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금지법의 아우라, 4개월, 3주… 그리고 2일
- 152호
- 기사입력 2008.03.19
- 취재 도진국 기자
- 조회수 6684
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로스쿨의 영화들> 저자 |
90년대 중반 나는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입학시험의 논술문제로 출제할 대상주제의 하나로 낙태문제를 포함시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출제위원들은 여고생들에게 낙태라는 문제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어서 선정대상에서 조기탈락하고 말았다. 우리사회에서 낙태문제만큼 중요한 무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는 문제는 드물다. 미국에서는 낙태에 대한 찬반입장이 대통령선거에서도 후보자가 반드시 밝혀야 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문제가 좀처럼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낙태문제를 전면에 등장시키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영화, ‘432’는 1987년, 독재정권에 대한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의 루마니아의 어느 한 낙태현장으로 나를 데려갔다. 낙태가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여대생 오틸리아는 기숙사의 룸메이트인 가비타의 낙태를 돕기 위해 나선다. 오틸리아와 가비타를 호텔방에서 만난 불법낙태시술자 베베는 발각의 위험이 높아졌고 돈이 모자란다는 핑계로 이 둘의 몸까지 요구한다. 당사자도 아닌 오틸리아는 그날밤 남자친구의 집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으면서도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단단한 올가미에 얽힌 듯 결국 베베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가비타는 친구의 희생을 당연한 듯 무표정과 우유부단함으로 일관하지만 베베의 포획의 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후 가비타에 대한 베베의 낙태시술은 고도의 긴장감속에서 소리없이 진행된다. 가비타의 몸속에서 태아의 침묵의 비명소리가 무겁게 들리는 그 시각, 같은 호텔의 일층 연회실에서는 누군가의 생일축하 파티의 음악소리가 나지막히 흐른다.
영화 432는 독재정권하의 음울한 분위기와 공포심을 세상의 어떤 공포영화보다 더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마치 내 가슴속의 거친 호흡소리마냥 리얼하게 들리는 오틸리아의 거친 숨소리에 날숨조차 쉴 수가 없다. 그녀가 내딛는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예측못할 동선을 따라가노라면 내가 오틸리아인지 오틸리아가 나인지 분간할 수 조차 없다. 이 숨막히는 답답함과 팽팽한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불안과 공포의 원인은 끔찍한 영상이나 기괴한 음향효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루마니아에서 유효하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낙태금지법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였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를 뒤로 물러서도록 압박한 카드는 영화 432가 보여준 낙태금지법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낙태를 원하는 자들은 사정이 절박하니만큼 필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낙태금지법은 낙태를 억제하지 못하며 단지 그것을 지하로 숨게 만들 뿐이다. 낙태금지법은 불법낙태시술자나 낙태민간요법을 양산한다. 무자격 의료인이 하는 불법낙태시술은 종종 심각한 합병증을 가져오기도 하고, 심지어 임산부의 생명을 요구하기도 한다. 낙태금지법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에게 어려움과 위험을 증가시키고 불안과 공포는 높이지만, 낙태시술의 숫자를 그만큼 줄이지 못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67년까지 스웨덴과 덴마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서구 민주국가에서 낙태는 금지되었다. 미국에서는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사건에 대해 연방대법원이 임신 6개월 내에는 산모가 중절한 헌법적 권리를 가진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이후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도 모두 낙태를 자유화시켰다. 시험관에서 수정된 수정란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간 브라운(Louise Brown)의 탄생도 낙태금지론자들의 주장을 약화시켰다. 일정한 유형의 불임에 대해 대응하는 시험관수정(IVF: In Vitro Fertilization)기술의 발전 배후에는 잉여로 만들어진 보다 많은 수정란이 폐기되거나 연구용으로 활용된다. 뿐만 아니라 유전공학의 발달에 따라 유전자에 기형이 발견되면 그 수정란을 가차없이 폐기되며, 특히 태아들의 조직이나 세포를 이식함으로써 많은 심각한 질병들의 치료법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면서 태아의 지위와 관련하여 낙태금지론자들의 예봉은 상당히 무뎌진 상태이다.
영화 432가 보여주는 낙태금지법에 대한 반대론은 낙태허용론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유력한 논거중의 하나인 결과주의적 논변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오틸리아에게 엄습해오는 불안과 위협, 초점잃은 눈동자에서 순진성과 뻔뻔스러움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가비타의 모호한 태도, 베베류의 파렴치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부조리 등은 영화 432가 보여주는 낙태금지법이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이다.
|
편집 ㅣ 성균웹진 정동환 (restartj@skku.edu) |
No. | 제목 | 등록일 | 조회 |
---|---|---|---|
68 | 162호 로스쿨을 준비하는 예비 법조인에게 | 2008-08-14 | 5136 |
67 | 161호 최초의 여류서양화가 나혜석 이야기 | 2008-08-02 | 4159 |
66 | 154호 살인본능의 원인을 찾아, 영화, ‘추격자’ | 2008-04-18 | 5484 |
65 | 152호 낙태금지법의 아우라, 4개월, 3주… 그리고 2일 | 2008-03-19 | 6684 |
64 | 150호 내부고발과 내부고발자의 분리원칙, 마이클 클레이튼 | 2008-02-15 | 4870 |
63 | 141호 태극기를 사랑한 화가 김명수 | 2007-10-26 | 5296 |
62 | 139호 영화, ‘화려한 휴가’와 그 뒷 이야기 | 2007-09-23 | 5115 |
61 | 135호 영화,「아버지의 이름으로」와 두 아버지 이야기 | 2007-07-21 | 4661 |
60 | 134호 죽을 권리를 찾아서,「씨 인사이드」 | 2007-06-15 | 5747 |
59 | 132호 영화, ‘타인의 삶’이 주는 묵시록 - 프라이버시의 종말을 막아라 | 2007-05-15 | 6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