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 정세랑 작가
- 453호
- 기사입력 2020.10.11
- 취재 이지은 기자
- 편집 김유진 기자
넷플릭스 시청이 많은 사람들의 취미가 된 요즘,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보건교사 안은영’이 공개 이후 연일 화제다. 넷플릭스 한국 콘텐츠 TOP3에 드는 등 드라마가 흥행을 거두면서 원작 또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직설적이고 단순한 제목만 봤을 때는 좀처럼 표지 너머에서 무슨 내용이 전개될지 알 수 없다. 이 소설은 제목 그대로 한 사립 고등학교에 근무 중인 평범한 보건교사에 관한 이야기다. 다만 그녀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또 한 겹의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 빼면.
“ 칙칙해지지 마, 무슨 일이 생겨도. ”
보건교사 안은영에게는 ‘젤리’가 보인다. 이 젤리는 살아있는, 혹은 죽은 것들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점성의 응집체다. 소설은 사람을 울고 웃고 들뜨고 아프게 하는 것들이 이러한 젤리의 영향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은영은 사립 M고에서 보건교사로 근무하며, 장난감 칼과 비비탄 총으로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학교의 젤리들과 맞서 싸운다. 때로는 한문 교사 인표에게 허공에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들키기도 하고, 젤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영어 교사 맥켄지와 맞서기도 한다. 소소한 일상 소설인 줄 알았더니 판타지 히어로물이다. 그런데도 제법 잘 어울린다.
“ 어차피 언젠가는 지게 되어 있어요. 친절한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을 어떻게 계속 이겨요.
도무지 이기지 못하는 것까지 친절함에 포함되어 있으니까 괜찮아요. 져도 괜찮아요. 그게 이번이라도 괜찮아요. ”
이 소설은 계속해서 ‘친절’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이 친절을,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을 내세워 주창한다. 은영에게 수많은 히어로물의 주인공처럼 ‘세상을 구해야겠다’는 의지는 없다. 아무도 그녀에게 세상을 구하라는 임무를 주지 않았고, 그녀 또한 세상을 구하는 거창하고 귀찮은 일은 내키지 않는다. 이러한 은영의 모습은 수많은 우리들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은영은 자신에게 젤리가 보인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것을 없앨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몸을 던진다. 자신처럼 젤리를 이용해 돈을 벌고 편하게 살라는 맥켄지의 말에도 주저없이 일침을 날린다. 모든 것을 포괄한 친절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럴 필요 없는데도 그렇게 하는 것. 하기 싫고, 귀찮고, 짜증 나지만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것. 이것이 은영이 사랑스러운 이유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세상이 아직 살 만한 이유일 것이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남을 돕는 일은 사치로 치부된다. 친절은 자주 대가성으로 남용되어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모른다’,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을 외면해 왔다. 하지만 이런 현실과 어쩔 수 없는 세상 속에서도 가려진 것을 직시하고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다. 이 소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분투하고 맞서는 이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정세랑의 다정한 문체로 그려낸 세상은 그래서 사랑스럽다. 삭막하고 외로운 날들이지만 흥미롭고 따뜻한 이 책을 통해 잠시나마 위안을 얻길 바라며, 책에 대한 작가 김초엽의 코멘트로 기사를 마친다.
“정세랑이 그리는 세계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상하고 신기한 일이 자꾸 일어나는데 세상이 망해가는 와중에도 어딘가에는 나를 꼭 붙잡아줄 사람이 살고 있는 그 세계에. ”
사진출처- https://www.yes24.com/Product/Goods/28106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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