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을 잃어버린 당신에게 건넵니다
–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

  • 544호
  • 기사입력 2024.07.28
  • 취재 이준표 기자
  • 편집 오소현 기자
  • 조회수 2191

‘긴 글을 읽기 힘들다’


짧은 릴스, 쇼츠, SNS에 적응한 사회에서 집중력은 심각하게 떨어졌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영상과 게시물이 끊임없이 쏟아진다. 5분이 넘는 영상은 이내 지루해지고 다른 영상을 찾게 된다. 요한 라이의 『도둑맞은 집중력』은 오늘날 집중력 위기 사태를 경고한다. 우리가 어떻게 집중력을 잃었으며, 되찾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저자 요한 하리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정치학을 전공하여 저널리스트이자 뉴욕타임즈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 오며 그는 개인의 문제로 한정한 중독, 우울, 집중력 문제의 사회적 책임을 논한다. 『집중맞은 도둑력』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잃어버린 집중력 위기에 관해 다루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 철학자, 심리학자의 인터뷰, 방대한 통계와 자료, 그리고 그만의 이야기를 결합해 집중력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제공한다. 온전한 시간을 되찾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하나의 키가 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노출되는 정보량의 엄청난 팽창과 정보가 들이닥치는 속도를 아무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착각이었다.”


| 내가 선택한 속도로 살아가기

아침에 일어나 스마트폰을 켜면 SNS, 전화, 알림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사건 사고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우린 과잉 정보에 지쳤다. 범람하는 정보 속 사유는 빼앗겼고 느긋함은 낯선 단어가 되었다. 저자는 독자에게 ‘정보의 소방 호스를 잠글 필요가 있다’고 전한다. 과유불급이란 말처럼 너무 많은 정보는 오히려 독이 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므로 정보를 처리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 이상 수용할 경우 뇌는 과부하에 걸리고 나의 해석, 관점, 의미를 구성할 시간을 부여받지 못한다. 양과 질 두 마리를 모두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다. 정보 필터링은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바다는 온 세상이 온화하고 축축하고 우호적인 무관심으로 나를 맞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 멀티태스킹이 아니라 저글링이다

‘멀티태스킹’은 동시에 두 가지 작업 이상을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세서에서 유래한 단어다. 이 단어는 언제부터인가 인간에게 붙여지기 시작했다. 공부하며 음악을 듣고 전화를 받으며 요리한다. ‘멀티태스킹’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한 가지 일을 하는 것보다 효율적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반대였다. 우리 뇌의 인지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저자는 전한다. 과학자들이 오랜 연구 끝에 밝혀낸 사실은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착각이며, 우리 뇌 속에선 ‘멀티태스킹’이 아닌 ‘저글링’을 하고 있다. 여러 작업 사이를 오가며 뇌는 계속해서 재설정한다. 여기에는 분명 대가가 따른다. 저자는 이를 세 가지 효과로 분류했다.


첫째, 전환 비용 효과다.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이동할 때 뇌는 에너지를 소비한다. 작업 전환에 들어가는 시간이 많을수록 우린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전환하는 데 쓰인 시간 동안 집중을 하지 못하며 수행 능력은 떨어진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영향력이 크다. 업무 수행의 측면에서 문자 메시지를 자주 확인하는 것이 마약을 하고 업무를 보는 것보다 더 나쁘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다.

둘째, 폭망 효과다. 여러 사건을 오갈 때 뇌는 이전에 했던 일을 기억하고자 살짝 뒤로 가 작업을 다시 수행한다. 이때 연결 지점에서 실수가 생기고, 이를 바로잡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된다고 전한다.

셋째, 장기적인 창의력 저하다. 새로운 과점과 해석은 방해받지 않은 자유로운 시간에 주어진다. 하지만 작업을 전환하고 실수를 바로잡는데 계속해서 뇌를 사용한다면 당연히 창의력은 저하된다.


“스크린 타임 기능이 하루 핸드폰 사용 시간이 네 시간이라고 알려준다면, 

사실 우리는 집중력을 상실함으로써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을 잃는다는 뜻이다.


| 몰입의 순간

“몰입은 나를 현재에 머물게 하며 내 몸을 이완하고 정신을 열어준다.”


몰입은 우리의 원동력이다. 우린 몰입하는 순간을 즐긴다. 좋아하는 공부를 할 때, 빠져드는 소설을 읽을 때, 내 마음을 전율케 하는 그 무언가를 할 때 우린 몰입 상태에 빠진다. 그 순간만큼은 가장 소중하고 빛난다. 우리에겐 몰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집중력을 회복하고 내 삶을 되찾을 수 있다. 순간순간에 몰입하는 시간을 늘려 몰입 근육을 키워보자. 우린 지금 몰입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내면과 외부 환경은 몰입을 쉽게 깨트린다. 집중을 방해하는 것들이 주변에 서성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몰입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 저자는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1.명확하게 정의된 목표 선택

2.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

3.능력의 한계에 가깝지만 능력을 벗어나지는 않는 일


세 조건을 충족하는 목표를 잡으면 몰입에 쉽게 빠져들 수 있다고 전한다. 몰입의 순간을 즐겨보자.  


| 자본 앞에 무력한 집중력


“현재 소셜미디어는 우리의 집중력을 낚아채서 최고 입찰자에게 판매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앞서 얘기한 개인적인 해결책들은 분명 효과가 있다. 그러나 명백한 한계가 존재한다. 내가 어째서 집중력을 잃었는지 그 근본 원인을 규명해 주지 못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실리콘벨리에서 찾았다. 그는 먼저 테크 기업을 살펴보았다. 테크 기업들의 목표는 앱을 개발하여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사로잡는 것이다. 사람들이 인스타그램에 1분 1초라도 더 써야지만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이를 위해 매 순간 알림을 보내고 무한 스크롤 기능을 넣어 끊임없이 피드를 보게 한다. 접근 속도와 효율이 높아지는 일을 진보라고 믿어왔지만, 이는 곧 집중력 퇴보를 불러오고 말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주의를 통제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한다. 우리의 주의력은 취약하고 쉽게 흐트러진다. 그리고 기업들은 이를 이용한다. 테크노벨리 기업들이 집중력 파괴라는 악덕스러운 목표를 지니고 활동한다는 뜻이 아니다. 집중력 파괴가 사업 모델의 불가피한 결과임을 의미한다. 저자는 뉴미디어가 가져온 긍정적인 요소를 무시할 수 없지만 반대편의 이러한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해야 한다고 전한다.



| 진실보다 분노가 빠르게 퍼져나가는 사회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잔잔한 것보다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것을 훨씬 오래 바라본다.”


인터넷 매체에서 일어나는 한 효과로 ‘부정 편향’이 있다. ‘부정 편향’은 우리를 화나고 힘들게 하는 사건을 더 오래 본다는 인간 특징을 말한다. 책에 따르면 증오, 말살, 혹평, 파괴 단어가 들어간 사건이 더 많이 공유되고, 리트윗되고 유튜브 알고리즘에 선택된다. 도덕적 분노를 자아내는 단어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열광하고 격노한다. 알고리즘은 이를 학습하기 시작했다.


진실보다 분노를 자극하는 영상을 추천한다. 자극적인 정보가 무분별하게 퍼질 때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를 멈춘다. 분노에 뒤덮였을 때 이성은 작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새 평정심은 우리에게 사라지고 분노만 남는다. 이때 혐오와 우월의식, 극단적 사고가 고개를 들어 우리를 유혹한다.


“알고리즘은 그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리고 영상을 더 오래 보게 만들 내용을 선택할 뿐이다.”


| 해결책이 없다는 말은 포기와 똑같아


“개인적인 해결책을 언제부턴가 떠밀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문제가 없으며 사람들이 조절하지 못해 생기는 문제라고 믿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오랜 시간 헤매고 연구하면서 집중력 위기에 맞설 몇 가지 해결책을 모색했다. 개인의 실패로 문제를 단정하지 않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그가 생각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일까? 책에서 확인해 보자.    


이 밖에도 ‘딴생각은 필요하다’, ’방해 요소에 저항 능력이 낮아진 이유’ ‘집중력을 공격하는 스트레스’ 등 기사에서 다루지 못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몰입의 순간을 다시금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이 한권의 책을 추천한다.


“우리는 집중력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