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권리를 찾아서,「씨 인사이드」

  • 134호
  • 기사입력 2007.06.15
  • 취재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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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로스쿨의 영화들> 저자

전통적인 생명윤리에 대한 도전

살아가는 동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란 어렵다. 특히 그것을 원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아무도 바라지 않는 일은 이루기가 쉬워야 마땅할 터인데, 생명포기에 관한 한 그렇지가 않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나라의 법은 진정으로 죽기를 바라는 사람을 순순히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설혹 그가 시한부에다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을지라도 견디어내며 끝까지 생명을 유지하라고 한다. 그러한 지경에 있는 자의 요청에 따라 그가 편안하게 눈감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위까지도 형벌로써 금지하고 있다. 생명의 처분권에 관한 한 전통적인 생명윤리에 따르면 개인의 생명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생명이 생명주체의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내가 나의 머리카락을 내멋대로 자르듯 나의 생명은 그렇게 할 수 없는가? 삶은 의무인가 권리인가?

허락되지 않는 죽음앞에 선 남자

전통적인 생명윤리에 도전하는 영화, ‘씨 인사이드’(The Sea, Inside)에서 ‘죽을 자유’를 향해 힘겨운 투쟁을 벌이는 라몬 샴페드로도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20대에 다이빙을 하다가 목뼈가 부러져 26년째 사지가 마비된 환자로 침대에만 누워지낸다. 그가 원하는 것은 두발을 땅에 딛고 일어서는 것도 아니고, 한 손만이라도 움직여 자신의 몸을 추스르는 것도 아니다. 그의 유일한 소원은 바로 품위있게 죽는 것이다.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자신을 돌보는 가족들에게 더 이상 짐으로 남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가 없는 삶은 삶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기꺼이 죽고자 한다. 하지만 그는 죽지 못한다. 우선 목부위 아래로는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신체적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의 힘으로는 죽을 방법이 없다.

뿐만 아니라 카톨릭의 전통이 강한 스페인의 현행법이 자살방조행위를 처벌하고 있어서 누구도 감히 그를 도와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좌절케 하는 것은 진정으로 죽기를 바라는 그의 소원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점에 있다. 그들은 삶이란 단지 팔을 움직이거나 뛰어다니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라몬을 달랜다. 그들은 우리가 영원에 속해있기 때문에 삶과 죽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그들은 라몬이 삶의 의지가 부족하거나 주변에 보살피는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끌어내기 위해 괜히 하는 말에 불과하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법원의 판사도 실정법의 해석상 존엄하게 죽으려는 그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못 박는다.

안락사와 조력자살

영화, ‘씨 인사이드’에 대해 흔히들 안락사나 존엄사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영화라고 한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해 이 영화는 안락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안락사’란 불치의 병에 걸려 참을 수 없는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으면서 죽을 시기가 임박하여 있는 환자의 진지한 요구에 따라 의사가 치료를 중단(소극적 안락사)하거나 적극적인 개입으로(적극적 안락사) 그 생명을 단축시키는 것을 말한다. 더 나아가 존엄사란 환자에게 아무런 의식이 없고 더 이상 소생가능성이 없이 생명 연장 장치에 의해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경우 그 환자의 생전의사(living will) 또는 그 가족의 진지한 요구에 의해 무의미한 치료를 중단하는 경우를 말한다.

반면에 ‘씨 인사이드’의 라몬은 단지 몸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할 뿐이지 육체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도 않고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도 아니며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자의 생명을 스스로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허용되는가 하는 문제는 안락사의 문제와는 별도로 조력자살(assisted suicide)이라는 이름으로 다루고 있다. 조력자살의 문제는 개인이 조력자살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로서 보다 근본적으로는 죽을 권리 내지 죽는 방법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요구에 관한 문제이다.

조력자살의 문제의 중심에는 미국의 ‘킬러의사’ 잭 케보키언(Jack Kevokian) 박사가 있다. 그는 자살기계(타나트론)를 고안하여 불치병에 걸려 죽고자 원하는 사람이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어 여러 차례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켰다. 1999년 마침내 미국의 법정은 그에게 2급 살인죄를 적용하여 10∼25년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8년을 교도소에서 보낸 그의 출소(가석방)를 앞두고 2007년 5월 미국의 여론조사기관이 행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인들 3분의 2 이상(68%)이 환자에게 '죽음을 허용해야 할 상황이 있다'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사나 간호사들이 어떤 상황에서든 환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견은 30%에 불과했다고 한다.

변화의 조짐들

윤리문제가 여론조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전통적인 생명윤리가 변화의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은 미국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이미 1993년에 이러한 입장에서 자살방조죄를 범죄시하고 있는 형법조항이 무효라고 주장하는 소송이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사람은 법에 따라 동일하게 이익을 얻고 보호받으며 장애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는 캐나다의 권리헌장에 따르면 자살을 도우는 행위를 처벌한다는 법이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끝낼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신체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도움없이도 자살할 수 있지만 신체를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은 그렇지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법원에서는 비록 패소했지만 9명의 판사 중 수석판사를 포함한 4명이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인 만큼 이 사건은 캐나다 역시 새로운 생명윤리를 정립하려는 변화의 요구가 일찍부터 전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자신을 죽여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을 죽이도록 법률이 허용하는 나라가 세상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와서부터 이른바 자발적 적극적 안락사를 법률로 허용하는 나라가 하나둘씩 생기고 있다. 1993년 네덜란드는 자살을 돕거나 안락사를 감행한 의사를 기소하지 않는 조건을 합법화하였다. 1994년에는 미국의 오리건주에서는 죽도록 도와달라고 요구하는 불치병 환자를 위해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약을 의사가 처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문제에 대한 찬반투표에서 찬성론이 근소한 차이로 많았다. 1995년 호주 북부지역의 입법의회는 자의적인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법률을 세계최초로 통과시켰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실제로 의료현장에서 안락사나 조력자살의 문제가 법적 문제로 비화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안락사나 존엄사 혹은 조력자살에 관한 외국의 사례가 붉어질 때 마다 사회적 분위기가 생명의 신성성 내지 절대성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인 생명윤리관의 허와 실을 되돌아 보는 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2007년 6월 우리나라에서도 비록 소극적 안락사의 문제이지만 말기암환자의 산소호흡기를 떼어내어 환자를 죽게 한 의사가 의사가 살인 혐의로 고소되었고, 경찰이 검찰의 지휘를 받아 ‘무혐의’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넘기는 일이 일어났다. 이제 우리도 삶과 죽음에 대한 21세기적 사고를 적극적으로 전개할 때가 되었다.

새로운 윤리관의 정립을 위한 동력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는 ‘나는 환자의 요구가 있다 할지라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약을 처방하지 않을 것이고 이것을 제안하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한다. 1987년 세계의사협회는 ‘환자의 요구가 있을 때조차도 안락사는 비윤리적’이라는 견해를 재천명했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 세계 곳곳에 이러한 생각을 고수하는 의사를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예컨대 인구의 약 80%정도가 자의적인 안락사를 지지하는 네덜란드에서, 안락사 요구를 거절한 의사는 단지 4%에 불과했다고 한다. 생명의 절대성과 신성성을 전제로 하는 전통적인 윤리는 ‘삶을 제거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라고 한다. 하지만 ‘씨 인사이드’의 라몬은 ‘자유가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시간과 의식의 변화만이 언젠가는 그의 요구가 정당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말해 줄 것이다’고 한다.

‘씨 인사이드’는 생명에 관한 전통적인 윤리가 만들어낸 사회적 금기와 법률적 금기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될 압력을 저 멀리 스페인에서부터 밀어 보내오고 있다. 그 변화의 압력은 어떤 나라든지 그 나라의 국민들이 죽는 방법을 스스로 죽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죽을 수 있는 방법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시기를 앞당기는데 기여할 것이다. 모든 국민들이 높은 수준의 의료보험과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으면서 주치의와 환자가 서로 오랫동안 친분관계를 맺어오고 있는 의료관행을 가지고 있는 네덜란드와 같이 자발적 적극적 안락사를 허용할 수도 있고, 개인이 자유와 권리가 고도로 강조되기 때문에 시민들이 스스로 죽음에 대한 결정을 내린 후 의학적인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개개인에게 인정하는 모델로 나아갈 수도 있고, 제3의 입법모델을 개발할 수도 있다.

개인적 자유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라면 삶이 계속될 가치가 있느냐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는 바로 그 자신이어야 한다. 영화, ‘씨 인사이드’는 - 어느 영화평론가가 말했듯이 - ‘우리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작품’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윤리관을 정립하도록 하는 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편집 ㅣ 성균웹진 김동선 (dsironz@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