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의 유래

  • 189호
  • 기사입력 2009.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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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ㅣ 김재원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촛불집회”의 참가자들에 적용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의 야간집회 금지조항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최근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행정수도를 이전하는 법률을 위헌으로 판정한 바 있는 헌법재판소는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첨예한 분쟁을 최종적으로 심판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위헌법률심사’ 혹은 ‘사법심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헌법재판은 미국에서 비롯되었다. 미국 헌법에는 이것에 관한 명시적 규정이 없지만, 연방대법원은 1803년에 “마버리 대 매디슨(Marbury v. Madison)” 판결을 통해 사법심사를 창안했다.

이 판결의 발단은 1800년 11월에 실시된 미국의 선거였다. 이 때 총선과 대선 모두에서 야당이 승리했다. 건국 초기부터 미국에는 양대 정치 세력이 각축전을 벌였다. 한 쪽은 강력한 중앙정부의 필요성을 옹호한 ‘연방주의자’들이었고, 그 반대편은 각 주정부가 독립적이고 강한 권한을 가지는 국가연합을 선호한 ‘공화주의자’(현재의 “공화당”과는 상관이 없음)이었다. 연방주의자인 애덤스(John Adams) 대통령은 야당 정치인들을 내란 선동혐의로 다수 구속하는 강경책을 썼고, 민심은 이러한 여당에 결국 등을 돌렸다.

공화주의자들이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강력한 공화주의자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3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연방주의자들은 정치적 보복을 두려워하여 자구책을 마련해 보려고 동분서주했다. 선거를 통해 입법부와 행정부를 적에게 빼앗긴 연방주의자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사법부였다. 이들은 연방판사의 공석을 자파 인사들로 채우는 것으로 부족하여, 판사직을 신설하여 자파 인사들을 임명했다.

선거는 11월에 있었지만, 차기 대통령의 임기는 이듬 해 3월 4일부터 시작하도록 되었다. 애덤스 대통령은 퇴임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수도 워싱턴 D. C. 지역의 치안판사 42명을 자파 인사들로 임명했다. 마버리(William Marbury)가 포함된 이들 42명은 대통령의 임기 이틀 전에 임명을 받고, 임기 마지막 날 밤에 상원의 동의를 받았다. 역사에 “야밤의 판사들(midnight judges)”이라고 기록된 이들은 3월 4일이 되어 새 정권이 들어서는 바람에 인쇄까지 마친 임명장을 교부받지 못했다.

애덤스 대통령은 자신의 최측근인 국무장관 마샬(John Marshall)을 종신직인 연방대법원장에 임명했다. 당시에 연방대법원은 사건이 거의 없고 영향력도 미미한 기관이었다. 초대 연방대법원장 제이(John Jay)가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한 이후, 후임 대법원장들도 “칼(sword)도 지갑(purse)도 없는” 이 기관을 미련 없이 떠났다. 변호사 활동과 서부지역 땅 투기를 통해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마샬은 사법부마저 공화주의자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4대 연방대법원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차기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한 달이 조금 넘는 기간을 국무장관직도 겸직하면서, 정권의 마지막 날 밤까지 42명 치안판사들의 임명을 위해 상원 동의를 받아냈다.

제퍼슨 대통령과 매디슨(James Madison) 국무장관은 상원의 임명동의까지 받은 이들 42명 중에서 12명에게만 치안판사 임명장을 수여했다. 자신이 열렬한 연방주의자이기 때문에 판사임명이 거부되었다고 믿은 마버리는 국무장관 매디슨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는 판사직에 취임하기 위해 이 소송에서 “직무집행영장(writ of mandamus)”을 청구했다. 이 영장은 영미법계의 독특한 제도로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담당업무를 수행하지 않고 있는 경우에 업무의 수행을 강제할 수 있는 법원 명령서이다.

연방주의자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만들어진 ‘1789년 재판소법’에 따르면, 직무집행영장은 하급법원을 거칠 필요 없이 연방대법원에 바로 청구할 수 있다. 마버리는 이 법률에 근거하여 연방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에 연방대법원장은 자신과 같은 연방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전임 국무장관으로서 자신에게 판사 임명장을 수여하려고 했던 마샬이었기에 마버리는 승소를 확신했다.

하지만 사건을 맡은 마샬은 곤경에 처했다. 자신의 정치적 동지인 마버리의 편을 들어 직무집행영장을 발부한다면 제퍼슨 정부가 영장집행에 협조할 것 같지가 않았다. 이 경우에 마버리는 판사가 못 되고 가뜩이나 힘이 없는 연방대법원의 위신은 더욱 추락할 것이 명약관화했다. 법적 절차에 하자가 없는 임명장의 수여를 거부하는 새 정권에 대해 직무집행영장 발부를 거절해도 마찬가지였다. 언론과 정적들은 마샬이 새 정권의 눈치를 본다고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마샬은 모든 이들의 허를 찌른 판결을 내린다.

그는 마버리에게 패소 판결을 내리면서 기발한 논리를 전개했다. 마버리는 임명장을 수여받을 정당한 권리를 침해받았기 때문에 법원에 구제를 요청할 수 있다. 하지만 연방대법원에 요청한 것은 잘못이다. 그 근거는 1789년의 재판소법이 연방대법원의 권한을 명시한 연방헌법의 조항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마샬은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여부를 최종적으로 판단할 권한은 연방대법원에 있다고 선언하면서, 위헌법률에 근거한 마버리의 청구를 거부했다. 마샬은 자파의 정치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연방대법원으로 대표되는 사법부의 위상을 강화하고 연방주의자의 철학이 공고화될 수 있는 터전을 이 판결을 통해 마련했다.

미국 연방대법원 건물 중앙 홀에는 역대 대법원장들의 흉상이 양측 벽면에 진열되어 있다. 그런데 마샬만은 홀 정면에 전신 동상으로 장엄하게 서 있다. 초대 대법원장이 누군지 모르는 대부분 미국인들도 마샬을 “위대한 대법원장(Great Chief Justice)”로 칭송한다. 한편, 성공한 은행가로서 법관의 영예를 넘보았던 마버리의 멋진 초상화도 대법관 전용 식당에 걸려 있다. 그는 비록 판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름은 그 어떤 판사보다도 후세에 길이 남았고, 법관이 아닌 사람으로서 유일하게 연방대법원 벽에 자신의 초상화를 걸었다.




편집 ㅣ 성균웹진 황경주 기자 (icarus7@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