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노예 제도 유지의 공범자다

우리 모두는 노예 제도 유지의 공범자다

  • 299호
  • 기사입력 2014.04.24
  • 편집 이수경 기자

[영화 〈노예 12년〉(12 Years a Slave, 2013), 스티브 맥퀸 감독 작품]

글 : 김성돈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추하기

과거와 미래를 척도로 삼아 볼 때, 모든 영화는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 하나는 과거를 붙들게 하는 영화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를 버리고 미래로 향하게 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양자의 중간 영역에 속하는 영화도 있다. 이미 극복됐다고 생각한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반추하게 하는 영화이다. ​
〈노예 12년〉이 바로 그런 영화이다. 영화는 이미 역사의 창고 속으로 들어간 노예 제도라는 원시 기계의 먼지를 털어 내어 다시 가동시킨다. 스크린을 향해 뿜어지는 영사기의 빛줄기 속에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네 의식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 켜켜이 쌓여 있던, 해묵은 먼지들이 춤추며 일어선다. 이제 그 먼지들에 뒤덮여 있던 노예 제도의 실체를 들여다보자.

▒ 과거―돌이켜보기
〈노예 12년〉은 흑인 '솔로몬 노섭'의 노예 체험담을 영화한 것이다. 당시 미국의 다른 주에서는 흑인의 자유가 인정되었으나 남부의 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자 재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솔로몬 노섭이 돈을 더 벌게 해주겠다는 자들의 유혹에 속아 따라갔다가 노예상에 의해 남부로 팔려간다. 그는 '플랫'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의 노예 상태를 거친 후에야 겨우 자유를 회복하게 된다. ​

영화는 결말을 제외하고서 내세울 만한 극적인 요소가 아무것도 없지만, 놀라울 정도의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두 시간 동안 당시 노예 제도가 인정되었던 미국의 남부 시절을 살게 한다. 또한 솔로몬의 시선을 통해 노예 된 자와 노예를 부리는 자의 의식과 생각 그리고 그들의 행동을 추체험(追體驗)하게 한다. 내가 노예로 태어났으면 저렇겠지, 내가 노예라는 인간 자산을 '소유'한 자였으면 저렇겠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

하지만 영화의 힘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놀랍게도 〈노예 12년〉은 이미 역사의 화석이 되었다고 믿었던 노예 제도가 단지 스크린에 비춰질 뿐인 영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 온존하고 있는 실제임을 통찰하게 해준다. 그래서 1948년 12월 국제연합총회에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 제4조가 '지금 여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규범력 있는 법문임을 알게 한다.

[영화 속에서 이른바 노예주들의 언어로, 자주 들리는 단어가 있다. '나의 재산․나의 소유물my property.' 그들은 자신의 '소유 권한'을 들어 인간의 '자유'를 합법적으로 구속한다. 그들에게 인간이란 소유-거래-처분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어찌 보면, 자유의 반대말은 억압이 아니라 소유가 된다.]


▒ 현재―끝나지 않은 과거
"어느 누구도 노예나 예속 상태에 놓이지 아니한다. 모든 형태의 노예 제도 및 노예 매매는 금지된다."는 「세계인권선언」 제4조가 만들어진 이후, 오늘날 이른바 문명국가에서 법제도로서의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나라는 없다. 하지만 노예 상태를 '인격으로서의 권리와 자유 없이, 강제·무상으로 노동하며 또 상품으로 매매·양도의 대상이 되는 상태'라고 한다면, 오늘날 노예 상태에 있는 자는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

전 세계적으로 예속 상태에서 경제적 착취를 당하는 자들의 숫자는 나날이 증가하고 있고,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노예 생활에 처해 있다. 굳이 아프리카 오지나 2022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 신축 공사 현장이나 우리나라 서해안 염전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다. 2012년 결성된 인권 단체 워크프리재단WFF에 의해 공개된 2013년 세계노예지수에 따르면, 2013년 10월 현재 162개국의 2천9백만 명이 감금, 강제 노동, 아동 노동, 소년병, 인신매매 등으로 억압받는 현대판 노예라고 한다.

[2012년 6월 18일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건설 노동자들이 점심 시간에 공사장 한켠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22년 월드컵이 열리는 도하의 대규모 시설 공사 현장에는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투입되는데 노동 조건이 열악해 국제적 논란이 일고 있다. 4년 새 인도 노동자만 1,000명이 사망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 현대판 노예―둘러보기
어디 이뿐인가.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현대적 의미에서 변종 노예들은 도처에 있다. 예컨대 소비 대상으로 상품화되기 위해 어릴 적부터 합숙 훈련을 하는 걸그룹들은 현대판 '글레디에이틴(gladiator+teenager)'들이다. 새벽부터 회사나 공장으로 출근하는 우리 모두도 따지고 보면 조선시대 외거노비와 다를 바 없다(혹자는 자가용을 타고 출근하는 회사원을 가마타고 입궐하는 것에 비교하기도 한다지만). 조선시대의 솔거노비는 주인집에서 먹고 자고 했지만, 지금은 기숙사에서 먹고 잔다는 차이뿐이다. 

​ 이러한 노예의 신분적 지위는 대대로 물려질 정도로 고착화되어 가고 있다. 실질적으로 보면, 자본에 팔려 대가를 받고 노무를 제공하는 우리는 대부분 노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싼 값으로 팔리기 위해 유치원 때부터 온갖 스펙으로 단장하는 우리의 현실도 결국은 노예의 삶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자유 제한의 수단이 쇠사슬이 아니라 돈이 되었을 뿐, 벗어나려는 행동의 대가가 등짝에 내리쳐지는 채찍질이 아니라 경쟁에서 뒤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되었을 뿐,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그리고 무엇인가에 노예가 되어 있다. 

​ 이와 같은 현대판 노예들의 노예 됨은 진짜 노예의 삶과 하등 차이가 없다. 뿐인가. 노예들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어디론가 팔려가는 상품성이나 유지할 수는 있겠지만, 현대판 노예들이야말로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즉각 폐기 처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정작 현대판 노예들은 자신이 노예의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 노예 제도를 살아 있게 하는 원동력
〈노예 12년〉은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변종 형태의 노예를 양산하고 있는 이 제도의 근원적 배경을 캐묻는다. 영화는 그것이 노예 제도를 유지함으로써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에 있다고 본다. 그렇다. 노예를 팔아넘기는 노예상들도 돈벌이 때문에 그렇고, 대가를 치르고 그들로부터 노예를 자신의 지배 하로 이전시켜 자신의 소유물로 삼아 부리는 자들도 경제적 이익 때문에 그렇다. 재력이 못미처 직접 노예를 직접 소유할 수는 없지만, 노예들을 관리 감독하는 이들도 결국은 생계유지가 주된 동기이다. 
​ 돈을 벌기 위해 타인을 노예 상태로 만들며 상품화하는 자들,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그 안위를 더 노골화하기 위해 타인을 예속 상태에 두고 착취하는 자들 그리고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이들을 돕는 자들이 있는 한, 노예 제도는 사라질 수 없다. 이렇게 보면, 결국 노예 제도는 자본주의, 아니 '이기심'을 가진 인간들을 구성원으로 둔 사회와 운명 공동체인지도 모른다.   

▒ 노예 제도와 노예근성
〈노예 12년〉은 노예 된 자들의 행동과 의식도 노예 제도의 불멸성에 일정 부분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솔로몬이 자유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하는 '저항형' 노예라면, 주변의 대다수 노예들은 현재 상태에 길들여진 '순응형' 노예라고 할 수 있다. 
​ 이들은 바로 자기 앞에서 다른 노예가 린치당하고 고통의 비명을 질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자기 일만 한다. 노예로 태어난 어린 아이들은 이러한 태도의 극단을 보여준다. 솔로몬이 반항의 대가로 밧줄로 목이 묶인 채 나무에 매달린 곳 바로 옆에서 태연하게 놀고 있는 노예 아이들의 모습에선 어떤 심적인 평화마저 깃든 듯하다. 주인의 사랑을 조금 더 받아 거만한 자세를 보이는 노예도 이러한 유형에 들기는 마찬가지이다. 

​ 이와 같이 순응형 노예의 예속과 굴종적 특성은 그를 부리는 주인이 가지고 있는 이기심과 권력욕과 함께 인간의 본성 일반에 내재된 '양면성'에 부합한다. 예속과 굴종적 특성을 보다 많이 보여주는 자들의 특성을 이용하여 그들 위에 군림하여 착취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모두 노예이기도 하고 또한 노예를 부리는 자이기도 하다는 정리는 지나친 주장이 될까. 과거 노예였던 조상들로부터 유전된 굴복의 속성을 버리지 못한 우리를 지배하여 착취를 일삼는 주인들의 만행은 끝내 사리질 수 없는 것일까. '노예근성'을 혐오 대상 제1호로 지목하면서 이를 타파하려 했던 마르크스는 헛된 꿈을 꾼 것에 불과한 것일까.


[ 노예는 노예로 살기 바쁘다. 자기 앞에서 다른 노예가 린치당하고 고통의 비명을 질러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자기 일만 한다. 순응과 굴종의 노예근성은 이기심과 권력욕이란 또 하나의 인간 본성을 만나 처참한 체제를 작동시킨다. 그 체제는 겉보기에 평화롭고 고요하다]

▒ 속이는 법
법제도상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고는 한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우리네 법도 노예 제도와 아직도 완전히 결별하지는 않은 것 같다. 헌법부터가 그렇다. 대한민국 헌법 제12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 강제 노역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법률만 있으면 강제 노역이 가능한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제 노역'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제헌 헌법 이래 아직 한 번도 문제 제기된 적이 없었고, 헌법 교과서에도 단 한마디 언급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약 강제 노역을 허용하는 법률 규정이 있다면, 그것은 곧 국가 공인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 꼴이 된다는 점이다. 물론 법전을 아무리 뒤져도 명시적으로 강제 노역을 허용하는 법률을 찾기는 어렵다. 형벌의 일종으로 노동형이 인정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이른바 '징역형懲役刑'이라는 것도 용어만 놓고 볼 때 강제 노역을 인정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와는 거리가 멀다. 징역형은 사실상 자유 박탈형을 내용으로 하는 구금형이고, 구금 기간 중에 교정의 일환으로 작업을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자발적 청원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황제 노역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노역장 유치'(형법 제70조)도 강제 노역이 아니다. 노역장 유치는 벌금을 납부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한 대체형 혹은 환형 처분으로서, 벌금 납부를 강제하기 위한 수단에 그친다. 즉, 노역장 유치 일수에 따라 납부해야 할 벌금 액수가 삭감되는 것일 뿐, 노역을 하지 않고 구금되어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 실제로 수형자의 70퍼센트 이상이 유치 기간 동안 아무런 노역도 하지 않았다. 사회봉사 명령도 재再사회화를 위한 특별 예방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형벌 대신 또는 형 집행을 유예하기 위한 조건으로 부과되는 근로 서비스이지 강제 노역이 아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강제 노역을 허용한 법령이 있긴 있었다. 이른바 '형제복지원' 사건을 조장한 내무부령 제410호가 거기에 해당한다. 1975년에 만들어진 이 법령은 그 적용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개념인 '부랑자'들을 보호한다는 미명 하에 시설에 수용하여 강제로 노역을 시킬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1987년 시설에 강제 수용된 900여 명의 사람들에게 감금, 성폭행 그리고 강제 노역이 이루어진 사실이 한 용기 있는 검사에 의해 수사되고 기소되어 그 일말의 진실이 드러났으나, 책임 있는 자에 대한 철저한 단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과거 형제복지원에서 450여 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실 등 그곳에서 자행된 인권 침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이 최근에 와서야 진행 중이다. 

​ 비록 내무부령 제410호는 법률이 아니라 '명령'이긴 하지만, 법률만 있으면 강제 노역을 인정할 수 있다고 선언한 '헌법의 정신에 반하는 헌법'에 따르더라도, 위헌적인 명령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노예 제도와 강제 노역을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유럽인권협약」 제4조를 본받아, 법률과 적법 절차에 의해 강제 노역을 인정하는 헌법 조항은 삭제되어 마땅하다. 언제 또 헌법상의 강제 노역을 빌미삼아 내무부령 제410호와 같이 거짓말하는 법령이 만들어질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 노예 제도와 야합한 사법 기관 등​
노예 제도를 금지하기 위해 형법이 인신매매죄와 감금죄를 두고 있지만, 인신매매범이나 타인을 불법 감금하여 강제 노역을 자행한 자들에 대해 국가 형벌권이 엄격하게 실현되지 못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노예 상태에 빠뜨리는 자들이 사법 기관의 소극적 태도 혹은 암묵적 묵인 하에 부를 축적하고 명예를 누린 경우가 비일비재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
예컨대 형법의 부녀매매죄의 적용과 관련하여, 대법원은 1987년까지 자의적으로 미성년자만 매매의 대상이 될 뿐 '성인'은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해석하다가, 일명 '봉고 인신매매단'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물의가 빚어진 1988년에 와서야 비로소 판례를 변경하여, 성인도 인신매매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판단했다. ​

뿐만 아니다. 대법원은 앞서 말한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안에서 문을 잠근 사실을 근거로 복지원장의 만행이 감금죄의 감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렸다. 게다가 착취를 통해 돈을 벌고, 정부 보조금을 갈취한 행위에 대해서도 솜방망이 처벌을 한 데 그쳤다. 최근 이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을 위해 국회 차원에서 특별법이 발의된 상태에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인간을 노예화한 인권 문제로 보지 않고, 단순히 복지 문제로 치부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 때문에 형제복지원 사건은 여전히 미결인 상태다. ​
국회는 외형상 자발성을 인정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동자를 사실상 노예 상태로 내모는 노동 관계법을 개선하는 일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는 주 40시간 근로를 기본으로 하면서, 노사가 합의하면 주당 최대 12시간까지 연장 근로를 허용하고, 주말의 휴일 근로까지 16시간에서 최대 68시간까지 가능하도록 하여, 열악한 임금 수준을 보충하기 위한 연장 근로와 휴일 근로를 피치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

이로 인해 우리나라 노동자의 연간 평균 근로 시간은 2,092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420시간을 초과하고 있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세계 최장 시간 수준의 노동에 혹사당하면서도 임금 격차는 극단적으로 높은 열악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상 법률이 노동자들의 착취 상태를 방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87년 촬영된 형제복지원 전경. 당시 부산지검 울산지청이 형제복지원의 불법 노역 수사를 벌이면서 인권 유린 실태가 세상에 알려졌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 지속되는 우리 현실의 '남부'
​〈노예 12년〉을 노예를 부리는 주인의 입장에서 감상할 자는 없을 것이다. 양심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사람의 인격권을 박탈하여 노예로 취급하는 일이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임을 확실하게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찰은 자유와 평등을 계몽주의 사상의 요체로 만들었다. 때문에 규범적으로 인간은 오로지 인격적 주체로서 물권법의 객체인 소유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고,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상이 인권 선언의 핵심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상 노예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유지되어 왔다. ​

노예 제도가 사실상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굴종과 예속을 당하고 싶어 하는 인간 본성의 톱니바퀴와 지배하고 군림하고 싶어 하는 인간 본성의 톱니바퀴가 경제적 이해관계(풍요와 곤궁)를 동력으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이러한 톱니바퀴에 끼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 어떤 형태로든 '노예의 삶'을 살고 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

또한 우리 대다수는 일상에서도 이기심과 지배욕에 사로잡힌 채, 한순간의 편리를 위해 이러한 톱니바퀴를 작동시키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노예를 부리는' 입장에 설 때가 많다. 이 가능성은 급부와 반대급부의 관계가 직접적이면 직접적일수록 커진다. 대리 운전을 이용할 때도 그렇고, 밤 12시 넘어 배달되는 음식물을 받아먹을 때도 그렇다. 유럽이나 북미에도 이렇게 편리한 제도가 없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우리의 치부이다. 이렇게 우리는 부끄러움도 접어둔 채, 노예 제도라는 원시 기계에 무임승차하여 미국의 치욕스러웠던 과거 남부의 영토로 꾸역꾸역 빨려 들어가고 있다.  


[노예 '플랫'에서 다시 연주자 '솔로몬 노섭'으로 돌아오게 되는 장면 사이, 주인공의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된다. 아직도 이 억울한 현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이젠 이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고 체념하는 듯, 한 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류의 역사가 무장 해제된 채로 관객을 직시한다. 그리고 힘없이 묻는다. "당신도, 공범자입니까?"]

▒ 노예 해방을 위한 선결 조건
물론 현대 사회가 중세 사회나 그 이전의 고대 사회처럼 전면적인 노예 사회는 아니다. 그러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마저도 노예 제도로 유지되었던 당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시대의 한계는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객관적인 법제도가 아니라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다. ​

19세기 후반까지 미국이 노예 제도를 둘러싸고 유지 지역과 폐지 지역으로 갈라져 있었듯이, 우리 의식 속에서도 경제적 이익과 편리함과 효율성으로 포장된 노예 유지론과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모든 생활 영역에서 실천하려는 노예 폐지론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이 틈바구니 속에서 노예 제도라는 원시 기계는 여전히 작동 중이다. 이 기계의 작동을 멈추고 폐기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노예근성을 버리고 자유를 위한 저항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 또한 스스로가 노예 된 자들의 해방 선언을 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철저한 평등주의적 사고와 상대방에 대하는 일이 내게도 마찬가지로 타당한지 생각해 보는 것, 즉 역지사지의 정신이다. 

〈노예 12년〉은 우리에게 말한다. "속지 말라, 법도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충고한다. "사람들을 노예 상태로 포획하기 위해 투망처럼 던져지고 있는 법의 그물망을 찾아내어 그것들을 과감하게 찢어버려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