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합방(合邦)’이라니?

  • 204호
  • 기사입력 2010.05.16
  • 취재 조재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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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성재호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1910년 병합조약의 체결과정은 치밀하게 준비된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04년 한일협약으로 고문정치를 실시함으로써, 명분상 대한제국의 내정에 발을 들여놓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을사보호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한 대한제국에 대해 통감부를 설치하여 외교권의 박탈에 그치지 않고, 대한제국의 내부적 사안에 깊숙이 간섭하는 형국 으로 진행하였다. 1907년에는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실질적 국무를 장악하는 기반을 구축하고 한국군을 해산하는 등 실질적 식민 지배를 행사하였 다.

1909년에는 기유각서를 통해 사법권과 감옥사무를 박탈하고, 이어 1910년 8월 소위 합방조약을 강제하였다. 이와 같이 1904년 이후 단계적으로 대한제국의 국권을 잠식하여 일제의 실질적 지 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일본 정부가 '일한병합에 관한 건'을 각의에서 결정한 것은 1910년의 병합조약 체결에 1년여 앞서는 1909년 7월 6일이었던 것을 보더라도 대한제국에 대한 강제력 의 행사 및 여타 불법성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제반 상황은 대한제국과 일본이 상호 평등한 상황에서 합의에 의해 조약을 체결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강제에 의한 병합상황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강박에 의한 속국화는 명백한 것 인데, 일본은 소위 일한병합조약에 의해 당사국간 합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를 기초로 일본은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하여 '1910년 병합으로 인한 일본영토설' 주장을 꺽지 않고 있다. 더욱이 1910년 조약체결 전후의 상황에서 우리 민족이 개간 개척한 간도 지역의 영유권을 중국에 넘겨주는 비법적 상황이 있었음도 잊어서는 아니된다. 이러한 점에서 1910년 (강제) 병합조약의 모순과 법적 한계를 명백히 이해하는 것은 단순히 일본의 책임 문제에 대한 법리를 구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현재에도 계속 문제되고 있는 독도 영유권 문제나, 향후 논의되어야 할 간도 영유권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중요한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특히나 합방(合邦)이라는 용어는 둘 이상의 국가가 상호 합의에 의해 한 나라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 스스로 한일합방이라고 칭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한입병합조약을 체결하였던 당시의 상황은 국제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다. 통감 데라우치(寺內)가 이완용과 송병준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였고, 어전회의에서 학부대신 이용직의 논쟁 을 방해로 생각하여 일본 수해에 대한 특사로 파견하여 대한제국 정부 내의 반대파 모두를 제거하였다. 특히 8월 22일 조약이 강제 당하던 당일 윤덕영이 어새를 청하면서 행한 언행은 조약체 결의 비준권자인 황제의 자유의사가 아닌 것을 방증하는 사안이다.

한국통사(韓國痛史)에 따르면, 윤덕영이 어새를 청할 제 "황후의 止哭(지곡)을 간청 왈, 如此(여차)히 하면 멸족의 화를 당한다고 위협으로 어새를 날하여 완용에게 授(수)하니 此功(차공)에 의 하야 일본정부에서 덕영에게 자작으로 봉하고 四十滿圓(사십만원)을 賞賜(상사)하니라"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 부분은 비준권자의 자유의사가 아닌 강박에 의한 조약체결 또는 형식적 요건의 하자를 보여주는 것임이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병합 당일인 8월 22일은 15間 간격으로 헌병이 순회하면서 한국인은 2인만 모여 있어도 심문하는 강압적 분위기였으며, 山邊健太郞의 '日韓倂 合小史'에는 明石元二郞을 빌려 "기병연대를 용산에 이동시키는 것은 병합을 위해 위력의 필요를 예상케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적혀 있다. 이 또한 국가 전체에 대한 강박을 의미하는 것으 로 국제법상 조약체결의 무효사유가 된다.

다만, 당시의 국제법상 그와 같은 강박 또는 사기 등의 요인이 조약의 무효사유로 확정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 이유는 Oppenheim 등 당시 제국주의 국가의 국제법학자가 당시 의 국제법은 강박에 의한 조약도 유효라는 입장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Verdross 등의 순수법학자들은 조약이 ‘국가간의 합의’라면 그 합의는 자유로운 의사의 합치일 것이 요구되는 것이므로, 강박이 작용한 의사의 강제는 해당 합의가 효력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은 당시의 국제법 학자들의 견해가 한가지로 모아져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으로 일본 측 주장으로 원용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나라가 원용할 수 있는 상반되는 견해가 병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과제는 강박에 의한 조약의 무효를 주장 하는 논거를 보다 많이 발굴 입증하는 것이다. 나아가 1910년 병합조약 체결 즈음에 일본이 영국 외무성에 병합조약의 효력을 문의하는 외교자료가 있는데, 이는 일본 스스로 병합조약의 체결 이 강박에 의한 것이어서 유효라고 자신있게 주장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성격의 외교사료 발굴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오늘, 2010년 5월 10일 다수의 한일 양국 학자들이 모여 강제에 의해 체결된 일한병합조약은 무효라는 선언을 행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에서나마 우리 스스로 합방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 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역사의식, 민족의식을 떠나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 올해는 경술국치를 당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다시는 이런 일을 되풀이 겪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책임임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편집 ㅣ 성균웹진 조재헌 기자 (jjh954@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