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지 않으면 알 수 없는,「뮤직박스」

  • 107호
  • 기사입력 2006.05.30
  • 취재 도진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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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뮤직박스의 음악, 법정의 사실

뮤직박스의 음악은 미리 선곡되어 있다. 상황에 따라 곡이 바뀌거나 박스의 뚜껑을 여는 주체의 의사와 무관하게 정해져 있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박스속의 태엽이 망가지지 않는 한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음악은 동일하게 재생될 수 있다.

뮤직박스의 음악과 달리 과거에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재생해 주는 장치는 없다. 일정한 목적을 위해 과거의 사실을 재확인하는 사회적 장치로서 법정이 있지만, 법정에서 확인되는 과거사실도 발생한 그대로 법정에서 재현되는 것이 아니다. 법정에서 활약하는 소송주체의 의사에 따라 과거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재구성될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다. 뿐만 아니라 법정에서 재확인될 수 있는 과거 사실은 일정한 시간 내의 것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뒤따른다. 따라서 이른바 공소시효가 지나가 버리면 범인을 알아도 그를 형사법정에 세우지 못한다.

영화, ‘뮤직박스’는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후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40년을 아무런 문제없이 지내온 한 남자와 그의 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딸의 아버지는 어느날 갑자기 잔혹한 살육을 자행한 장본인이라는 혐의를 받아 미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한편 딸은 명망 있는 변호사로서 아버지가 뒤집어 쓴 혐의를 벗기려고 노력하면서 아버지가 살았던 과거 시간대의 실체적 진실을 찾아 나선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범죄자일리 없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딸의 확신과 아버지의 과거범죄를 입증해주는 증거와 증언이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영화, ‘뮤직박스’에 법적인 시각을 투영하여 보면 세 가지 근본적인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 첫 번째 물음: 얼마만큼의 과거사실에 대해 법적인 평가가 가능 한가

이 문제에 대해 우리나라의 법은 가장 중한 살인죄를 범한 자라도 15년 동안 형사법정에 세우지 못하면 더 이상 단죄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20년 혹은 25년이라는 공소시효를 인정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공소시효제도는 오랜 과거의 범죄 사실은 시간이 경과하면 증거가 사라져서 입증하기가 어렵고, 또 처벌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된 데 대한 국민의 신뢰를 인정하고 법적 안정성을 유지하기 하기 위해 실체적 진실을 희생시키는 제도로 인정되고 있다. 따라서 공소시효가 완성된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공소시효기간을 연장하거나 공소시효기간을 없애는 입법이 이루어지면 그러한 법률은 형벌불소급원칙에 반하는 위헌법률로 되는 것이 근대법의 철칙으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집단살해와 같은 반인륜적 범죄나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없애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시간적 경과에 의해 증거의 증명력이 약화된다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일 수도 없고, 공소시효제도 그 자체가 ‘정의’와 ‘법적 안정성’이라는 두 가지 법이념 가운데 법적 안정성을 고려한 정책적 판단의 소산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과 기본가치라는 기본적 인권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행위들을 공소시효라는 안전핀의 보호를 받는 것을 막아야 할 요청이 더 클 경우도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공권력의 부당한 행사로부터 시민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신뢰의 이익이 공소시효제도를 인정하는 근본취지의 하나로 인정되고 있으므로, 일반시민이 향유하는 신뢰의 이익을 스스로 범죄를 범한 국가기관에 대해서는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국가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제도를 인정할 이유도 없다고 하는 것이 법치국가이념에도 합치된다고 할 수 있다.

# 두 번째 물음: 부모의 범죄사실을 알게 된 자식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가족 간의 정을 고려하면 가족구성원의 범죄사실에 대해 눈을 감는 태도에 대해 법적인 개입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은 자기 또는 배우자의 직계존속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친족이 범인임을 알고 은닉 내지 도피시키거나 그 증거를 없애주더라도 형법상 범인은닉죄나 증거인멸죄로 처벌하지 않는다. 형법교과서에서는 가족 간의 정을 생각하여 그러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임을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책임이 조각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물론 가족구성원의 범행과 관련된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도 법이 불간섭주의를 취하지는 않는다. 얼마 전 우리를 경악하게 했던 ‘용산신발가게 강간사건’에서도 아버지의 범행은폐행위에 적극 가담한 아들에 대해서 범인은닉죄나 증거인멸죄를 적용하지는 않았지만 사체유기죄는 인정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1심법원은 ‘피고인은 아버지의 범행을 알고서도 이를 신고하지 아니하는 데 그치지 아니하고, 가게 내부의 피를 닦아내고, 아버지를 도와 피해자의 사체가 담긴 상자를 운반한 후 소훼하는 등 아버지의 범행을 은폐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에 나아갔는데, 비록 아버지를 돕겠다는 심정으로 이 사건 범행에 이르게 되었다고 하나 반인륜적 범죄에 대하여 가족관계를 내세워 변명할 수 없다 할 것’이라는 판결을 내림으로써 3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 세 번째 물음: 변호사는 의뢰인의 비밀을 어디까지 유지해야 하는가

법률서비스 제공과정에서 의뢰인의 보호를 위해 인정되는 ‘비밀유지의무’와 변호사에게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진실의무’간의 충돌문제는 우리를 더욱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한다. 우리나라 변호사법 제1조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으로 그 사명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변호사가 그 자신의 개인적 신용과 소송기술에 의하여 소송의 결과를 좌지우지 하는 인물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법(정의)의 발견을 목표로 하는 자라면 변호사가 의뢰인의 과거 범죄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비밀유지의무에 앞서 정의를 위해 진실의무를 이행해야 할 것을 요청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요청은 현실적인 변호사상(像)과는 거리가 있는 이상적인 변호사상(像)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이와 같은 변호사의 의무충돌사례가 현실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최근 법률서비스시장이니 사법서비스 등과 같은 말에서 표현되고 있듯이 법적 분쟁의 장에 있어서 법률가의 지위나 역할에 있어서 지각변동이 생김에 따라 의뢰인과 변호사간의 신뢰관계, 즉 의뢰인의 사익적 측면이 보다 강조되고 있어 전통적으로 공익적 측면이 강조되던 변호사상과 일정한 간극이 생기고 있다.

일찍부터 이러한 문제에 봉착한 미국변호사협회에서는 변호사가 의뢰인의 전과를 의뢰인과의 교신에 의해 알았을 경우 의뢰인에게 고백을 충고해야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의뢰인과의 교신이외의 수단에 의해 전과를 알고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법원이 변호사에게 전과의 유무를 물을 때는 변호사는 법원에 대한 대답을 사절하고 사건을 사임해야 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미국에서는 변호사의 비밀유지의무와 진실의무의 충돌문제에 있어서는 비밀유지의무를 우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진실유지의무에 대해 비밀유지의무를 양보하는 분위기 내지 정서가 더 강하게 작용할지도 모른다. 특히 형사법영역에서는 내란죄와 같은 반국가범죄나 대량살인과 같은 중대범죄에 있어서 예외적으로 변호사의 진실의무가 비밀유지의무보다 우선할 필요가 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 될 가능성이 다분하다.

열어야 하는 뮤직박스와 해독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블랙박스

영화, ‘뮤직박스’의 스토리에서는 이민서류에 과거의 범죄사실을 은폐하고 허위의 사실을 기재하였음을 이유로 이민법위반이 문제되었지만, 40년이나 지난의 과거의 범죄사실에 대해 공소시효 없이 단죄하여야 하는 세계사적 흐름을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그려내고 있다. 그 때문에 뮤직박스를 엶으로 실체적 진실을 발견한 딸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고 아버지를 법의 심판대로 보낸다. 그리고 그 딸은 그 신분이 변호사임에도 불구하고 의뢰인에 대한 비밀유지의무 보다는 진실의무를 앞세운다.

뮤직박스가 뚜껑을 열지 않으면 음악소리를 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과거사실도 법정에서 다루어지지 않으면 거기에 대해 어떠한 법적인 의미도 부여할 수 없다. 문제는 어떤 사실을 법정까지 가져가기 위해서는 과거 사실이 증거에 의해 입증되어야 하므로 뮤직박스의 뚜껑을 여는 일과 같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영화, ‘뮤직박스’에서 열어야만 음악소리를 들려주는 뮤직박스는 숨겨진 진실을 간직하고 있는 ‘블랙박스’로 등장한다. 영화, ‘뮤직박스’는 더 나아가 우리의 과거 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의 생각과 행동도 모조리 블랙박스에 간직될 것이라는 경고를 주고 있다. 법률적인 의미에서의 단죄를 목표로 하고 있지 않고 화해와 용서라는 목표를 지향하고 있긴 하지만 거세게 일고 있는 과거사진상규명의 물결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물결로서 이미 오래전부터 블랙박스 속에 내장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법은 아버지를 고소하지 못하게 하지만 어느 날 아버지가 잔혹한 살인자임을 알게 되면 법의 태도여하와 상관없이 내 아버지를 밀고할게 될는지도 모른다. 변호사제도 역시 현재의 우리나라의 법 감정이나 정치`사회적인 분위기가 진실의무를 앞세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의뢰인에 대한 변호사의 충실의무 내지 비밀유지의무가 다른 어떠한 공적인 의무보다 우선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블랙박스뿐이다.


편집 ㅣ 성균웹진 전미린 기자 (wjsalfls@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