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집으로 가는 길을 막는가? <br>영화 〈집으로 가는 길〉 Ⅲ

누가 집으로 가는 길을 막는가?
영화 〈집으로 가는 길〉 Ⅲ

  • 298호
  • 기사입력 2014.04.22
  • 편집 노현종 기자
  • 조회수 7637


글 : 김성돈 법학전문대학원교수


공무원을 위한 법만 강화되는가

 공무원들이 국민의 공무원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법안을 만들려는 시도도 있었다. 공무원의 부당한 민원 처리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무마시킬 방책으로 내놓은 일부 형법 개정안이 그것이다. 현행 형법에 따르면, 공무 집행 방해죄의 행위는 위계 또는 폭행이나 협박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행위에 포섭될 수 없는 단순한 불만 표출이나 강력한 항의 등의 민원을 처벌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공무 집행 방해죄의 구성 요건에 ‘위력’을 추가해 넣자는 법률 개정안이 나온 것이다.

 이 안은 국민의 봉사자인 공무원이 그 직무에 태만할 때, 신속하고 공정하게 업무를 처리해 달라는 국민의 요구를 오히려 범죄화하여,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발을 뒤로 묶겠다는 심산에서 나온 것이다. 귀찮고 성가신 행위로부터 자유롭고 싶다는 얄팍한 꼼수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4대 사회악 제거’라는 현수막으로 소리 소문 없이 대체되었지만, 그 이전엔 ‘주폭척결’을 다짐하는 경찰 공무원들의 맹세를 담아 놓은 현수막이 거리마다 동네마다 나부끼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술에 취해 파출소에서 소란을 피우고 귀찮게 하는 시민들을 ‘주폭’으로 규정하고, ‘척결’(뼈에서 살을 발라내듯 제거하기)해야 한다는 정책 역시 귀찮고 성가신 일로부터 벗어나려는 일부 경찰 공무원들의 잘못된 염원에 불과하다. 또한 정작 경찰이 해결해야만 하는 강력 범죄에 대한 예방 활동 등 본연의 업무를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법의 생리와 국가

 이를테면, 법은 그런 것이다. 법은 여전히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철도 파업에는 초강경 대응을 하는 경찰이 의사들의 집단 휴업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절대로 폭력적 대응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같은 논리이다. 용산 참사를 부른 집단행동도 가진 것 없는 자들이 일으키는 폭동으로만 취급한다. 사회적 지위가 낮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들이 아직 이렇다 할 만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지 못한 21세기 한국에서는, 19세기 말~20세기 초 구주 국가들이 무산자들의 물리적 반발에 대처했던 초강경 진압의 방식이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다. 당시 국가를 ‘지배 계급의 사무총국’ 또는 ‘부르주아의 일상사를 해결해 주는 위원회’라고 비꼰 마르크스의 언급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 대해서도 결코 과도한 말이 아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송정연이 고위 공직자를 아버지로 두었거나 국회의원의 딸이었더라도 그런 취급을 당했을까? 결단코 아니다.

암담한 미래―누가 공무원이 되는가

 국가 체제 안에서 공무원과 국민의 이런 역전된 관계는 점점 더 고착화될 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우려는 우리 사회에서 누가 어떤 이유에서 국가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지를 살펴볼 때, 확연해진다.

 공무원으로서의 직업을 선택하는 젊은이들 다수는 철밥통에만 관심이 있을 뿐, 공무원의 자부심과 그 사명에 대해서는 생각이 없다. 공무원이란 보수화되거나 일신의 출세만을 지향하게 될 때, 그만큼 지배 계급의 꼭두각시가 되기 안성맞춤인 지위다. 이에 살인과 같은 범죄가 아니라 사소한 시위 때문에 정부가 무너지는 것임을 아는 정치 권력의 권좌에서는, 예를 들어 경찰 고위직 공무원에게 범죄 예방이나 범죄자 검거보다 시위 진압이나 차단을 지상 과제로 명령한다. 그러고 나면 권력의 부나비들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경쟁에 너나할 것이 없이 뛰어든다.

 이자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내기도 어렵거니와, 경제 권력이나 자본 권력에 앞에선 더더욱 자신의 사명을 지켜 내기가 힘든 족속들이다. 이러한 처지에, 최근의 상황에서 보듯, 국민을 간첩으로 몰기 위해 증거까지 조작하는 국가정보원의 공무원들을 닮은 암담한 영혼들은 계속해서 양산될 수밖에 없다.

 이때 나라 망신이라는 비난의 화살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해 꽂히기 십상이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한국 대사관 사람들 참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엄중히 평가하는 프랑스 판사의 언급은 한국에 대한 준엄한 심판자의 말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우리 안의 타자―국민국가 넘어서기

 또한 〈집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집을 떠나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국민’ 송정연의 모습만을 봐서는 안 된다. 각자 고향을 떠나 한국 사회에서 살고 있는, 바로 ‘우리 안의 타자들’이 어떤 처우를 받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2012년 안전행정부의 외국인 주민 현황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주민의 수는 140만 9,577명으로 전체 국민 약36명 가운데 한 명 꼴에 해당한다. 최근 20여 년간 급증한 외국인 이주자들은 1994년 이래 ‘산업 연수생’, 2004년부터는 ‘고용 허가제’, 2007년부터는 ‘방문 취업제’ 등으로 그 명목을 바꾸어 가면서 한국의 고용 시장에 유입되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3년에서 5년 정도까지의 체류 기간만을 허용하였기 때문에 체류 기간을 넘긴 후에는 모두 불법 이주자의 신세로 전락한다.

 과거 우리 가족과 친지들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집을 떠났듯이, 이들도 생존을 위해 가슴 아픈 이별을 뒤로 하고 한국을 찾았지만, 한국은 이들에게 ‘불법’ 체류에 대한 값비싼 비용을 치르게 만든다. 위험한 분야의 노동, 악덕 사업주의 저임금 횡포와 임금 체불, 갖은 욕설과 모욕, 가족과의 결별, 폭력적인 단속 등이 그러한 비용이다.

 출입국 관리법은 강제 퇴거 대상에 해당된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를 출국시키기 위해 출입국 관리 공무원이 외국인 보호실 또는 외국인 보호소라는 명칭을 가진 시설이나 장소에 그들을 인치하고 수용할 권한을 준다. 그러나 실상은 ‘보호’가 아니라 ‘강제 구금’에 지나지 않는다. 최근 서울시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알려졌듯이, 탈북자들은 영장 없이 장장 170일이나 되는 기간을 외부와의 일체 접촉 없이 일거수일투족이 CCTV로 감시당하는 감금 상태에 있게 된다. 〈집으로 가는 길〉은 프랑스에서 송정연이 체험한 지옥을 보여주고 있지만, 한국 땅에서 외국인 이주민들이나 외국인 범죄자들이 겪고 있는 차별과 억압의 지옥은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의 헌법에는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권리와 자유 그리고 존엄의 주체를 ‘한국 국적을 가진 국민’에 제한하고 있을 뿐, ‘모든 인간’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이주민들에 대해 겉으로는 통합적 다문화 정책을 표방하고 있을 뿐, 뒤로는 철저하게 배제 정책을 구사하고 있다. 외국인의 법적 지위에 대해 국제 협약에 따라 보호해야 할 것을 헌법에 규정하고 있는 국가는 한국과 이탈리아뿐이라고 하면서도, 어떤 경위로 그런 규정이 제헌 헌법 때부터 있어왔는지조차 모른다.

 한국은 이미 1992년 12월 3일 난민 협약과 난민 의정서에 가입했음에도 불구하고, 2000년까지 100여 명이 난민 지위를 신청했지만 단 한명도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은, 인색한 나라로 정평이 나 있다. 2008년 이후 매년 300명 이상이 난민 신청을 하고, 그 가운데 30명에서 70여 명까지 난민의 지위를 얻었지만, 2008년 당시 난민 신청자의 70퍼센트 가량이 통역 없이 면담을 했다고 한다. 2013년에야 국내 난민법이 만들어졌지만, 난민 신청 이후 1년 동안 혹은 소송 기간 중에는 원칙적으로 취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본국에서 정치적 박해를 받을 때보다 한국에 온 이후 더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한국의 외국인 차별 사례에 대해 제소하는 국제 법정이나 세계 법정이 있다면, 한국의 망신살은 전 세계에 뻗칠 지도 모른다.

누가 집으로 가는 길에 도움을 주는가

 그러나 〈집으로 가는 길〉에는 안팎으로 실망스러운 공무원과 서러운 국민만 있던 게 아니었다. 제4의 권력이라고 하는 방송 매체가 있었고, 미국의 미사일에 비견할 만한 네티즌들도 있었다. 하지만 상업주의적 선정주의에 물들어 가고 있는 우리의 방송 매체가 점점 수상스럽다.

 언론 고시에 합격한 수재들이 시청률의 덫에 걸려 예능 프로그램에 연예인들의 젖먹이나 개까지 등장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스토커처럼 인기 연예인들의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는 등 공공의 이익에 활용되어야 할 전파를 지극히 사사로운 영상으로 채워 나가고 있다. 거기다 방송통신위원회가 그 채점표도 공개하지 않은 채, 말도 많고 부작용도 넘쳐나면서 그 존재 이유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종편 방송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재승인 허가했다는 보도가 우울하게 흘러나오기까지 한다. 정치인들 편 가르기나 마녀 사냥에 버금가는 종북 타령에, 네티즌까지 인터넷 댓글을 통해 광기어린 적과 동지의 이분법을 흉내 내고 있다.

 언론이 제 갈 길을 찾지 못하면 집을 떠난 우리가 불귀의 객이 되어도 누구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러다간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데 뜨거운 성원을 보여줄 수 있을 이웃을 모두 잃어버리게 될까 두렵다. 제4의 권력이란 작자들이 술집 종업원에게나 큰소리치며 대접받는 데 만족하기만 할 뿐, 국가 공권력에 순치되어 저항을 체념한 채, 내가 낸 세금으로 먹고 살아가는 공무원과 국가에 대해 호령하고 감시의 눈을 부릅뜨는 일을 포기하게 될까 우려스럽기만 하다.

 우리가 그냥 그렇게 이 형편을 방치해 버린다면, ‘국가’와 ‘공무원’은 〈집으로 가는 길〉의 엔딩에서처럼 이미 집으로 돌아온 지 6개월이나 지난 어느 날 “당신 부인 송정연 씨가 재판이 잘되어 이제 곧 집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공치사를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늘어놓는 전화를 또 다시 걸어올 것이다. 물론 착한 ‘국민’ 김종배는 그 전화에 쓸쓸한 웃음으로 응대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가 보여준 표정으로 보아 필경 그 공무원을 한심스러운 자로 여겨, 그는 대꾸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라면 알고 있는 온갖 쌍스러운 욕설을 전화기 저편에 죄다 쏟아 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