고 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의 힘을 신봉하게 하였으며, 인간의 존엄과 주체적 권리의식을 강조하였다. 그에 따라 개인은 개인의 행위의 결과에 대해서도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따라서 범죄자는 자신에게 존재하는 의사의 자유를 남용한데 대해 비난을 받아야 하며, 그러한 비난의 수단으로서 미리 예고된 형벌을 부과 받아 마땅하다고 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18세기의 사유는 자연과학적인 관찰자의 시각에서 보면 허구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19세말에는 개인의 생각과 결단과 행위의 동인이라고 여겨졌던 의사자유의 실체가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고방식을 형이상학에 기초한 ‘국가를 위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었고, 그러한 비판의식이 생물학적 결정론 및 환경결정론의 등장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결정주의 부활과 비결정주의의 기획

이러한 19세기적 사고방식은 21세기 들어서서 그동안 난공불략의 요새였던 비결정론적 진영에 대해 더욱 날카로운 공격을 가하고 있다. 특히 유전공학과 신경생물학, 뇌과학 등의 연구성과에 의해 의사자유를 전제로 하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이 망상에 불과한 것임을 입증하려는 시도가 활기차게 진행되면서, 결정주의와 비결정주의는 다시 일대 회전을 벌이고 있다. 환경결정론적 시각을 무시할 수 없는 징후 역시 21세기 들어서서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최근 프랑스 소요사태가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고, 빈부격차가 심할수록 범죄발생율이 높아진다는 것을 가리키는 ‘지니(Gini)계수’ 역시 환경결정론적 시각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생물학적 결정론 역시 완전히 인간의 오묘하고도 복잡다양한 생물학적 본질의 실체적 진실을 밝혔다고 말할 수는 없다. 환경결정론 역시 같은 환경 속에서 범죄자 뿐 아니라 성자가 양육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존재의 세계에 대해 아직 접근할 수 없다면, 여전히 당위의 세계를 지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의사자유를 부정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발생학적 기원이나 유전자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돌릴 수밖에 없지만, 의사자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의식적으로 책임의식과 책임 있는 행동에 대한 사회의 기대를 실추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자유를 부정함으로써 대체된 엉뚱한 책임소재가 생사람 잡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지만, 의사자유를 전제함으로써 적어도 나의 손이 스쳐간 타인의 상처는 내가 치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사자유를 가정하고 있는 비결정주의는 개인과 사회와 국가에 여전히 필요한 전략적 태도인 것이다.

 

영화 ‘홀리데이’의 단순성과 잠재성

영화 ‘홀리데이’가 지강헌 사건을 환경결정론적 시각으로 채색하고 있음은 단점이자 장점으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다. 환경결정론적 시각도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극심한 양극화의 문제점을 극복하게 하여 우리사회의 공존질서를 보다 확고하게 우리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묘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영화 ‘홀리데이’의 뼈대를 이루는 이분법적 시각이 우리를 낡은 흑백논리에 빠지게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일지 모른다. 영화, ‘홀리데이’가 적어도 한 사람의 법관이나 한사람의 법집행자 혹은 한사람의 ‘가진 자’라도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한의 한계와 힘에 방향과 그리고 소유의 의미에 대해 예민한 더듬이를 가꾸게 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벼랑 끝에 몰려 비극적인 최후를 선택하고 만 지강헌의 ‘홀리데이’를 관람하는 동안 여태껏 한번도 설계해 보지 못한 나 자신의 ‘휴가’계획을 처음으로 짜 본 것인지도 모른다.

 

편집 ㅣ 성균웹진 전미린 기자 (wjsalfls@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