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과 진실사이에서 방황하게 하는 영화,「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

  • 107호
  • 기사입력 2006.05.01
  • 취재 전미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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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영화를 보며 떠올린 ‘원숭이재판’

영화,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는 70년전 미국 테네시 주에서 있었던 이른바 ‘원숭이재판’(스콥스 대 테네시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1925년경에 미국 남부의 주들은 진화론을 금지하는 법률을 가지고 있었고 테네시 주도 학교에서의 진화론교육을 금지하는 소위 버틀러법(Butler law)를 통과시켰다. 이 법률에 반대하는 미국시민자유연합(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이 창조론을 공격하고 진화론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을 바꾸기 위해 스콥스(John T. Scopes)라는 고등학교의 생물교사로 하여금 진화론 교육을 하게 하여 법정에 서게 했다. 근본주의적 종교인 검사와 과학으로 무장된 변호인간의 치열한 법정공방이 12일동안 계속된 원숭이재판은 피고인 스콥스에게 100달러의 벌금을 물게 함으로써 끝났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과학의 승리였다. 이 재판이후 미국의 다른 지역에서 진화론 교육에 대한 법적 투쟁이 지속적으로 이어져가게 되었다고 한다.

 

과학과 종교의 법정 대결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는 1976년 독일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로서 원숭이재판과 같이 법정에서 과학과 종교가 서로 격돌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영화는 몸이 뒤틀리고 환청이 들리고 신경쇠약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이르러간 ‘에밀리 로즈’라는 한 여대생의 죽음의 원인을 법정에서 캐물어가고 있다. 에밀리 로즈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과학은 간질병 탓이라고 진단하고, 종교는 악령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판명한다. 과학은 간질치료약을 투여하고, 종교는 악령퇴치술인 엑소시즘 의식을 치렀지만 에밀리 로즈는 결국 사망하고 만다. 엑소시즘을 주도한 무어 신부가 결국 의료적 처방을 무시한 엑소시즘을 강행한 끝에 에밀리 로즈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라는 혐의를 받아 법정에 서게 된다. 유신론자이면서도 과학의 대표자 에단 토마스 검사는 에밀리 로즈의 죽음을 의학적 치료의 등한시 한 탓이라고 주장하면서 무어신부를 과실치사죄로 몰아붙인다. 이에 반해 무신론자로서 무어신부의 무죄를 변론하는 변호사 에린 부르너는 악령이 실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에밀리 로즈의 죽음을 악령의 탓임을 입증하려고 한다. 검사는 사실(fact)만을 말해야 한다고 하고, 변호사는 사실너머에 있는 진실(truth)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사실, 진실, 그리고 재구성된 법정사실

‘사실’이란 실제로 있거나 실제로 있었던 일로서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나 사물을 중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진실\\'이란 나타난 현상이나 알려진 사실 이외에 눈으로 보이지 않는 사실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때문에 신이니 악령이니 하는 존재는 눈으로 보이지 않는 가능성의 영역일 뿐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완벽하게 입증될 성질의 것이 아닌 ‘진실’의 영역이다. 그러나 신과 악령의 존재에 관한 논쟁은 철학이나 신학의 영역에서 전개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지 법정공방으로 다투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재판의 결론이 어떻게 이루어지든 거기에 승복할 진영과 승복하지 않을 진영은 여전히 그대로 남게 되고, 사실과 진실 사이에 가로놓인 강이 판사의 판결에 의해 인위적으로 산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인식능력의 유한성과 과학의 한계는 어느 부분까지의 사실에 관해서는 탐구의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지만, 사실 너머의 진실의 영역에 도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법정에서는 ‘사실’만을 다루고, 이 사실은 증거에 의해서 입증되지 않으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더구나 현실의 법정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 조차 그대로 입증되지 않는다. 과거의 사실은 법정에서 법정의 사실로 재구성될 뿐이고 그 재구성은 구성자의 주관과 의도에 따라 짜맞추어지고 가공되기가 일쑤이다. 법정에서 재구성된 사실에 대해 누명을 덮어쓰고 유죄판결을 받는 자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하지만 그것이 객관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한 사실로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법정에서 다투어지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은 재판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법정의 사실을 확인하는 주체를 법률전문가인 판사로 할 것인가 일반시민으로 이루어진 배심원단이 할 것인가는 법계에 따라 다르고, 새로운 사실확인 방법의 개발은 나라마다 사법개혁의 중핵을 차지하는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볼 때 최근 형사소송법의 개정에서 피의자신문과정을 영상 녹화하여 증거로 제시하려는 안에 대해 재판이 영상녹화물만 쳐다보는 것으로 변질할 것이라는 것이냐는 판사들의 푸념은 사실의 가지는 무게를 과소평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재판은 판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확인을 위해 있는 것이고 사실확인의 신빙성을 담보해주는 한 영상녹화 아니라 그 보다 더한 것이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 들어가서는 안 될 경계지대

실제로 존재했던 사실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법정에서 악령이나 신의 존재의 유무를 판단해야 하는 것은 법정에 대한 미션 임파서블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정은 어떤 문제이든 ‘끝장’을 봐야만 하는 사회적 장치이다. 법정에서는 악령의 존재나 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긍정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사건’에 대한 결론은 내려야 한다. 원숭이재판에서 창조론과 진화론 중에 어느 하나가 선택되고 다른 하나가 버려진 것은 아니지만 스콥스의 행위에 대한 법적인 평가는 내려졌다. 영화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의 재판에서도 악령의 존재여부에 대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무어신부의 행위에 대한 판단은 내려졌다. 그러나 법정에서의 행위평가는 항상 사회적 효과를 수반한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하는 법이 폐지된 것은 원숭이재판이 있은 지 40년이 지난 1968년이었다. 물론 진화론 금지법이 폐지된 것은 진화의 증거들이 많이 나타나서 인간의 진화가 객관적으로 입증되어 사실로 인정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법의 폐지는 단지 학문적 이론을 법으로 규제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영화,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의 실제 사건에서도 당시 독일사회와 교황청에서는 에밀리 로즈의 죽음을 악령과 싸움 끝에 이루어진 구원의 일종으로 평가하였고, 에밀리 로즈가 고통 속에서 죽어간 고향집은 성지가 되어 수많은 순례자들의 방문을 받으며 영적인 측면에서의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과학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구멍과 인간의 가슴에 남아 있는 최후의 공허를 채워주는 것이 종교이고, 인간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하기에 과학의 이름으로 재단되어서는 안 될 인간의 종교성 또는 종교적 성향은 법에 의해 재단될 수 없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령현상이나 무속신앙에서 말하는 \\'증거\\'가 우리의 눈으로 확인 될 수 없고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 법률적 평가가 내려져서는 안 된다.

 

유물론적 환원주의와 규범적 의미

초자연적인 존재의 실재여부를 법정에서 다루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는 신의 존재여부를 캐는 재판은 원시적 불능임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현상 때문에 그러한 불가능한 임무수행을 위해 끊임없이 도전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사실과 진실,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큰 갈림길 앞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방황하게 만든다.

신이 인간의 영혼을 창조하였다고 믿고 있는 유신론자들은 입장에서는 영혼 역시 대뇌피질의 화학작용에 불과한 것이라는 유물론적 환원주의를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그러한 거부감이 가지고 있는 최대의 장점은 인간을 신의 아들딸로 간주함으로써 인간을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로 평가하려는 규범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이다. 그렇다면 인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해 규범적이고 도덕적인 의미가 관건이라면 유물론적 환원주의적 사고도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도 얼마든지 해 볼 수 있다. 문제는 인간이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물질적인 존재는 고귀하지도 존엄하지도 않다는 우리의 생각에 있다. 물질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도 규범적이고도 도덕적인 의미평가를 할 수 있다면 신의 아들이 아닌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좌표를 확인 불가능한 신의 명령에 의해 찍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사실과 현상에 대해 규범적이고 도덕적 평가를 통해 의미를 창조해나갈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도덕적 의미를 우리의 유전인자 속에 입력시킴으로써 진화를 거듭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취재 ㅣ 성균웹진 전미린 기자 (wjsalfls@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