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지혜]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 481호
  • 기사입력 2021.12.14
  • 편집 이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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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고재석 유학대학 및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주임교수


평소 많은 사람들 앞에 설 때나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가슴이 쿵쾅거려 말 한마디 못하고, 눈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내성적이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부담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사실 이런 부끄러움은 타고난 성향으로 고착된 경우다. 선천적인 기질이나 성격과 달리 후천적인 환경으로 형성되는 부끄러움도 역시 우리를 작게 만든다. 남루한 집이나 허름한 옷은 남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럽게 하고, 오래된 자동차는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생각하면 ‘당당함’이 먼저 떠오르는 MZ 세대에게 최근 ‘명품 플렉스’ 문화가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플렉스는 ‘구부리다’라는 라틴어 어원을 가진 영어 ‘flex’에서 비롯된 말이다. 90년대 힙합래퍼들이 구부리는 춤동작을 하면서 지나치게 과시한다는 뜻으로 확장되었고, 이후 명품을 과시하는 의미가 추가되어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수입차를 가장 많이 구매한 연령대가 30대라고 한다. 명품매장에서 가장 많은 소비를 하는 연령대 역시 2030이라고 한다. 백화점을 열기 전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렸다 명품 매장에 들어가도 재고가 부족해 원하는 제품을 사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명품은 분명 이름값 한다. 품질이나 구성 면에서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만한 탁월함이 있다. 다만 좋은 명품을 소비하며 자신을 꾸미는 일에 신경 쓰는 노력에 동의가 되면서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계기가 그저 명품 소유에서 가능하다는 흐름은 다소 의문이 들게 한다.


부끄러움은 무엇일까?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논어』는 말한다. “선비가 도에 뜻을 두면서 거친 옷과 맛없는 음식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함께 도를 의논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물론 경제적인 여건이 허락되어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또한 다른 것을 절약하더라도 자기 노력으로 가치를 두고 있는 것에 과감히 소비하여 당당하게 꾸미는 것은 자신에 대한 투자일 수 있다.


양심은 스스로의 잘잘못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맑고 밝은 마음이다. 양심에 거스르는 행위를 하면 저절로 마음이 찔리고 얼굴도 화끈거린다. 부끄러움은 양심 없는 것에 있지, 허름한 옷과 거친 음식에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길을 가서 주변과의 조화를 어그러뜨리지 않고 가야할 길을 가는 자는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다.


『어린왕자』를 보면, 어린왕자 이웃별에 살고 있는 술주정뱅이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왕자가 왜 술을 마시냐고 묻자 그는 ‘잊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무엇을 잊기 위해서라고 다시 묻자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지’라며 머리를 숙인다. 어린 왕자가 다시 뭐가 부끄럽다는 건지 묻자, 술주정뱅이는 “술을 마시는 게 부끄러워!”라고 말하고 침묵을 지킨다. 부끄러운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아직 나의 마음에 생명력이 살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직 남아 있어,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해 부끄러움을 잊어보려고 술을 마신다는 여우가 이해되기도 한다. 부끄러움은 이처럼 자신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는다.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서문을 대신하여 쓴 <序詩>가 있다. 누구나 한 두 구절 읊을 수 있는 잘 알려진 시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이란 희망은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이상이다. 우리는 그렇게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게 순간순간을 살아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쉽지 않다. ‘잎새에 이는 바람’은 일상에서 끊임없이 마주하는 흔들림을 상징한다. 크고 작은 유혹에 흔들리면서 부끄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약함에 힘겨워 하곤 한다. 윤동주 시인은 그럼에도 ‘별’을 통해 주어진 길을 뚜벅뚜벅 가겠다고 실천의지를 밝힌다. 암담한 시절 부끄러운 모습에 고뇌하고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시인의 순결한 의지가 느껴진다.


부끄러움은 내 마음의 생명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반가운 증표이다. 부끄러움이 없다면, 자율적인 힘으로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절망이다. 부끄러움은 나를 저절로 좋은 나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오늘 하루 스스로를 성찰하며 자신의 부끄러움에 대해 돌아보는 보는 것은 어떨까.


첫째, 나는 오늘 부끄러움을 느꼈는가? 부끄러운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면, 두 가지 경우일 것이다. 가야할 길을 올바르게 걸어 나가 양심에 반하는 언행을 하지 않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스스로 대견하다고 칭찬해 주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자만해서는 안 된다. 되어가는 인간은 자신의 부족을 겸허하게 직시하고 여전히 잘못할 수 있음을 경계하며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반면, 마음의 생명력이 죽어버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는 통렬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철면피가 되는 것은 자신의 자존을 손상시키는 시작이다.


둘째, 나는 오늘 무엇에 부끄러움을 느꼈는가? 수줍음과 같은 성격에서 오는 부끄러움도 있었을 것이고, 남보다 초라한 외물로 부끄러움을 느꼈을 수도 있다. 외물은 나의 외면을 치장할 수 있지만, 나를 빛나게 하지는 못한다. 내면의 선한 마음대로 살았을 때, 나는 비로소 선한 빛을 내는 귀한 존재가 된다. 내면의 양심을 거스르는 언행을 하여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잘못된 행위를 감추거나, 조금 싹튼 부끄러움을 없애기 위해 잘못된 행위를 거듭하지 말자. 스스로 아직 나는 좋은 인간이 될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위로하고, 부끄러운 언행을 성찰하고 고치도록 노력해 보자.


부끄러움에 마음아파 하며, 부끄러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주어진 길을 바르게 걸어가야겠다는 실천의지는, 부끄러워해야 할 것을 부끄러워하며, 가야할 길을 걸어 나가, 결국 누구나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지혜로운 인간의 최고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논어』는 말하고 있다.