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변호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 295호
  • 기사입력 2014.02.28
  • 편집 이수경 기자

영화 변호인(The Attorney,2013 양우석 감독 작품)
―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사'와 '변호인

◈ 왜, 영화를 보는가?
'부림사건'을 다룬 영화 〈변호인〉이 극장에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을 무렵, 현실에서 부림사건이 33년 만에 재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져 그 거짓의 막을 걷어 올렸다. 그래도 영화 〈변호인〉을 두고 말들이 많다. 관객 수천만을 넘긴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관람객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영화관을 찾은 것이 아니었고, 같은 감동으로 영화관을 나선 것은 더더욱 아니었던 것 같다. 이념과 세계관의 차이가 영화를 각기 다른 시선으로 보게 만든 탓이리라.
나는 이 영화를 어떤 시선으로 보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나는 왜, 영화를 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신한다. 내가 영화에서 보는 것은 '변화(변신)'이다. 주인공이 이루어 낸 극적인 변화를 간접 체험하고, 내 자신이 그러한 변화를 남몰래 꿈꿀 때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가지기 때문이다. 영화 〈변호인〉에서도 나는 '변호사' 송우석이 '변호인' 송우석으로 바뀌는 변화를 보았다.


[부림사건은 전두환, 노태우의 신군부 정권 초기인 1981년 9월 공안 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기소한 사건이다. 당시 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변론을 맡았던 노무현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됐다. 사진은 33년 만에 사건 재심(국보법 위반) 무죄 판결을 받은 당사자들이 봉하마을을 찾아 참배하는 모습.]

◈ 변호사와 변호인
'변호인'과 '변호사'가 다르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변호사는 사법 시험이나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국가로부터 법률 전문가의 자격을 부여받은 자를 말한다. 하지만 특정 형사 사건에서 피의자나 피고인을 변호하는 역할을 맡게 되는 변호사는 '변호인'으로 불린다. 변호사가 직업이나 직종의 명칭에 불과한 반면, 변호인은 국가 공권력의 남용과 오용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마련된 헌법적·법률적 제도 그 자체이다.

때문에 변호인은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익의 대표자로서 법원과 검찰을 통제하는 사법기관으로서의 지위도 가진다. 즉, 변호인이란 사적인 차원에서 단순한 전문직에 종사하는 직업인이 아니라, 공적인 차원에서 '자유의 후견인'이자 '인권과 정의의 수호자'이다. 형사소송법 교과서에서 형사소송법의 역사를 '변호인의 변호권 확대의 역사'라고 적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에서 부동산 등기 업무나 세무 관련 법률 사무를 취급하며 떼돈을 벌 때의 송우석은 일개 변호사에 불과했지만, 부림사건으로 국가 권력의 고문과 왜곡에 맞서 진우를 변호할 때의 송우석은 비로소 '변호인'로 거듭난 것이었다.

◈ 변호사, 변호인 그리고 돈
자유, 인권, 정의와 같은 가치가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변호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대가로 수임료라는 것을 받는다. 변호인도 변호사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형사 사건에서 변호인을 선임할 만한 재력이 없거나 일정한 요건에 해당하는 피고인의 경우에 국가가 대신 선임해 주는 국선 변호인조차도 무료로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국선 변호인도 변호사이기 때문이다(참고로, 형사 소송과는 달리 민사 소송에서는 국선 변호인 제도가 없다).

국가는 시민들이 낸 세금으로 채워진 국고에서 국선 변호인에게 그 대가를 지급한다. 여기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자유와 인권을 침해할 경향성을 가진 국가 권력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등장한 변호인이 다시 그 국가로부터 '비용'을 받는 것이다. 때문에 경제적인 차원에서 곰곰이 따져 보면, 이 모든 제도화된 연결 고리 속에서 유일하게 주머니를 챙기는 최고의 수혜자는 '변호사'이다. 그리고 직업인으로서의 변호사는 물론이고, 형사 사건의 변호인, 더 나아가 국선 변호인까지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바로 '돈'인 것이다.


[ 변호인으로 거듭나기 전 '변호사' 송우석은 떼돈을 벌기 위해 자신을 판다.]

◈ 변호사법 제1조와 법률 지식 시장의 독점
우리나라 변호사법 제1조에서는, 변호사는 기본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 조항은 종이 위의 법일 뿐,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의뢰인은 변호사를 돈으로 '사고', 변호사는 돈을 받고 기본 인권과 사회 정의를 '판다.' 이렇게 변호사가 돈벌이와 밀접해 있는 풍조는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러나 본디 로마시대에는 변호하는 일이 시민의 고귀한 일을 다루는 것이어서, 그 위임 계약이 '무상'인 것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저 고귀한 가치를 행동의 동력으로 삼던 변호사가 오늘날에 와서 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게 돼버린 사실은, 자본과 제도의 복잡한 메커니즘과 그 변천을 통해 설명해야 할 어려운 주제가 돼버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 법률 지식 시장에서 형성되는 시장 가격은 수요와 공급 곡선의 교차점에서 형성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법률 지식을 가지고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오직 변호사에게만 독점적으로 부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러한 독점적 지위는 형벌이라는 수단을 통해 보호받고 있다. 법은 이렇게 말한다. "변호사 아닌 자가 '변호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업무'를 통하여 보수나 그 밖의 이익을 분배받거나, 변호사가 아니면서 대가를 받고 대리, 중재, 화해나 법률 상담 또는 법률 관계 문서를 작성하거나 법률 사무를 취급하는 행위를 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변호사법 제109조 제1호 제2호)." 뿐만 아니라 그러한 뜻을 표시하거나 서면에 기재하기만 해도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변호사법 제112조 제3호). 이건 너무 심하다.

◈ 국가 형벌이 보호하는 직업적 이익
의사 자격이 없는 자가 의료 행위를 하거나 운전면허가 없는 자가 운전 행위를 함으로써 형사 처벌을 받는 것과 무자격자가 법률 사무를 취급하는 행위에 대해 형사 처벌을 하는 것은 서로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차원의 일이다.
무자격자의 의료 행위나 운전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환자의 신체와 생명에 대한 위험을 방지하거나 도로 교통상의 안전을 확보하려는 취지임이 명확하다. 때문에 무면허 의료 행위는 무상으로 하더라도 처벌되고, 무면허 운전도 유료 영업 행위를 하였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처벌된다. 하지만 법률 상담이나 법률 문서의 작성과 같은 법률 사무의 취급은 무자격자가 하더라도 의뢰인에게 생명과 신체의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더구나 법적인 최종 판단은 일개 변호사가 아니라 국가 기관인 법원이 해주는 것 아닌가. 만약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면, 변호사보단 판사에게 더 주어야 맞다.

한 가지 더 이해할 수 없는 점은 무자격자가 대가를 받지 않고 무료로 법률 사무를 취급해 준다면, 이건 또 처벌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점이다. 무자격자가 해서 큰일이라도 생긴다면, 돈을 받건 받지 않건 무조건 못하도록 금지해야 할 텐데 말이다. 도무지 일관성을 찾기 어렵고, 어떤 취지로 만들어진 처벌 조항인지 이해하기도 어렵다. 형벌을 통해 변호사의 돈벌이 '영역'을 확보하려는 의도된 계산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변호사 인원도 국가가 통제를 해서 아무나 그들의 밥벌이에 뛰어들지 못하게 해준다. 변호사 돈벌이의 최대 보장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법률 지식의 독점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불행하게도 이렇게 형벌까지 동원해서 지켜지는 변호사의 독점 영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넓으며, 인구 대비 변호사 숫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적은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이다.

◈ 빵을 위한 학문
우리나라가 속해 있는 대륙법계 국가인 독일에서도 이미 19세기부터 법학Rechtswissenschaft을 '빵을 위한 학문Brotwissenschaft'이라고 불렀다. 법학이 빵을 위한 학문이라는 것은 법에 관한 지식이 밥벌이를 위한 수단적 학문이라는 것으로, 이는 만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1970~80년대만 하더라도 명목상으로라도 감히 돈벌이를 위해 법을 공부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 힘없고 약한 자들을 돕기 위해 법대를 간다고들 말했다. 하지만 법대생의 3퍼센트만이 변호사 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사법 시험의 시대가 지나가고, 입학생의 75퍼센트에게 변호사 자격을 주는 변호사 시험 제도가 개시되자 그 점잖 빼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다.

이제 '돈'은 노골적으로 로스쿨 입학 동기에서부터 등장한다. 여러 전공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인재들이 더 나은 돈벌이를 위해 불나방처럼 날아든다. '경제학'도 '철학'도 내팽개치고, '유전공학'도 '물리학'도 버리고 로스쿨로 몰려온다. 이래서 로스쿨이 '돈스쿨'로 불리는지도 모른다. 돈은 많이 들지만, 돈 많은 집안의 학생이,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잘 벌기 위해 오는 스쿨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돈을 잘 버는 변호사 개인의 미래는 밝아질지 모르지만, '돈사법'이 만들어 내는 사회의 미래는 필경 어둡다.

◈ 금권 사법의 가속화와 변호사
로스쿨 입학생들은 대체로 고액의 연봉을 보장해 주는 대형 로펌에 취업하거나 대기업의 사내 변호사를 꿈꾼다. 장차 이들은 대기업과 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법률 지식을 활용하여 일하고, 그 대가로 차곡차곡 부를 쌓다가, 전문 경력을 사다리로 삼고 '법조 일원화'에 편승하여 판사와 검사로 다시 발탁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과거 판검사 경력을 거친 변호사가 누렸던 '전관 예우'의 폐해는 '친정 예우'라는 형식으로 그 옷만 바꿔 입게 될 것이 뻔하다. 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으면서 핏속에 녹아 들어가 있는 기업의 경영 논리를 법률 논리로 정교하게 포장하는 역할을 기꺼이 자임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전 시절엔 정치 권력의 폭압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법률이 사용되었다면, 장차는 법률이 경제 권력의 횡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도구화되어, 다시 한 번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금권 사법'의 시대의 불문율로 여전히 그 위력을 떨칠 지 모른다.

◈ 사법의 스포츠화와 정의의 후퇴
많은 이들은 '사법의 스포츠화'라는 말에서 공정한 룰에 따라 시합을 이끌어가는 심판자로서의 판사를 연상한다. 나도 학창 시절에 그렇게 배웠다. 하지만 사법의 스포츠화라는 말에는 그렇게 낙관적인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에서 승리를 견인하는 요인은 무엇인가? 능력과 실력이다. 하지만 사법에서는 능력과 실력이 아니라 '정의'의 힘으로 승리해야 한다. 오늘날 사법에서 비싼 변호사를 살 수 있는 재력이 능력이자 실력이 되고 있다면, 사법의 스포츠화라는 말은 사법에서 곧 돈이 승리한다는 뜻이 되고 만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게다가 스포츠는 승리를 목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력 있는 선수를 비싼 돈으로 영입한다. 외국의 선수라도 상관없다. 감독은 선수에게 승리만을 주문한다. 마찬가지 의뢰인도 승리를 위해 유능한 변호사를 사야 한다. 돈 많은 의뢰인은 실력 있는 변호사를 돈 아래 예속시키면서 승리만을 주문한다. 스포츠 선수가 이기기 위해 합법적인 반칙을 하듯, 변호사는 승소하기 위해 합법이란 미명하의 것을 정의와 맞바꾼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런 변호사에 관한 농담 중에 변호사와 정자의 공통점을 언급하는 말이 있다. "인간이 될 확률, 일억 분의 일."

◈ 인스턴트 법률 지식과 급조된 변호사
우리나라의 법률 시스템, 법학 교육 제도 그리고 변호사법 등등은 '맘몬(돈의 신)'을 숭배하는 변호사를 양산하는 데 세계에서 제일가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런 환경은 인권 옹호와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변호사를 배출하는 일에 취약하기 마련이다. 돈을 최고의 가치 위계에 두는 변호사는 법률 전문 영역에서는 그 능력을 보여줄지 몰라도,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 차원에서는 낙제점이다. 그들은 머리는 뜨겁지만 가슴은 차갑고, 심장은 뛰지 않는다.

작금 로스쿨에서 이러한 변호사들이 급조되고 있다. 마치 전자레인지에 데워지는 음식과 같이 겉은 뜨겁고 속은 찬 법조인이 배출되고 있다. 단축된 수업 연한으로 제대로 된 기초 지식과 비판 의식을 키우지 못하고, 발효된 판례만을 암기한 변호사들이 양산되고 있다. 마치 맥도날드 햄버거와 같이 체질을 악화시키는 맥로McLaw로 영양분을 섭취한 법률 전문가들이 실무에 투입되고 있다. 이런 변호사들이 많아지는 국가는 곧 건강을 잃게 된다.

또한 요즘은 의뢰인의 이익 대표자로서 변호사의 지위만 지나치게 강조되고, 공익의 대변자이자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로서 변호인의 고귀한 임무는 언제나 뒷전이며 남의 일이 돼버렸다. 더구나 갈수록 국가 권력의 배후가 경제 권력에 장악당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변호사가 그러한 경제 권력에 휘둘리게 될 때, 그 국가 역시 미래가 없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현대 사회가 복잡해져 감에 따라 그 복잡성을 감축시키는 법률은 필연적인 결과이므로, 사회 전반에 걸쳐진 법화legalization의 확산은 현실적으로 막을 길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체제를 유지하고 안정화를 지향하는 '법의 의지'와 돈을 향한 '변호사의 의지'가 서로 통모하여 결탁하게 되면, 우리 모두는 금권 사법의 횡포에 시달리는 가련한 신민으로 전락하고 만다. 국민 배우, 국민 가수, 국민 선수는 있어도 국민 변호사는 나올 리가 없는 까닭이다.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으며 전국구 변호사 데뷔를 코앞에 둔 송변. 하지만 우연히 7년 전 밥값 신세를 지며 정을 쌓은 국밥집 아들 진우가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국밥집 아줌마 순애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구치소 면회만이라도 도와주겠다고 나선 송변.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진우의 믿지 못할 모습에 충격을 받은 송변은 모두가 회피하기 바빴던 사건의 변호를 맡기로 결심한다. "제가 하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더." 변호사 송우석은 그렇게 '변호인'이 된다.]

◈ 변호사를 넘어 변호인으로
천만 관객의 영화 〈변호인〉의 줄거리를 여기서 다시 요약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변호사' 송우석도 돈벌이 국가 공인 면허를 받은 후, 법률 지식을 이용해서 떼'돈'을 번다. 하지만 그는 일억 분의 일의 확률을 뚫고 '변호인' 송우석으로 변신한다. 마치 사울이 바울로 바뀌듯 그의 가치 지향이 돈에서 '정의'로 옮겨 간다. 한때 속물 변호사였던 그가 평생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대기업의 손짓에도 흔들리지 않고, 부림사건의 법정에 선다. 그곳에서 변호사 송우석은 자유와 인권이라는 가치 지향성을 가진 변호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의 변신은 일회적 사건에 그치지도 않았고, 단지 개인만의 변화에 머물지도 않았다. 이후의 다른 사건에서도 그는 힘없는 노동자들 변호하였고, 국가 권력의 오남용에 맞섰다. 그리고 그를 조롱하고 시기했던 지역의 동료 변호사들의 마음까지 움직여, 그가 피고인으로 법정에 섰을 때 다른 모든 변호사들까지 '변호인'으로 변화시켰다. 그 변화의 물결이 영화 〈변호인〉을 본 천만 관객들에게까지 차고 넘치는 상상을 해 본다.

◈ 그렇다면 변호사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나부터 변해야 한다. 그래서 법학이 '밥'학이 되어서 안 된다고 더 강하게 말해야 한다. 로스쿨의 법학도들로부터 내가 가진 법률 지식을 매개로 하여 송우석과 같은 변호인이 한 명이라도 더 만들어지는 데 영향을 미쳐야 한다. '한 명'의 변호인이 아니라면, '한 사건'에서라도 진정한 변호인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영감을 줘야 한다. 미국 작가 하퍼 리Harper Lee가 쓴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1960)를 통해 수십 년간 미국 변호사들의 영웅이 되어온 주인공 애티커스 핀치가 어린 딸에게 말한다. "스콧, 변호사는 직업의 특성상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최소한 한 번은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사건'을 만난단다. 이 사건이 바로 나의 사건임이 느껴져!"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이 만난 사건도 그런 사건이었다. 한 명의 변호인, 한 개의 사건이 세상을 바꾼다. 과거 이미 한 개의 사건을 만났던 변호인들을 기리며, 장차 또 하나의 사건을 만날 우리의 변호인들을 대망한다.


[ 하퍼 리가 쓴 『앵무새 죽이기』 원작의 영화 〈알라바마 이야기〉(1962, 로버트 멀리건 감독)의 스틸 커트.]
영화는 경제 공황기에 존경받는 변호사 핀치가 백인 여성을 폭행한 혐의를 받는 흑인 남성 로빈슨을 변호하면서, 핀치의 가족과 동네에서 벌어지는 일을 핀치의 어린 딸 스콧의 시각에서 그리고 있다.

김성돈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형법 전공)를 받았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수학했다. 경북대학교 법학부를 거쳐, 현재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법과 다른 세계와의 만남에 관심이 많아, 몇 해 전 『로스쿨의 영화들-시네마 노트에 쓴 법 이야기』이란 책을 통해 법과 예술, 현실과 꿈, 제도와 이상 사이의 애증 관계를 논했으며, 진화생물학자 프란츠 부케티츠의 『도덕의 두 얼굴』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도덕의 이중성'을 목도하고 경고했다. '사람의 성장 못지않게 법의 진화도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는, 대중간의 행복한 소통을 법학자로서의 화두로 삼고, 우리 사회의 모순된 법률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