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각(尊經閣)과의 인연

  • 416호
  • 기사입력 2019.03.30
  • 편집 연윤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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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현일 한문교육과 부교수


우리 학교에는 존경각(尊經閣)이 두 군데 있다. 한 곳은 조선 시대 존경각으로 명륜당(明倫堂) 뒤쪽에 있다. 조선시대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중앙도서관 역할을 하던 건물이다. 또 한 곳은  육백주년기념관 4층에 자리 잡은 한국학·동양학 전문 도서관으로, 앞의 존경각을 계승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글쓴이가 존경각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2001년 9월 한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자마자였다. 이곳을 처음 안내 받고 둘러보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세상에 이런 낙원(樂園)이 있다니!”


이 아담한 도서관의 주인공은 예나 지금이나 20세기 이전에 붓으로 직접 쓰거나 활자 또는 목판을 이용하여 인쇄한 뒤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본된 고서(古書)들이다. 그 다음은 여러 기관이나 개인들이 소장한 고서들을 연구자들이 이용하기 편하게 자료총서로 가공한 양장본(洋裝本)들이 두루 소장되어 있었는데, 자료들을 복제하여 제본한 영인본(影印本)과 고서의 내용을 토대로 구두점을 찍어 새로 조판하여 인쇄한 배인본(排印本)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자료총서들은 실제 연구 과정에서 고서 못지않게 중요하지만, 그 규모가 크고 어지간한 고서 못지않게 고가(高價)이기 때문에, 한국학과 동양학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대학에서는 잘 들여 놓지 않는다. 또 현대 학자들의 연구 성과라 할 수 있는 책들-여러 가지 다양한 사전류와 20세기 초반부터 최근까지의 연구서들이 두루 구비되어 있었다.


곧 존경각은 그 당시 글쓴이가 마음속으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것을 거의 그대로 갖춘,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한국학 동양학 전문 도서관이었다. 20세기 이전의 한국학과 동양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일단 존경각에 들어오기만 하면, 거의 모든 것을 그 안에서 해결할 수 있을 정도였다.


원전 해독을 할 때는 다양한 사전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적게는 몇 백 년에서 길게는 천 년 넘은 시간에 축적된 문헌들을 정리한 다양한 자료 총서들을 통해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헌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존경각에만 소장된 희귀한 고서들을 찾아내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이때만 해도 동아시아학술원의 교수님들과 연구원 선생님들이 중국, 일본은 물론 미국과 유럽 각국을 방문할 때마다 수준 높은 안목으로 최신 동양학 연구서들을 주기적으로  구입해 비치해 주었기 때문에 해외 동양학 연구 동향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낙원에도 한 가지 결함이 있었으니,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웠다. 나름 원인을 조사해 보니, 면적이 넓은 존경각 안쪽이나 면적이 좁은 복도 쪽이나 냉난방기 숫자가 별 차이가 없었다. 복도가 늘 더 시원하고 더 따뜻했다. 그래서 견디기 어려울 때면 잠깐씩 복도에 나가서 쉴 수밖에 없었는데, 존경각과 같은 층에 대동문화연구원이 있었고, 연구원이나 연구보조원 역할을 하던 선배·동학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우리 학교 한문학과 대학원은 ‘조선후기 한문학과’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조선후기에 특화된 곳이었고, 이 시기를 전공하는 연구자들의 층이 매우 두터웠다. 복도에서 선배 동학들과 자판기 커피를 한잔 하면서 담소하는 가운데 요긴한 정보들을 서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연구자들의 층이 얇은 다른 학교들과 비교하면 특혜에 가까운 일이었다.


글쓴이는 스물아홉 살 되던 해 구월부터 박사학위를 받은 서른다섯 되던 해 이월까지 존경각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지냈다. 또래 친구들이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집 장만할 자금 모으는 동안, 그 안에 스스로 갇혀서 조용히 책을 읽으면서 보냈다. 이때 평생 학자로 살아갈 수 있는 바탕이 되는 밑천을 마련한 셈이다. 존경각은 글쓴이가 한 사람의 학자로 성장하도록 영양분을 공급받은 고마운 인큐베이터였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받은 뒤로는 한 동안 존경각을 거의 찾지 않았다. 졸업생이 재학생들 공부해야 할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미안한 일이었고, 그 사이 한국학·동양학 관련 양장본들은 늘어나는 수량을 감당하지 못해서 결국 중앙학술정보관의 지하 서고로 옮겨가서 어쩌다 고서를 볼 때나 잠깐 들렀다. 2014년 2학기에 한문교육과에 부임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중 지난 2018년 2학기부터 고서에 해박한 교수님들께서 공교롭게 동시에 연구년으로 해외에 가셔서 분수에 맞지 않게 존경각의 고서선정위원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추석 앞뒤의 어느 날 우연히 인사동에 고서 경매를 구경갔 다가 어떤 책을 발견하고 한 동안 마음이 아련해졌다. 책의 이름은 '협주명현십초시(夾注名賢十抄詩)'. 이 책의 가장 선본(善本)은 경주(慶州) 양동(良洞)의 경주 손씨(孫氏) 종가(宗家)에 오랫동안 소장되어 있다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기탁되었고, 지금으로부터 꼭 10년 전인 2009년 초에 영인본이 출간된 바 있다. 그때 글쓴이의 지도교수님이신 임형택 선생님께서 해제를 쓰셨는데, 뒤에서 기초 작업을 도와 드리면서 다른 연구자들보다 최소한 반년 먼저 이 책을 볼 수 있었다. 다만 전공하는 시기와 워낙 연대가 떨어져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논문을 쓰다 말고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 책은 3책이 1질(帙)을 이루는데, 서문(序文)과 발문(跋文)이 떨어져 나갔고, 군데군데 낙장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상태가 괜찮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고서점이나 경매에 거의 나온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게다가 상당히 착한 가격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작가를 낮추어 응찰자들을 유혹한 뒤 그들의 경쟁심에 불을 붙여 낙찰가를 높이는 것이 경매회사에서 자주 쓰는 수법 중의 하나이다. 그 가격에 낙찰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책만 구경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나중에 경매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던 후배에게 물어보니 유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경매 회사에 연락해 보니, 출품한 분이 특별히 더 욕심을 내지 않았고, 동아시아학술원장님과 대동문화연구원장님의 지지 덕분에 약간의 수수료를 더 얹어 주고 존경각이 구입하여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온 나라에서 고서를 구입하는 학교를 한 손 안에 꼽을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재단과 학교 당국이 꾸준히 고서를 구입해 주는 것이 전공자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뿐이다.


[시경 석각 앞에서(2016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