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고발과 내부고발자의 분리원칙, 마이클 클레이튼

  • 150호
  • 기사입력 2008.02.15
  • 취재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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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로스쿨의 영화들> 저자

▷▶ 질문에 답을 찾아

내부고발은 의로운 행위인가 배신적 행위인가? 내부고발자는 보호의 대상인가 보복의 대상인가? 모범답안을 뻔히 알고 있고, 물으나 마나한 질문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그러면 나도 내부고발자가 될 수 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선뜻 답변을 할 수가 없다. 내부고발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왜곡된 시선 때문일까, 내부고발자에 대한 나의 편견 때문일까. 내부고발 행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정당함이나 그것이 사회에 미칠 긍정적 효과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내부고발자의 비리폭로의 시점이나 고발의 동기 등 때문에 내부고발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둘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내부고발 행위 그 자체의 가치적 측면보다 내부고발자에게 있는 반가치적 측면 때문에 생기는 양가적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때마침 내부고발자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영화, 마이클 클레이튼이 상영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혀 영웅답지 않은 변호사 마이클 클레이튼의 심경변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간접 체험해 봄으로써 내부고발자를 바라보는 나의 불확실한 태도를 교정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면서 스크린 앞에 앉았다.

▷▶ 세 부류의 변호사들

영화, 마이클 클레이튼에는 세부류의 변호사가 나온다. 먼저 마이클 클레이튼은 대형로펌에 고용된 변호사로서 아무런 도덕적 기준없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소임을 기술적으로 해결하고 문제의 소지를 무마하는 미지근한 실속파이다. 이에 반해 그의 동료 아서 에든스는 자기가 소속해 있는 로펌에 사건을 의뢰한 U/노스 회사에 불리한 증거를 원고에게 전달해주려고 하는 뜨거운 정의파이다. 마지막으로 카렌 크로더는 U/노스의 법제부에서 일하는 여변호사로서 회사의 불법을 은폐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차가운 충성파이다. 영화, 마이클 클레이튼은 현실주의자 마이클 클레이튼이 내부고발자인 이상주의자 아스 에든스가 알게 된 ‘진실’의 실체에 접근하게 되면서 스토리가 진행된다. 그 전까지도 정의의 편에 선다는 의식도 없고 그럴만한 아무런 내적 동기를 가지지 못하던 그가, 동료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스스로 동료의 이상주의를 실천하기 위해 불법을 자행하는 U/노스 회사와 그 변호사 카렌 크로더와 목숨을 걸고 한판 승부를 벌인다.

▲ 정의 충성 실속의 성격을 가진 세 인물
 
▷▶ 법의 이념과 법률가의 가치기준

법은 곧 정의이지만, 법을 다루는 법률가가 모두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법률가가 되려는 자들은 누구나가 학창시절부터 정의의 편에 서려는 마음가짐을 가지지만, 막상 법률가가 되고 난 이후에는 초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다. 카렌 크로더처럼 조직을 위해서 불의의 편에 서기도 하고, 마이클 클레이튼 처럼 가족을 위해서 불의에 눈 감을 수도 있다. 특히 사람은 누구나 사회와 접점을 많이 가질수록 스스로 가치의 순위가 뒤바뀌어지는 경험을 한다. 정의와 진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부와 명예가 대신 들어서고, 내 가족과 내 직장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가치판단의 최유력 기준이 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가치 전도현상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바뀔 수도 있다. 마이클 클레이튼의 예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합법적으로 처리 할 수 없는 사건들을 전담하는 전문 해결사로서 떳떳하지 않은 분야에서 일하는 변호사 마이클 클레이튼, 도박에 손댄 적도 있고 알코올중독자인 동생 때문에 일주일 안에 8만 불을 갚아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있는 그가 어떻게 변해가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의 엔딩자막이 올라갈 때면 그의 동기가 무엇이든 그의 과거행적이 무엇이든 그것들이 그의 행동을 다르게 평가하는 데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 고발행위와 고발자의 분리 원칙

진실과 정의가 누구에 의해 밝혀지고 추구되는지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지하철 철로에 추락하여 전동차에 치일 위기에 처해있는 사람을 구해준 자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건, 천하의 사기꾼이건 생명구조행위 그 자체의 가치에는 변함이 없다. 마찬가지로 사회정화의 효과를 가져오는 고발행위의 가치는 내부고발자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내부고발행위가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자기희생의 발로가 아니라 개인적 이익을 위해 조직과 맞서는 폭로적 성격 또는 조직에 불이익을 받은 당사자의 배신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라도 그 행위 자체를 평가절하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이상주의자 아서에 의해 밝혀졌든 현실주의자 마이클에 의해 밝혀졌든 진실은 진실이고, 정의는 정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내부고발 행위가 정당하게 평가되고 있지 않는 것은 이 당연한 사실이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 탓인 듯하다. 의리와 충성의 문화가 뿌리 깊은 우리 사회의 풍토에서 내부고발자는 곧 고자질쟁이로 낙인찍히기 일쑤이다. 바로 이 때문에 내부고발은 그 자체 의로운 행위로 보면서도 내부고발자는 배신자라는 모호한 이중적인 잣대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듯하다. 조심스럽게 개인적 의견을 물어본 결과 ‘선한 폭로’ 보다는 차라리 ‘악한 의리’를 택하는 편이 낫겠다는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 역시 이 대열에서 열외라고 말할 수 없다. ‘나도 내부고발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답을 유보할 수 밖에 없는 나의 모호한 태도의 원천도 바로 이점, 즉 내부고발과 내부고발자를 한 묶음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 진실의 실체에 접근한 그, 마이클 클레이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옛말이 있다. 어렸을 적 ‘법창야화’라는 제목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무수히 들었다. 요즘에 다시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았다. 죄와 그 죄를 지은 사람을 별개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말에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가치평가와 관련한 두가지 중요한 기본원리가 들어있다. 하나는 행위자와 행위 그 자체를 분리해야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의 행위와 과거의 행위를 엄격히 절연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평소 존경을 받고 훌륭게 비난과 질타가 가해진다. 법규범의 영역에서의 제재의 체계도 이와 같은 두 가지 기본원리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옛말은 어떤 행위에 대한 사회적 법적 평가의 기본이 되는 상위의 원리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형법도 ‘행위자’ 책임이 아니라 ‘행위’ 책임을 중심되는 책임의 원리로 여기고 있다.
이와 같은 근본원리는 비난과 제재의 반대영역인 칭찬과 보상의 영역에서도 그대로 타당하다. 굳이 만들라면, ‘사람은 밉지만 그 행위는 칭찬하라’는 공식을 하나 만들 수도 있겠다. 부패한 경찰관이라도 그가 희대의 연쇄 살인마를 검거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면 그의 부패행적이나 평소 인간성과는 무관하게 대중매체의 각광을 받고 상급을 받아 마땅하다. 법의 정신은 이미 이 점을 근본원리로 받아들여 내부고발자 보호 및 보상을 기본적인 내용으로 하는 내부고발자 보호법 등을 마련한지 오래이다.

▷▶ 우리나라 부패방지법과 공익제보자보호 수단의 강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내부고발자의 보호와 보상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몇 년전의 일이다. 미국은 이미 70년대부터 내부고발자보호법(Whistleblower Protection Act) 이외에 부정고발법(False Claims Act)등이 존재하였고,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지아, 홍콩 등 많은 나라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내부고발자 보호법안을 제정하라는 지속적인 요구가 있어 왔으나, 2001년 7월에야 부패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하고 2002년 1월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하지만 부패방지법 제2조는 부패행위의 범위에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공직자의 부패행위만을 포함시키고 있어 일반 사기업의 구조적 비리를 제보한 경우에는 부패방지법상의 보호와 보상을 받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목숨을 걸고 제보한 내용이 제대로 시정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언론은 언론대로 내부고발을 한 고발자에게만 관심을 쏟을 뿐 고발된 내용 그 자체는 뒷전인 경우가 많다.

내부고발과 내부고발자라는 용어가 우리의 왜곡된 생각을 만들어내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공익제보(자)라는 말을 쓰는 것도 하나의 방편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공익제보자 보다는 공익제보 내용 그 자체에 착목하여 그 내용을 철저히 관철시키는데 주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공익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정의하여 부패방지법의 적용범위를 공공기관 이외의 조직과 기구에까지 확장시켜야 한다. 공익제보자가 대부분 조직 내에서 부당한 인사조치를 당할 뿐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따돌림을 당하여 그야말로 조직의 쓴 맛을 보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강화된 보호수단들이 정교하게 갖추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는 사안과 사람을 다르게 보는 기본적인 시각을 체득해야 한다. 교과서의 지식과 그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는 같지 않다. 종교의 가르침과 종교지도자도 엄연히 다르다. 시는 ‘시’이고 시인은 ‘시인’인 것이다. ‘사안’과 ‘사람’을 분리함(즉, 나는 당신은 좋아하지 않지만 당신의 의견에는 찬성합니다. 혹은 내가 당신을 여전히 존경하지만 당신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조직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건전한 토론과정을 거쳐 합리적인 해법을 찾아가는 일 뿐 아니라 사회정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내부고발 행위가 가지는 가치를 희석시키지 않는 데 결정적으로 요구되는 기술과 지혜이다.

▷▶ 구원의 호루라기 소리

공익제보자를 흔히 호루라기 부는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오래전에 본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에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호루라기 부는 모습이 있다. 침몰한 배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칠흙같은 바다위에서 표류중인 여주인공이 살아야 할 이유를 내면에 간직한 채, 체온이 식어가서 시퍼렇게 굳어있는 입술로 사력을 다해 호루라기를 분다. 그 비장한 호루라기 소리는 위험에 처해 있는 자가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이다. 공익제보자들의 호루라기 소리에서 ‘배신의 불협화음’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썩어들어 가고 있는 환부가 도려내어질 때 나는 ‘구원의 신호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편집 ㅣ 성균웹진 정동환 (restartj@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