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F 수작이 선사하는 경이의 향연,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
- 558호
- 기사입력 2025.02.23
- 취재 이정빈 기자
- 편집 임진서 기자
- 조회수 932
리얼리즘 중심의 순문학이 주류 문학으로 여겨지며 문학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 최근 SF 장르 문학이 급부상하며 지평을 넓히고 있다. 필자가 SF 장르 문학을 사랑하게 된 이유도 작가들에 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SF 문학의 한 조각을 이루는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SF에 대한 사랑은 깊어진다. 어떤 작가들이 미래에서만 받아올 수 있는 휴머니즘에 대해 다정히 노래한다면, 어떤 작가들은 서늘하고 치밀하게 독자를 놀래는 재주가 있다. 전자가 천선란, 김초엽이라면 후자는 배명훈, 김보영이다. 특히, 김보영의 소설은 빼어나고 경이로워서 마지막 대목이 끝나면 연신 재독하게 한다.
‘우주 예찬을 하고 싶어서 인간 세상에 방문한 중단편의 신’
저자 김보영은 한국을 대표하는 SF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팬들에게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2004년 『촉각의 경험』으로 제1회 과학기술 창작 문예 중편부문에서 수상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다. 2015년 미국의 대표적인 SF 웹진 <클락스월드(Clarkesworld)〉에 단편소설 『진화신화』를 발표했고, 세계적 SF 거장의 작품을 펴내 온 미국과 영국 하퍼콜린스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저 이승의 선지자』 등을 포함한 선집 『I’m waiting for you and other stories』가 동시 출간될 예정이다. 둘 다 한국 SF 작가로서는 최초의 일이다.
『얼마나 닮았는가』는 김보영의 10년이 고스란히 들어간 중단편집이다. SF 전문 출판사 ‘㈜아작’에서 출간된 만큼, 정통 SF 소설로서의 기대를 품어도 좋다. 단순 ‘내용의 반전’이 독자를 기막히게 한다면, 그보다 고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의 전환’은 독자를 숨막히게 한다. 이번 기사에서는 『얼마나 닮았는가』에 수록된 작품 중, 탁월한 의미 전환으로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김보영의 중단편 수작 세 편을 소개한다.
| 분자로 설명하는 사랑, 「엄마는 초능력이 있어」
책에서 처음으로 소개되는 이 작품은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을 소재로 한 소설을 부탁하는 <에너지움 웹진>의 의뢰로 탄생했다. 소설은 딸과 새엄마의 대화로 시작한다. 둘의 대화에서 공통으로 보여지는 화젯거리는 바로 초능력이다. 각자 지닌 초능력을 언급하며 딸은, 자신을 ‘엄마’라고 칭하는 ‘나’를 냉소적으로 대하며 ‘나’와 ‘진짜 엄마’를 엄격히 구분해 ‘아줌마’라 부른다. 그런 딸에게 해 주는 ‘나’의 이야기는 가히 인상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구분되어 있고 나뉘어 있고, 독립적이고 분리되고 동떨어진 무언가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내 눈에는 세상 사람들이 일종의 기체로 보여. 모두가 섞여 있는 것처럼 보여.
사람들이 가까이 가면 그 경계선이 합쳐지며 섞이는 것을 봐. 내가 만나고 인사하고, 잠시 스쳐 만나고 악수를 하는 사람에게서 나를 봐. 우리가 손을 잡을 때, 내 손바닥에서 증발한 분자가 손바닥을 통해 상대방에게 전해지고 그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을 봐.”
‘나’의 초능력은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분자의 움직임을 보는 능력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그 순간 서로의 일부가 된다. 우리의 경계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허물어지고 있다고, 저자는 ‘닮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만남이 거듭되면 서로의 초능력을 갖게 된다는 전개로, 결국 사람들은 서로를 닮아가고 그 과정에서 사랑이 피어날 수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필자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기도 하다.
| 서글픈 베스트셀러, 「0과 1 사이」
이 작품은 <크로스로드> 웹진에 수록한 이래 10년이 넘도록 베스트 순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소설이 한국의 교육 현실을 꼬집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면, 마냥 기쁘게 다가오지만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이 소설을 쓸 무렵, 15년 전의 이야기라 너무 낡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 후로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건만 한국의 교육 현실은 나아지기는커녕 광기만 더해가는 듯하다고 서글픈 심경을 전했다.
소설은 타임머신의 가능성에 대해 흥미로운 논리를 전개하며 시작을 열고, 교육열이 심한 한국의 모습을 치밀하게 고증해서 제시한다. 여기서 저자는 낮은 곳의 시간이 높은 곳보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의 상대성을 끌어와 아이들 시간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또 양자역학의 논리를 등장시켜 어리석은 권위자, 어른들을 개탄한다.
“내가 1년을 하루처럼 보내는 동안 너는 수십 년의 세월을 살아가는데, 내가 겨우 하루만큼 성장하는 동안 너는 몇십 살쯤 나이를 먹고, 내가 몇 년은 살아야 얻을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며칠 안에 알게 된다고. 누구든 그 문제를 숫자와 기호를 섞은 공식으로 만들어 교과서에 써넣었어야 했을 거야. 사람들은 숫자로 쓰지 않으면 믿지 않으니까.
그래야 어른들이 너희 시간을 그리 하찮게 여기지 않을 텐데.
너희가 어른이 되어 살아갈 고작 며칠의 시간을 위하여, 수백 년의 시간을 버리고 희생하라고 강요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조금은 세상이 달라질 수도 있으련만.”
저자는 이런 교육 실태를 담은 소설이 아이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때가 오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 현대의 애석한 히어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
히어로의 이미지를 떠올리라고 한다면, 우리는 대중들의 존경과 사랑 속에서 활짝 웃는 우상의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제시되는 현대의 영웅 ‘번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번개’는 빛의 속도로 달리는 히어로로, 현실에서 사건 사고가 일어나면 속보가 뜨기 전 시간이 멈춰 있는 동안 모든 일을 해결한다.
하지만 현대에서 히어로들은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악당이 되고야 만다. 사람들 때문이다.
“네가 일을 잘하면 사람들은 네가 일을 한 줄도 모른다.
네가 일이 커지기 전에 막을 테니까. 뭐가 일어난 줄 알기도 전에 해결할 테니까.
사람들은 세상이 본디 그리 돌아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대충 신이 저를 사랑하는 줄로 알 것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히어로의 선의와 도움을 너무나도 당연하다시피 여긴다. 해결 과정에서 조금만 신경을 쓰지 못해도 비난이 일쑤이고, 계정을 통해 메일이 쏟아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선을 행하려 한다. 이는 기어코 선을 포기하지 못하는 히어로의 이야기다.
사실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책과 동일한 제목을 가지고 있는 중편 「얼마나 닮았는가」이다. 걸작을 직접 눈과 손으로 만나 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한 번 덮어둔 채 책 소개를 마무리한다. 한국 문학계의 새 시대를 연 SF 문학의 정수를 느끼고 싶은 당신에게, 이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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