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지혜 : 쉬운 듯, 쉽지 않은 효

  • 475호
  • 기사입력 2021.09.13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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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재석  유학대학 및 성균 인문 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우리나라 고전 가운데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은 작품은 당연 「심청전」일 것이다. 깜깜한 길을 더듬어가며 날마다 동냥젖을 빌어 자식을 키운 봉사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 용왕님도 효심에 감복하여 심청을 땅으로 올려 보내는데, 결국 아버지와 재회한 심청이 터트린 울음소리에 심봉사가 눈을 뜨고, 아버지와 딸의 지극한 사랑은 기적을 이루며 끝을 맺는다. ‘하늘이 내린 효녀’에 대한 서사 「심청전」은 한국의 효를 포함한 가족 사랑의 정신을 오롯이 반영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와그너 교수(Edward Willett Wagner)는 한국의 가족제도야 말로 21세기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말한다. 또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조지프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한국의 효사상과 경로사상, 가족 제도 등의 설명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한국의 효 사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니 효 사상은 인류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사상”이라며 “한국뿐만 아니라 서양에도 효 문화를 전파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이 지닌 빼어난 문화의 하나로 손꼽던 효가 어찌된 일인지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겐 고리타분한 전통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효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孟子』에는 “悅親有道, 反身不誠, 不悅於親矣.”라는 말이 나온다. 悅親의 悅은 기쁘게 하다는 의미이고, 親은 부모님을 의미한다. 有道의 有는 있다는 의미이고, 道는 길의 뜻으로 여기서는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지칭한다. 反身의 反은 반성하고 돌아본다는 의미이고, 身은 자신을 뜻한다. 자신의 행실을 반성한다는 뜻이다. 不誠의 不은 동사의 의미를 부정하는 부정사이고, 誠은 진실 되고 참되다는 의미이다. 不誠은 참되지 않다는 뜻이다. 於는 ‘~에 대해’를 의미하는 개사로 ‘對於’와 같은 의미이다. 矣는 앞으로 일어날 일의 완료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어기조사로, ‘~일 것이다’의 의미이다. 풀이하면, “부모를 기쁘게 하는 데는 방법이 있다. 자신을 돌아보아 참되지 않으면 부모를 기쁘게 하지 못할 것이다.”는 의미다.


효는 전통사회에서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으로 기능했다. 한자의 ‘孝’는 ‘늙을 老’와 ‘아들 子’가 결합된 회의자로, 자식이 노인을 등에 업고 봉양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부모를 극진히 봉양한 효행의 사례를 선별하여 다양한 포상으로 효를 적극 권장했다. 가난하거나 불우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극단적인 방식으로 효를 실천한 사례들이 사료에 기록되어 있다.


경주사람 許調元이 14세에 부친이 간질로 고생하자, 단지로 수혈하여 병을 치료했다.

寧海府 朴春은 13세에 모친이 죽자 시체를 끌어안고 슬피울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고 부친상에도 3년상을 치렀다. - 『조선왕조실록』「단종실록」


襄陽에 사는 金壽永은 부모가 돌아가자 몹시 슬퍼하여 뼈만 남았지만 채소와 과일도 먹지 않고 3년간 죽만 먹었고, 또 스스로 하늘에 맹세하는 글 1백 32자를 지어 자기 손으로 좌우 무릎에 문신으로 새겨 넣었다.

杆城에 사는 黃弼賢은 어머니가 惡疾을 얻게 되자 斷指하여 약에 타서 먹였는데 어머니의 병이 바로 나았다. -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


割股와 斷指를 최고 등급의 효로 인정해 달라는 상소가 올라오자, 세종은 “손가락을 자르는 類는 비록 正道에 합하지 않지만, 부모를 위하는 마음이 절실하므로, 취하는 것도 좋다.”[세종실록58권, 1432년(세종14)]고 했다. 할고와 단지가 신체 보전을 효로 규정한 <사서> 등의 고전과 어긋나긴 하지만, 생사의 기로에 선 부모의 병을 낳게 할 수만 있다면 신체도 아끼지 않겠다는 자식의 마음이 가상하여 상소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세종의 의도에는 당시 세속의 풍속이 어지러워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일도 발생하자, 이런 사례를 모범으로 삼아 백성들을 교화하려는 목적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조선 중후기에 이르면, 극단적인 행동으로 효를 실천한 사례들의 폐단이 선명하게 부각되기도 했다. 다산은 당시 효행 실천의 문제를 지적하며 「孝子論」을 작성했다.


어떤 사람이 관청에 와서 아버지가 효자임을 말하면서, “할아버지가 병을 앓으실 적에 똥을 맛보아 병세를 점쳤으며, 목욕재계하고 90일 동안 북두칠성에 정성을 다하여 기도드린 결과 몇 년을 더 연명하였습니다.”라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함께 별세하시자 三年喪을 마쳤고, 또 3년이 지난 뒤에야 상복을 벗었습니다.”라고 했다. 官長은 감탄하면서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고 임금께도 알려져, 그 집안의 戶役이 면제되었고, 아들이나 손자의 繇役도 감면되었으며, 그들이 사는 마을 입구에 정표까지 세워졌다.


다산은 이것이 禮가 아니라고 비판한다. 부모를 이용하여 명예를 얻거나, 부역을 피하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와 할고 사례가 역사 사료에 나오지 않는 것도, 절실한 마음을 표현한 효행이기는 하겠지만 훗날 세상 사람들을 잘못 이끌까 염려되어 기록하지 않은 것일 테고, 설사병에 걸린 환자의 병세를 체크하기 위해 의원이 똥 맛을 보는 것인데, 모든 부모의 똥 맛을 보며 효라고 하는 것은, 병의 치료와 전현 무관한 행위라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효는 긍정적인 측면이 많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았다. 효라는 도덕관념이 가부장적 상하지배를 유지하는 규범으로 기능하기도 했고, 효의 본질인 진정성 있는 감정은 온데간데없고,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 포장된 효를 행하는 경우도 많았다.


『논어』에도 당시 효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구절이 나온다.  


지금의 효라는 것은 물질적으로 잘 봉양하는 것을 이른다. 개와 말도 모두 먹여 길러줄 수 있는데, 공경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구별하겠는가?



물질적인 봉양을 잘 하는 것도 사실 쉽지 않다. 디지털혁명이 생활문화로 스며든 이후, 손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경우는 드물다. 해외에 있건 지방에 있건, 언제든 SNS로 부모님과 편리하게 소통할 수 있고, 온라인 배송을 통해 손쉽게 마음을 전할 수도 있다. 방식은 변할 수 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선물을 대신 전해주고, 안부 묻는 것조차 문자로 대체하기도 한다. 다만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먹이 주며 기르는 동물을 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효도는 물질적 봉양을 넘어 진정성 있는 공경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도덕적 경지와 무관하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이 필요에 의한 행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이라 말하면 사람들은 쉽게 수긍한다. 모든 사람을 나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최고 경지를 강조할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모자식간의 따뜻한 사랑의 감정에서부터 실천해나가면 사람다움은 보다 신념을 갖고 힘 있게 실천할 수 있다.


『논어』는 말한다.

효도와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인을 실천하는 근본일 것이다!

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 『論語』「學而」


가족 간의 사이는 天倫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情’의 온도가 여전히 따뜻하다. 설령 부모님이나 형제에 대한 감정의 온도가 식었다할지라도 조금만 자극하면 본래 감정의 온도는 금세 회복할 수 있다. 차별적 사랑이 쉽게 행할 수 있다[易行]는 것은 도덕적 경지나 학습의 유무와 무관하게, 누구나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감정을 행동 동력으로 삼아, 타인을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효는 부모님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미 역시 담고 있다. 『맹자』를 보면, 증자와 증원의 효행에 대한 사례가 나온다. 증자는 그의 아버지 증석을 모시면서 술과 고기를 정성스럽게 차려드렸다.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고 밥상을 물리시면서 남긴 것이 있는지 물으면 있다고 하고, 누구에게 줄 것인지도 물었다.


증석이 돌아가시고 증자는 아들 증원에게 봉양을 받게 된다. 증원도 증자를 술과 고기를 정성껏 차려 드리며 모셨다. 그런데 증원은 아버지 증자가 밥상을 물리려고 할 때, 남긴 것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묻지 않았고, 남은 것이 있느냐 물으면 없다고 대답을 했다. 남은 것을 다시 아버지에게 대접하려 했던 것이다. 증자와 증원의 차이는 뜻을 봉양하는 ‘養志’와 육체만 봉양하는 ‘養口體’에 있다.


부모님의 뜻을 아느냐고 대학생들에게 물으면, 대학 잘 가면, 학점 잘 받으면, 취직 잘 하면 부모님이 기뻐할 것이라 대답하곤 한다. 그럼 대학 못가면, 학점 못 받으면, 취직 못하면 부모님이 슬퍼할까? 의외로 부모님이 진정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학생들이 많이 있다. 처음이야 결과에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겠지만, 부모님은 어쩜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행복하게 살아라’ 등을 바라는지도 모른다. 공자는 말한다.


부모님은 오직 자식이 병들까 걱정하신다.

父母唯其疾之憂.- 『論語』「爲政」


자식의 건강을 바라는 부모님의 마음은 저절로 드러나는 ‘살림’의 마음이다. 건강하게 사는 것은 효의 시작이다. 『효경』에서도  


“몸과 머리카락과 피부는 부모님에게서 받은 것이니, 훼손하거나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이다.”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라고 말한다. 물론 건강하게 살라는 것은 단순하게 몸의 건강만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효도의 마지막을 『효경』에서는 ‘立身揚名’이라고 했다. 후대 사람들은 입신양명이 고위관직에 올라 이름을 드날리는 것으로 착각한다. 원문에 입신의 전제와 양명의 범위가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도를 행하여 몸을 세워, 후세까지 이름을 드날려 부모님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다.”

立身 [ 行道 ], 揚名 [ 於後世, 以顯父母 ], 孝之終也.


‘크게 하나 되는 살림’의 어진 마음을 회복하고, 그 마음을 간직하며 자기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 몸을 세우는 전제조건인 ‘行道’이다. 그러면 저절로 좋은 소문이 난다. 소문의 범위는 현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선현들을 후학들이 기억하는 것처럼, 후대의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 ‘揚名’의 범위이다. 또한 나뿐만 아니라, 나를 태어나게 한 부모님의 공로도 드러내게 하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趙姓女 여사가 사형을 앞둔 아들에게 수의를 보내면서 편지도 동봉했다고 전해진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당당하게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목숨을 구걸하는 것보다, 옳음을 선택한 안중근 의사의 결연한 태도는, 물질적 봉양을 넘어 부모님의 뜻을 봉양하여 입신양명하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고정된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내면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정을 부모님께 전하고,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사욕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바른 마음으로 지금 이 순간을 살아, 천지만물에 선한 영향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효의 본질이자 궁극적인 이상임을 고전 『맹자』는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