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수영화가 아닌 영화,「괴물」

  • 113호
  • 기사입력 2006.08.29
  • 취재 도진국 기자
  • 조회수 6516


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 보기전 괴물과 보고난 괴물

제목만 보면 영화, ‘괴물’은 단순한 공상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나 역시 영화, ‘괴물’은 처음부터 관람대상 목록에 들어 있지 않았다. 내게 있어 판타지는 나의 뇌 속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의 분비가 만들어내는 잠결속의 꿈의 경험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에 이끌림이 있었는지 어떤 외부환경의 압박 탓인지 몰라도 누구 보다 일찌감치 괴물을 보러갔다. 보고 난 괴물은 보기 전 괴물과는 달랐다. ‘괴물’이 어떠냐고 묻는 이들에게 처음 내뱉은 일성은 그것은 ‘괴물영화’가 아니었다는 말이었다. 영화, ‘괴물’에 등장하는 것은 ‘괴물’은 판타지 속 ‘괴수’가 아니라 실제하는 돌연변이 생물체라는 설명도 시도해 보았다. 국내 영화사의 모든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괴물같은 영화, ‘괴물’은 밤낮으로 전국에 출몰하고 있고, 심지어 심야토론회에도 등장하였다. 그래서 너도 나도 ‘괴물’을 보러 나서는 대열에 서고 있다.

:: 괴물의 성공비결

영화는 누가 뭐래도 종합예술의 한 장르이다. 나는 예술의 거대한 문밖에서 서성대는 문외한에 불과하지만, 명성이 자자한 예술작품에 공통된 속성을 한가지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 한가지 속성은 인간본성의 샘에서 솟구쳐 오는 예술적 영감에 의한 작품들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속성을 가진 창조는 분석적 설명이 따로 없다 해도 보는 사람의 감수성을 직접적으로 자극한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볼 때 영화, ‘괴물’에 대한 우리의 이끌림은 생물학적 차원에서 볼 때 이 영화가 인류진화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인간의 본성적 요소, 즉 부모와 자식간의 결속이나 가족의 협력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다가 영화, ‘괴물’은 다시 소설이나 신화 속에서 가장 보편적인 테마, 즉 ‘괴물이 인류를 위협한다’는 외피로 잘 포장되어 있어 오락성까지 보장해주고 있다.

영화, ‘괴물’의 매력을 더해주는 또 다른 요소는 괴물에게 빼앗긴 가족구성원을 찾으려는 박강두(송강호 분)네 일가의 힘겹고 외로운 투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외부세력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공권력은 힘없고 벙벙한 박강두 가족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훼방꾼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박강두를 정신이상자로 취급하여 전두엽절제수술까지 감행하는 파란 눈의 의사를 보노라면 과학기술의 오남용에 대한 반감의식까지 불러일으킨다. 위기와 곤경에 처한 박강두 가족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은 화학약품살포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일반시민과 괴물의 아가리에 휘발유를 끼얹는 정체불명의 노숙자뿐이다.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무정부주의를 옹호하고 싶은 이성의 외마디가 ‘괴물’을 향해 내질러진다.

:: 영화, 괴물의 간접화법

그러나 가족애에 대한 본능적 감정이입과 불량국가에 대한 이성적 성찰을 가능케 함으로써 대중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는 영화, ‘괴물’의 진정한 힘은 다른 데 있다. 영화, ‘괴물’은 대중적 인기를 극대화시킬 수 있는 영화적 요소를 전면에 드러내면서도 지구환경오염이라는 묵직한 사회적 주제를 은근하게 강조하고 있다. 특히 영화, ‘괴물’은 사회적 메시지를 선포하는 난해한 해체주의와 설교조의 하이톤을 과감하게 없애버리고 있다. 한강에 방출된 포름알데히드라는 화학물질, 바보같은 박강두네 가족들, 위기대처능력에 있어서 객관적 실체를 찾아내지 못하고 겉도는 국가공권력, 한강에 출몰한 괴물을 퇴치하는 일에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개입이라는 몇 가지 요소들은 어리석은 인류가 직면한 범지구적 환경문제를 둘러싼 이모저모와 연결시키기란 어렵지 않다. 지구의 생태환경을 무시하는 인간에게 다가올 재앙이 어류와 양서류의 중간형태로 돌연변이 된 괴물과 직접적인 알고리즘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괴물은 우리에게 보복을 가하는 자연의 자객이고, 인류는 환경문제를 통해 비로소 하나라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는 식의 담론의 주제가 될 수 있느니 만큼 단순한 판타지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영화, ‘괴물’의 모티브가 된 것도 실제로 지난 2000년 용산 미군부대 영안실에서 포름알데히드라는 시체방부 처리용 화학물질을 다량 방류시킨 ‘맥팔랜드 사건’이라고 한다. 미국인 의사 맥팔랜드의 지시에 따른 한국인 군무원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이를 시민단체에 제보했으나 그는 오히려 인사상의 불이익만 당했고, 책임자인 맥팔랜드는 뒤늦게 우리나라에서 형식적인 형사처벌을 받았을 뿐이라고 한다.

:: 환경문제에 대한 법의 진화

각국의 법은 종래 환경문제에 대해 매우 미온적인 대처를 해 왔을 따름이었다. 환경오염유발행위라도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가 직접적인 피해가 없을 경우에는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환경문제의 심각성이 다각도로 밝혀지고 환경오염의 위협이 인류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자각이 있으면서부터 법의 대응태도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환경권이라는 것이 제3의 기본권으로 인정되었는가 하면 환경오염행위와 외부로 드러난 피해와의 인과관계의 입증기준도 완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법은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가 없는 환경오염 그 자체에 대해서도 금지하는 태도로 대처하고 있다. 단순한 쓰레기 방치만으로도 과태료가 부과되고, 그 보다 심한 환경오염행위에 대해서는 형벌이 부과되기도 한다. 이는 법이 ‘환경’ 그 자체를 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가치, 즉 환경 그 자체가 ‘보호법익’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 환경문제에 대한 파우스트적인 선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자연주의적 자아상’과 ‘면제주의적 자아상’ 사이에서 파우스트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에드워드 윌슨 저, 최재천/장대익 번역, 통섭, 참조). 전자는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되돌리기를 바라는 자연이 인류를 품어 기른 독특한 물리적․생물학적 환경이라고 관념한다. 자연에 인류의 생존이 있으며 우리의 유전자가 규정한 정신적 평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후자는 인류가 자연세계와 떨어져 존재하며 그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기 때문에 다른 종을 규제하는 엄격한 생태적 법칙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한다. 서양문명의 지침이 되기도 한 이 자아상에 따르면 인류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특별한 지위와 독창력으로 극복할 없는 한계는 거의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구증가와 경제성장의 어쩔 수 없는 대가로 이러한 위험한 행보를 계속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 괴물이 전하는 메세지

영화 속의 ‘괴물’은 우리의 의식의 한강 속에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하고 싶은 면제주의자의 사고를 바꿀 미션을 부여받은 메신저이다. 따라서 영화 속의 강두네 가족에게 대적하는 적은 ‘괴물’이 아니라, 환경에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는 면제주의적 사고이다. 자연주의적 자아상에 맞는 새로운 환경윤리를 탐색하여 환경법을 진화시키지 못하고, 환경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이 계속되는 한 제2의 제3의 괴물은 끊임없이 등장할 것이다. 면제주의자들이 멀쩡한 우리의 뇌수술을 강요하는 한, 괴물은 그 형상을 달리하면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삼키려 들 것이다. 영화 속의 박강두처럼 오직 잃어버린 경험을 한 자만이 괴물의 출몰에 대해 외로운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영화, ‘괴물’의 수준 있는 간접화법은 괴물의 구경꾼자로 하여금 더 이상 방관자로 머물러 있지 말 것으로 경고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편집 ㅣ 성균웹진 전미린 기자 (wjsalfls@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