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금지법의 아우라, 4개월, 3주… 그리고 2일

  • 152호
  • 기사입력 2008.03.19
  • 취재 도진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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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법학과 김성돈 교수 <로스쿨의 영화들> 저자

90년대 중반 나는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입학시험의 논술문제로 출제할 대상주제의 하나로 낙태문제를 포함시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출제위원들은 여고생들에게 낙태라는 문제를 생각하도록 하는 것이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 중론이어서 선정대상에서 조기탈락하고 말았다. 우리사회에서 낙태문제만큼 중요한 무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는 문제는 드물다. 미국에서는 낙태에 대한 찬반입장이 대통령선거에서도 후보자가 반드시 밝혀야 할 정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 문제가 좀처럼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낙태문제를 전면에 등장시키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작년도 칸 영화제에서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이하에서 ‘432’라 약칭)이라는 제목의 낙태영화가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그로부터 다시 수개월 후 ‘432’가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나는 누구보다 먼저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목적은 오직 하나. 그동안 끊임없이 움직여왔던 낙태에 관한 내 도덕적 진동추의 흔들림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심산을 가지고.

영화, ‘432’는 1987년, 독재정권에 대한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의 루마니아의 어느 한 낙태현장으로 나를 데려갔다. 낙태가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여대생 오틸리아는 기숙사의 룸메이트인 가비타의 낙태를 돕기 위해 나선다. 오틸리아와 가비타를 호텔방에서 만난 불법낙태시술자 베베는 발각의 위험이 높아졌고 돈이 모자란다는 핑계로 이 둘의 몸까지 요구한다. 당사자도 아닌 오틸리아는 그날밤 남자친구의 집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으면서도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단단한 올가미에 얽힌 듯 결국 베베 앞에서 옷을 벗어야 했다. 가비타는 친구의 희생을 당연한 듯 무표정과 우유부단함으로 일관하지만 베베의 포획의 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후 가비타에 대한 베베의 낙태시술은 고도의 긴장감속에서 소리없이 진행된다. 가비타의 몸속에서 태아의 침묵의 비명소리가 무겁게 들리는 그 시각, 같은 호텔의 일층 연회실에서는 누군가의 생일축하 파티의 음악소리가 나지막히 흐른다.
낙태로 인해 탄생하지 못한 생명보다는 탄생한 생명이 많다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그날 밤 오틸리아가 들린 친구집에서도 생일파티가 진행중이다. 남자친구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쌀쌀맞은 신경질로 대응할 수 밖에 없었던 오틸리아는 전화를 받지 않는 가비타가 걱정되어 극도의 불안속에 호텔방으로 돌아오지만 가비타는 천연덕스럽게 자고 있다. 모체밖으로 배출된 죽은 태아를 유기하러 다시 호텔밖으로 나온 오틸리아는 사태(死胎)를 버릴 장소를 찾아 독재정권의 음습한 뒷골목을 헤맨다. 하지만 숨막힐듯 불안감과 공포심을 느낀 후 호텔로 돌아온 오틸리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헌신적인 도움에 고마워하는 가비타가 아니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그날 밤 생일파티가 열렸던 호텔 레스토랑의 식탁에서 배가 고파 음식을 주문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가비타의 얼굴표정에서 엿보이는 지독한 허망함 뿐이었다. 주문한 음식대신 생일파티에서 남은 음식만이 마주앉은 가비타와 오틸리아 앞에 놓여진다.

영화 432는 독재정권하의 음울한 분위기와 공포심을 세상의 어떤 공포영화보다 더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마치 내 가슴속의 거친 호흡소리마냥 리얼하게 들리는 오틸리아의 거친 숨소리에 날숨조차 쉴 수가 없다. 그녀가 내딛는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예측못할 동선을 따라가노라면 내가 오틸리아인지 오틸리아가 나인지 분간할 수 조차 없다. 이 숨막히는 답답함과 팽팽한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불안과 공포의 원인은 끔찍한 영상이나 기괴한 음향효과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루마니아에서 유효하게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낙태금지법이 만들어내는 아우라였다.
영화 432는 태아의 생명보호 논변이나 여성의 자기결정권 논변을 토대로 한 낙태논쟁에 관한 나의 입지를 이전보다 훨씬 협소하게 만들었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내가 아직도 인간의 생명이 시작되는 시점이 언제인지 또는 태아가 가지는 생명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관한 판단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신생아와 태아 사이에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구분선 내지 잠재적 인간으로서의 태아의 법적 지위에 관한 생물학적 지식이 모자란 탓일 수도 있으며 낙태를 둘러싼 윤리적 딜레마에 관해 나의 주장을 강변할 수 없는 나의 도덕적 수준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나를 뒤로 물러서도록 압박한 카드는 영화 432가 보여준 낙태금지법의 어두운 그림자였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낙태를 원하는 자들은 사정이 절박하니만큼 필사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낙태금지법은 낙태를 억제하지 못하며 단지 그것을 지하로 숨게 만들 뿐이다. 낙태금지법은 불법낙태시술자나 낙태민간요법을 양산한다. 무자격 의료인이 하는 불법낙태시술은 종종 심각한 합병증을 가져오기도 하고, 심지어 임산부의 생명을 요구하기도 한다. 낙태금지법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한 여성들에게 어려움과 위험을 증가시키고 불안과 공포는 높이지만, 낙태시술의 숫자를 그만큼 줄이지 못한다.
10년의 징역이 예고되었던 루마니아의 낙태금지법하에서 불법낙태시술로 50여만명이 사망하였다는 말은 지어낸 말이 아닐 것이며, 마찬가지로 낙태금지법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매년 150여만건의 낙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이 뿐 아니라 낙태금지법은 주변사람들까지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 제2, 제3의 오틸리아의 출현을 중단없이 요구할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낙태금지법이라는 시스템에 기생하는 하부시스템 격인 베베와 같은 위협적인 존재를 확대 재생산한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낙태행위 자체에 내재해 있는 윤리적 논쟁에 대한 생각이 어떠하든지 낙태금지법에 대한 강력한 반대론자로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법이 언제나 윤리를 강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를 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 법이 좋은 결과보다 나쁜 결과를 더 많이 가져온다면 그것은 나쁜 법이다. … 그것이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있는 한, 수천의 여성이 그것을 위반하게 될 것이다”라고 진단한 캐나다 왕립 여성지위위원회의 주장에 설득당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67년까지 스웨덴과 덴마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서구 민주국가에서 낙태는 금지되었다. 미국에서는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사건에 대해 연방대법원이 임신 6개월 내에는 산모가 중절한 헌법적 권리를 가진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이후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들도 모두 낙태를 자유화시켰다. 시험관에서 수정된 수정란에서 태어난 최초의 인간 브라운(Louise Brown)의 탄생도 낙태금지론자들의 주장을 약화시켰다. 일정한 유형의 불임에 대해 대응하는 시험관수정(IVF: In Vitro Fertilization)기술의 발전 배후에는 잉여로 만들어진 보다 많은 수정란이 폐기되거나 연구용으로 활용된다. 뿐만 아니라 유전공학의 발달에 따라 유전자에 기형이 발견되면 그 수정란을 가차없이 폐기되며, 특히 태아들의 조직이나 세포를 이식함으로써 많은 심각한 질병들의 치료법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면서 태아의 지위와 관련하여 낙태금지론자들의 예봉은 상당히 무뎌진 상태이다.

영화 432가 보여주는 낙태금지법에 대한 반대론은 낙태허용론자들이 내세우고 있는 유력한 논거중의 하나인 결과주의적 논변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오틸리아에게 엄습해오는 불안과 위협, 초점잃은 눈동자에서 순진성과 뻔뻔스러움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는 가비타의 모호한 태도, 베베류의 파렴치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부조리 등은 영화 432가 보여주는 낙태금지법이 드리우고 있는 그림자이다.
낙태찬반론은 경우에 따라 태아(생명)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지기도 했고, 임산부(자유)의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432는 낙태문제를 태아의 생명보호문제나 임산부의 권리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낙태금지법’이 만들어내는 공포와 부조리, 더 나아가 낙태금지법의 저 너머있는 사람의 욕망에 초점을 맞춘다. 옳은 행위라도 그것을 강제하는 경우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도덕한 행위의 감소조차 가져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낙태의 경우도 그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법은 인간의 본성적 욕망을 제어할 만큼 강하지 않다. 그러한 법은 정작 제어할 대상은 통제하지 못하고 우리의 양심과 품위를 갉아먹어 들어갈 뿐이다. 우리를 가비타와 오틸리아처럼 왜소하게 만드는 장본인을 낙태금지법으로 바라 보는 것은 지나친 태도일까.

편집 ㅣ 성균웹진 정동환 (restartj@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